소설리스트

흑검천하-78화 (78/273)

78화 악군 (4)

단전에서 잠자던 기운이 급격히 일어났다.

홀로 독자적으로 깨어났다면 그의 몸에 위험한 일이 발생했다는 뜻이다. 게다가 그가 운용할 수 있는 혼군의 기운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악군의 것으로 추정되는 맑은 기운도 아닌 것 같고. 주석하는 당황했다.

고오오오-

단전에서 꿈틀거리던 기운이 일어나 혈맥을 흐르면서 주석하는 그 충격파에 몸을 움찔거렸다. 지금 그에게는 아무런 위협도 없었다. 단지 변한 것이라고는…… 악군이 준 차를 마신 것밖에…….

“차?”

주석하는 깨끗하게 비운 찻잔을 심각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갑자기 부들부들 떨면서 기운을 억제하려는 주석하의 움직임을 악군이 모를 리 없었다.

“자네 왜 그러나?”

발 뒤편의 악군은 전혀 동요가 없었다.

무슨 문제인지 주석하도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모르겠습니다. 제가 위험에 빠진 것 같습니다. 무슨 위험인지는…….”

“이 모옥 내에서 위험이라니. 금시초문이군.”

여전히 태연한 악군의 음성은 들리지 않았다. 주석하는 내부에서 꿈틀거리는 내력을 진정시키느라 정신이 없었다. 전신을 돌며 마구 날뛰던 진기가 어느 순간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들썩이던 그의 몸도 점차 안정되었다.

꿈틀대던 내력이 다시 단전으로 돌아가고 주석하는 편안한 상태로 돌아왔다.

그제야 다시 정신을 차린 주석하는 찻잔과 자신의 상태를 연이어 점검했다. 무슨 현상인지 알 것 같았다.

그가 마신 차에는 독이 들어있었다.

그 독이 그를 위협하자 체내에서 잠자던 내력이 잠을 깨고 일어나 독과 싸우며 순식간에 치유한 것이다. 흑도팔군 가운데 독에 능한 자라면 독군이 있다. 방금 깨어난 내력은 독군의 것이다.

“악군…… 괜찮으십니까?”

“뭐가?”

“차에 독이…….”

“응?”

발 뒤의 여인이 경련을 일으켰다. 주석하는 악군이 당황하는 장면을 처음 봤다.

“차에 독이 든 것 같습니다. 제 몸속에 있는 독군의 내력이 갑자기 반응한 것을 보면…….”

“그럴 리가?”

나지막한 신음이 들렸다. 다시 악군의 몸이 격동을 일으켰다.

악군의 신음과 반응으로 보아 주석하의 추측은 확실했다. 방금 함께 마신 차에 독이 들어있었다.

“독암쌍로…… 이것들이…….”

악군이 신음을 뱉어냈다.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그녀도 분명하게 알아낸 것이다.

주석하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독암쌍로는 암기와 독공의 고수다. 그런 두 사람이 방금처럼 일방적으로 당하고 도망칠 리 없다. 그들에게는 독이라는 비장의 한 수가 남아 있었다.

아마도 독암쌍로는 후퇴하면서 독을 살포했을 것이다. 정황으로 보아 찻물에 독을 탄 것이 확실했다. 그 찻물로 차를 마셨으니 주석하와 악군이 동시에 중독된 것이다.

주석하야 원래 독에 무지해서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지만 악군이 이렇게 어이없이 당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만일 악군이 혼자였다면 상황이 달라 더 주의했을 것이다. 악군은 청산방이나 사천당문을 두려워하지 않은 데다 하필 지금 주석하가 방문한 바람에 신경을 빼앗겨버렸다. 그 바람에 일어나지 않을 일이 발생했다.

한편으로는 그만큼 독암쌍로의 용독술이 대단하다고 평가할 수 있었다.

“이 개 같은 녀석들이…….”

악군이 욕설을 내뱉으며 정좌한 상태로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해약이 없으니 운기를 통해 독을 체외로 몰아낼 수밖에 없다.

당연히 적은 이런 기회를 노릴 것이다.

“악군! 나와라!”

역시 언제 돌아왔는지 청산방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흐흐, 악군! 이제 네년은 끝이다!”

뒤를 이어 독로의 확신에 찬 목소리가 이어졌다.

“으드득!”

악군이 이를 갈면서 분개했다. 물론 그래 봐야 돌이킬 방법은 없었다.

조심스럽게 외부에서 모옥으로 접근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중독된 악군으로서는 그들을 저지할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상황이 악화할 조짐을 보이자 주석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처리할까요?”

“넌…… 중독되지 않았느냐?”

“벌써 해독했습니다.”

“그래도…… 나에게도 마지막 방법이 있단다.”

“너무 무리하지 마십시오.”

주석하의 진심이었다. 태연하게 대답하는 주석하에게 할 말을 잃은 듯 발 뒤편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신음을 토하던 악군이 간신히 중얼거렸다.

“그럼 부탁하네.”

주석하는 벌떡 일어났다. 그는 악군의 기운을 체내에 갖고 있기에 친근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찌 되었건 악군은 그와 같은 편이다. 또 이곳에 온 목적을 달성하려면 악군에게 잘 보여서 손해 볼 일은 없다.

모옥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자 코앞까지 몰려든 청산방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은 모두 회색 옷을 입고 있어서 확실히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다만 그들 사이에 예순가량 되어 보이는 흑의를 입은 노인이 한 사람 있었다.

당문의 호법인 독암쌍로 중에 독로가 저자인가. 원래 두 사람이 함께 움직였는데 혼자인 것으로 보아 조금 전에 있었던 전투에서 암로가 다쳤나 보다.

주석하를 본 청산방의 한 녀석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저놈입니다.”

청산방주 목염성이 찜찜한 표정으로 그를 훑었다. 부하들이 엄청난 고수라 했는데 직접 보니 닭 모가지도 비틀기 어려워 보이는 미청년이다.

“네놈은 누구냐? 비켜라! 이곳은 네놈이 올 곳이 아니다.”

당장은 악군을 처리하는 일이 급했기에 목염성은 경고를 날렸다.

물론 주석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목염성은 저런 녀석과 실랑이를 할 시간이 없었다. 악군이 등장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지금 그녀는 중독 상태다. 십 년 만에 처음으로 잡은 호기였다. 언제 다시 이런 기회가 오겠는가.

그는 두말하지 않고 부하들에게 눈짓했다. 얼른 처리하라는 신호다. 정작 부하들은 주석하의 무위를 본 기억이 있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것들이!”

목염성이 소리 지르며 눈을 부라리자 그제야 부하들이 주석하에게 몰려갔다.

주석하는 냉혹한 표정으로 그들을 노려봤다. 살려주는 것도 한 번이다. 이번에도 자비를 베풀 생각은 없다. 지금 그는 악군에게 잘 보여야 하는 상황이고 살인마 소리를 듣는 악군이 살상에 거부감이 있을 리 없다.

“흠, 목숨이 아깝지 않으면 와라!”

주석하는 손가락을 까딱이며 놀리듯 말했다.

멈칫하던 부하들이 방주인 목염성의 눈치를 보다가 어쩔 수 없이 그에게 돌진했다.

주석하는 혼군의 내력을 끌어올렸다. 사람을 살상하려고 의도적으로 무공을 쏟아내는 것은 오랜만이다.

갑자기 주석하의 주위로 시커먼 강기의 막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허억!”

부하들이 경악해서 멈칫하는 순간 주석하의 신형이 빛살처럼 앞으로 쏘아졌다.

혼천십이권. 혼군의 위명을 날렸던 무적의 권법이 펼쳐졌다.

퍼퍼퍼퍽-

애초에 청산방 사람들이 상대될 리 없었다. 주석하가 지나가는 순간 몸의 어딘가가 부러진 녀석들이 바로 주저앉거나 저쪽으로 날아갔다.

이런 장면을 바로 추풍낙엽이라 한다.

쐐액-

한차례 녀석들을 무너트리고 몸을 트는 순간 주석하의 등으로 강력한 기운이 엄습했다. 바로 독로가 던진 암기였다.

순식간에 날아온 그 암기는 무척이나 빠르고 강력하여 호신강기마저 뚫을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과연 독암쌍로의 암기술은 명불허전이었다.

암기가 주석하의 등에 근접하자 독로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 암기에 맞고도 멀쩡한 자를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이 던진 암기는 상대를 가리지 않고 치명타를 먹였으니. 이 싸움도 이 한방으로 끝났다는 생각이 들 만큼 완벽했다.

팍!

암기를 피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주석하는 혼천십이권의 몸동작을 활용하여 암기를 손으로 잡았다. 만일 그가 보법을 익혔다면 이런 무식한 방법을 쓰지 않고 간단하게 피하고 마무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능력이 없었기에 그는 강수를 썼다.

“어?”

독로의 눈동자가 커졌다.

암기를 맨손으로 받았으면 손에 구멍이 뚫려야 정상이다. 적어도 피가 철철 흘러야 한다. 그런데 암기를 잡은 주석하는 손안의 암기를 힐끔 보더니 가볍게 옆으로 툭 던졌다. 마치 날파리를 잡아 던진 것처럼 아주 여유로웠다.

독로의 눈이 왕방울처럼 커졌다. 아무리 호신강기가 손을 감싸고 있었다지만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게 가능하려면 상대의 내공은 그야말로 측량불가여야 한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상황임에도 산전수전 다 겪은 독로는 일말의 가능성을 염두에 뒀다. 악군에게 당한 암로를 떠올리며 이번에는 그럴 여지 자체를 주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눈 깜짝할 사이도 없이 독로의 손이 허공을 휘저었다.

당문의 자랑이자 독로를 빛나게 한 독공이 펼쳐졌다. 그것도 흔적이 없는 무형지독(無形之毒)이다. 나이로 보아 강호 경험이 일천한 저 청년은 독에 전혀 대비하지 못할 것이다.

‘성공이다!’

무형이지만 독로는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다. 그가 뿌린 독이 주석하의 몸을 뒤덮었다.

불과 다섯을 세기도 전에 상대는 중독되어 무공을 사용하지 못하고 주저앉을 것이다. 통쾌한 승리였다.

독로는 환호성을 지르는 대신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정작 주석하는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있었다. 암기를 옆으로 버리는 순간 무엇인가 자신에게 밀려왔다. 그것이 독인지 아닌지 전혀 몰랐으나 순간 단전에서 강렬한 기운이 솟구쳤다.

조금 전 차를 마시며 비슷한 현상을 경험했기에 주석하는 이것이 중독으로 일어난 반응임을 눈치챘다. 그것도 조금 전과 비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내력이 폭발적으로 뿜어졌다.

무형지독의 강렬한 독성에 독군의 내력뿐만 아니라 다른 내력까지 한꺼번에 반응을 일으켰다.

“크윽!”

주석하는 신음을 토했다. 물론 독성 때문이 아니라 내부에서 들끓는 기운 때문이었다. 독군의 내력이 무형지독을 몸 밖으로 밀어냈고 다른 기운은 재빨리 그를 치유했다. 너무 빠르게 반응했기에 주석하는 고통스러웠다.

만족한 독로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녀석! 독이 퍼지니 괴로워하는구나!’

이제 완전히 이긴 싸움이었다.

주석하가 괴로워하면서 성큼 그에게로 달려들었다.

독로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상대는 독에 중독된 이상 무공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다. 게다가 독로는 내공을 포함해서 일반적인 무공에서도 강자다. 절대 어설픈 상대가 공략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다.

“죽음을 자초하는구나!”

독로는 승리의 포효를 지르며 주석하를 맞이했다. 그의 계산에 따르면 녀석은 다섯 걸음을 떼기 전에 쓰러져야 한다.

“다섯…… 응?”

쓰러져야 할 주석하가 개싸움을 벌이듯 그를 향해 손바닥을 날렸다. 당황한 독로는 똑같이 손바닥으로 응수했다.

퍽!

두 사람의 손바닥이 부딪쳤다.

순간 엄청난 충격에 독로는 서너 걸음이나 뒤로 물러섰다.

“무슨 내공이!”

놀랍게도 상대의 내공은 독로의 몇 배나 되는 듯했다.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내공을 쌓았다고 해도 불가능한 데다 지금 저 녀석은 독에 중독된 상태가 아닌가.

독로가 휘청거리는 신형을 간신히 바로잡는 동안 주석하의 손가락에서 혼천십팔지가 주변으로 뿜어졌다.

푸푹-

부근에서 구경하던 청산방 사람들이 속수무책으로 나가떨어졌다. 대부분 가슴에 구멍이 뚫려 피 분수를 뿌렸다.

예상과 다른 결과에 독로의 분노가 치솟았다. 이름도 못 들어 본 새파란 젊은이에게 농락당할 당문 호법이 아니었다.

화가 난 독로는 반격하려고 손을 들었다. 뭔가 이상했다. 수년간 독을 만졌던 그의 손이 중독되어 시커멓게 물들어 있었다.

자신은 독왕이고 분명히 무형지독을 상대에게 풀었다. 상대는 독이라고는 경험한 적이 없는 애송이일 뿐이다.

그런데 반대로 그의 손이 중독 현상을 일으키고 있었다. 언제 저 녀석이 독을 썼단 말인가. 그것도 독에 통달한 독로가 눈치도 못 챌 순간에.

“어떻게 이런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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