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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검천하-79화 (79/273)

79화 화존 (1)

믿을 수 없는 현상에 독로의 안면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 순간에도 중독은 온몸으로 번져 이제는 진기를 끌어올리기조차 힘들었다. 독로는 주석하를 살폈다. 아무리 봐도 상대는 독인이거나 독을 다루는 인물처럼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주석하는 독로의 검게 물든 손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독공을 익힌 적이 없다. 하지만 독공을 익힌 독군의 내력을 품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이 내력 덕분에 단순히 독에 내성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독공을 사용할 수도 있는 건가?

물론 그는 독군의 내력을 자유롭게 운기할 수 없기에 제 의지로 독공을 사용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처럼 독군의 내력이 활성화되어 외부로 뿌려지면 독공이 발휘됨을 알게 됐다.

“이거 신기하네.”

주석하는 자신의 손바닥을 보면서 감회에 사로잡혔다. 이미 한차례 발작을 일으킨 내력은 다시 단전으로 돌아갔다. 지금은 혼군의 내력만 운용하는 상태였다.

주석하가 싸우는 도중 딴짓하는 것처럼 보이자 독로는 화가 폭발했다. 독이 몸에 침투하는 것조차 무시하고 독로는 자신의 독을 끌어올려 공격을 가하려 했다.

그의 체내에 존재하던 독과 방금 침투한 독이 뒤엉키며 서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크윽!”

내상의 징후가 발생한 그는 입으로 검붉은 피를 뿜었다. 일순간 기혈이 엉망으로 엉키면서 주화입마의 조짐마저 나타났다.

“어이, 왜 그래?”

주석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독로의 어깨를 후려갈겼다. 겉으로는 단순한 손동작이었으나 실상은 혼천십이권의 묘리가 숨은 주먹질이었다.

주석하의 주먹을 맞은 어깨가 망가지며 독로는 수장이나 뒤로 날아가 처박혔다. 간신히 내력으로 막고 있던 독이 온몸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크으윽!”

독로의 피부가 점점 검붉게 타올랐다. 이제는 얼굴마저 시커멓게 변해 중독 증상을 보였다.

“도, 독이다!”

독을 의식한 주변 사람들이 거리를 벌렸다.

주석하를 노려보면서 분노를 표출하던 독로가 신음을 토하고 눈을 감았다. 아직 숨이 멎은 것은 아니나 이대로 일각이 지나면 그는 한 줌의 핏물로 화할 것이다.

독을 다루던 자가 독에 중독되어 죽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졌다.

독로를 처리한 주석하는 주변을 둘러보며 히죽 웃었다. 남은 것은 청산방 사람들. 그들 가운데 절반은 이미 죽거나 사망 직전이었고, 그나마 멀쩡한 사람은 절반에 불과했다.

“으, 으…….”

청산방주 목염성은 겁에 질린 채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악군보다 더 강해 보이는 엉뚱한 인물을 만난 터라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지금 주석하를 공격해야 할지 아니면 도망쳐야 할지 빠른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주석하는 청산방 사람들을 모두 죽이진 않더라도 방주를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그동안 틈만 나면 악군을 공격했다니 놓아두면 화근이 될 터였다.

주석하의 눈에 떠오른 분노를 본 것일까. 목염성이 잽싸게 몸을 돌리면서 소리쳤다.

“도, 도망쳐라!”

순간 주석하의 일지가 파공성을 일으키며 허공을 갈랐다. 혼천십팔지가 마치 화살처럼 목염성의 등을 직격했다.

푸푹!

혼천십팔지가 등에서 가슴으로 뚫고 지나가면서 목염성은 발을 떼다 꼬꾸라졌다. 그의 입과 가슴과 등이 피투성이가 됐다. 몇 차례 꿈틀거리던 그는 서서히 경련을 멈추었다.

“으아악!”

독로에 이어 방주마저 쓰러지자 남은 청산방 사람들은 기겁해서 도망쳤다. 주석하는 그들까지 일일이 쫓아가서 살수를 펼칠 생각은 없었다. 사실 문도들이야 위에서 시킨 대로 했을 뿐이니 그들에게 일일이 죄를 물을 수 없었다.

어느새 주변에는 시체만 가득했다. 사람이 많이 죽었다는 사실에, 그것도 자신의 손에 의해 죽었다는 사실에 주석하는 기분이 착잡했다. 아름다운 풍경에 여기저기 붉은 점을 찍은 듯 곳곳에 드러난 시신은 매우 이질적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인가.”

이미 전생에서 수없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섰던 그다. 다만 지금과 다른 점이 있다면 예전의 그는 남에게 목숨을 의탁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목숨에 대한 주도권을 가지지 못했다. 하수의 비애였다.

그나마 지금은 나름대로 고수가 되어 상황이 달라졌다. 이제는 그가 타인의 목숨을 쥐고 흔들게 됐다. 주도권을 잡는 것은 좋은 일이다. 적어도 남에게 휘둘리지 않아도 되니까.

하지만…….

주석하는 떠오르는 온갖 상념을 재빠르게 머릿속에서 지웠다. 흑도팔군을 모두 만나면, 아니 단전에 숨은 내력의 주인 다섯 사람을 만난 후에 그는 백화루주로 변신해야 한다. 피로 얼룩진 세상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행복한 하루를 위해서.

독로와 청산방주의 죽음을 확인한 후 그는 다시 모옥으로 돌아갔다.

***

“괜찮습니까?”

“괜찮다.”

주석하는 발 뒤편의 상황이 걱정됐다. 독에 중독된 악군의 상태는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가 중독을 해결해주기도 어려웠다. 자신이 중독되지 않는 문제와 남의 중독을 치유하는 문제는 완전히 다르다.

여전히 발 뒤편에 앉은 악군은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그 자세에 주석하는 절로 존경심이 일었다. 죽을지 모르는 위험 속에서 저렇게 기품을 지키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것만으로도 그는 악군의 심성을 이해했다. 아마 그녀는 죽는 순간에도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을 고상한 인물이다.

“독이 어떻게 됐습니까? 도와드릴까요?”

주석하는 자신에게 악군의 기운이 잠재해 있음을 생각해냈다. 다섯 기운 가운데 맑은 느낌의 기운이다. 이 기운으로 악군을 돕는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 확실했다.

정작 그녀는 거부했다.

“괜찮다. 퍼지는 독을 내력으로 막았다. 이제 독을 한곳으로 몰아서 체외로 배출해야 하는데…… 금방 끝나지는 않을 것 같군.”

그녀의 대답으로 추정해보면 독 때문에 죽을 일은 없어 보여 주석하도 안심했다. 그가 할 일은 곁에서 조용히 응원하는 일뿐이다.

“그래서…… 자네가 중독되지 않은 이유가?”

“제 몸속에 독군의 기운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독도 독군을 중독 시키진 못하겠지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이었다. 체내에 흑도팔군의 기운을 갖고 있다고 했으니 독군의 기운 덕분에 독에 내성을 지닌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대체 자네는 몇 가지 기운을 품고 있나? 어떻게 흑도팔군의 기운을 갖고 있지?”

“흑도팔군 가운데 모두 다섯 분입니다. 그 사정을 설명하려면 매우 긴 이야기인데…….”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어. 혼군의 무공을 익혔고 독군의 기운도 갖고 있으니 자네 말이 맞겠지. 또 나에게 찾아왔다는 것은…… 나와 같은 기운 또한 품고 있다는 거고.”

“그렇습니다.”

생각에 잠긴 듯 악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주석하는 그것이 독을 치유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생각에 잠겨서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명상에 잠긴 듯한 악군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발 너머로 흐릿하게 보이는 여인의 윤곽은 단정하고 고고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새삼 그녀의 외모가 궁금했다. 그녀는 과연 어떤 인물일까.

“정말 나와 같은 기운을 소유하고 있다면…… 내 무공을 익히기 어렵지 않다.”

처음으로 긍정적인 언급이 나왔다.

“그게 아니라면…… 네가 혼군이나 독군의 기질을 이미 갖고 있으니 익히기 쉽지 않겠지.”

주석하는 묵묵히 그녀의 말을 들었다. 아마 그녀는 지금 갈등하고 있으리라. 자신의 절기를 아무에게나 가르쳐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한 가지 부탁하겠네.”

“무엇입니까?”

“마침 청산방을 물리쳐서 나를 도와주었으니 나도 그 보답을 해야겠지. 자네에게 내 무공을 일부 가르쳐 주겠네. 물론 제대로 받아들일지는 자네의 자질에 달린 거고.”

“잘 압니다.”

“내일 내 친구가 방문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 그렇죠.”

“그 친구랑 내일 비무를 하기로 했네. 그런데 지금 내가 비무할 상황이 아니라서 말이야. 자네가 나를 대신해서 내 무공으로 그 친구를 꺾어주게. 약속한다면 가르쳐주겠네.”주석하는 그녀가 약속을 빌미로 그에게 무공을 가르쳐주려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식 제자가 아니다 보니 무작정 가르칠 수 없어 핑곗거리를 찾는 셈이다.

무공을 배울 수 있다는 생각에 주석하는 흔쾌히 수락했다.

“좋습니다. 제가 반드시 이겨보겠습니다.”

얼마 전에 들었던 그 내기를 떠올렸다. 이긴 사람의 제자에게 진 사람이 무공을 가르쳐주기로 했다던가. 제자도 없는 악군이 굳이 그 비무에서 이기려는 이유를 모르겠으나 비무는 무림인의 자존심이니 승부에서 지고자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문득 그 상대가 누구인지 궁금했다. 흑도팔군의 일인인 악군과 대등하며 친분 또한 꽤 두터운 자가 대체 누굴까. 거기에 악군이 지기 싫어하는 경쟁 상대라면?

떠오르는 인물이 없어 주석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그분은 누구입니까?”

“화존이네.”

화존(花尊). 정파십존 가운데 유일한 여인이다. 그녀가 화존이라 불리는 이유는 그 아름다운 외모 때문이다. 화존은 천상삼화가 떠오르기 이전 세대에 최고의 미모를 지닌 여인으로 주목받았다.

악군과 화존은 정파와 사파로 다른 위치에 서 있다. 그런 두 사람이 친분을 맺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했다.

“왜? 자신 없나?”

화존이라는 위명에 어리둥절해 있던 주석하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려 정파십존이다. 그런 엄청난 인물과 겨루어 이겨야 한다고? 그것도 단 하루 배운 악군의 무공으로?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그가 혼군의 무공으로 전력을 다한다면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하지만 악군의 무공으로는, 그것도 하루 배운 무공으로는 누가 보아도 불가능하다.

“아닙니다. 악군께선 가능하리라 보십니까?”

“불가능하면 시도조차 하지 않았겠지.”

악군의 장담에 오히려 주석하가 얼떨떨해졌다.

“자네가 품은 기가 나와 성질이 같은지 확인해봐야 하지만 지금 내 상태가 이 모양이니 넘어가기로 하겠네. 해볼 텐가?”

“아닙니다. 하겠습니다.”

사실 주석하가 손해 볼 일은 없었다. 그의 목표는 무공을 배우는 것이고, 비무 승부는 관심 밖이었다. 비무에서 이기든 지든 그와 상관없는 일이다. 지금 분위기로 보아 악군에게는 자존심이 걸린, 엄청 중요한 일인 듯하지만.

물론 그렇다고 하여 그도 적당히 임할 생각은 없었다. 무공을 익힐 때 목표치가 있으면 바람직하니까.

“그럼 바로 시작하지. 시간이 없으니.”

“독부터 해독하시는 게 좋지 않습니까?”

“쉽게 해독하기 어렵네. 내가 독에는 면역이 없어서. 시간도 없고.”

본인이 괜찮다고 하니 주석하도 달리 만류하기 어려웠다.

“음악을 배운 적 있나?”

“있습니다.”

“잘 다루는 악기는?”

“퉁소를 조금 합니다.”

어린 시절 주석하는 동생과 함께 악기를 배우긴 했다. 무림 문파라 음악과 거리가 멀었으나 교양 수준으로 배운 적은 있었다. 당시 그는 퉁소를 불었다.

“그 정도면 충분하네.”

발 너머로 책자와 퉁소가 날아왔다. 책자는 악군 무공의 기반이 된 천무태평악(天舞太平樂)이었다. 이 천무태평악에는 기본적인 심법과 더불어 악기에서 나는 소리에 진기를 불어넣어 강기로 유형화하는 음공의 묘리가 담겨 있었다. 그야말로 악군 무공의 정수였다.

퉁소는 빛깔이 거무죽죽하고 상당히 길었다. 대나무 재질처럼 보였으나 평범한 대나무는 아니었다. 퉁소를 손에 잡는 순간 차가운 촉감이 느껴져 주석하는 흡사 나무가 아닌 강철을 만지는 기분이었다.

‘평범한 퉁소가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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