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화존 (2)
“나와 같은 성질의 내공이라면 천무태평악에 수록된 심법을 금방 활용할 수 있을 거다. 일단 해보아라.”
악군의 요구에 주석하는 비급을 펼치고 구결을 읽었다. 지금까지 그가 배웠던 경혼심법이나 혼천신공과 달리 천무태평악은 매우 특이했다. 적응하기 쉽지 않아 보였다.
주석하는 책장을 넘기면서 점점 그 묘리에 빠져들었다. 새로운 무공을 배운다는 것은 무척 흥미로운 일이다.
그동안 악군은 내력을 운기하면서 독을 치유했다. 희미한 햇빛이 들어오는 방 안에는 고요가 감돌았다.
구결을 외우고 그 뜻을 헤아리자 놀랍게도 단전에 숨은 내력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다섯 기운 가운데 맑은 기운이다.
그 기운은 마치 자유를 찾은 야생마처럼 힘차게 그의 혈맥을 질주했다. 주석하는 정신없이 운기조식에 매달렸다.
혈맥을 회전하는 기운이 점차 강화되면서 그의 몸 주위로 옅은 빛무리가 어렸다. 그 기운은 서서히 주변으로 퍼져나가 악군에게 닿았다.
순간 악군이 몸을 움찔하면서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주석하의 엄청난 기운도 기운이었으나 그 맑은 성질은 도무지 믿기 힘들었다.
‘정말이었나? 나와 같은 기운이잖아?’
동일한 기운이 몸 주위를 따뜻하게 달구자 악군은 심신이 편안해졌다. 그 기운은 중독된 그녀를 한결 안심하게 만들어 치유에 몰두할 수 있게 했다.
적어도 몇 개월은 걸리리라 생각했던 치유가 며칠로 대폭 줄어들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게 됐다.
모옥의 창으로 들어오던 햇빛이 어느새 사라지고 내부가 어두워졌다. 악군이 손가락을 튀기자 벽에 붙은 화등에 불이 켜졌다. 촛불이 은은하게 두 사람을 비췄다.
주석하의 몸에서 뿜어진 기운이 요동치면서 두 사람 사이에 쳐진 발이 일렁였다. 정작 주석하는 운기에 푹 빠져 있었다.
***
주석하가 깨어난 시각은 동이 트기 직전이었다.
그는 어두운 창밖과 실내에 켜진 등으로 시간이 꽤 흘렀음을 깨달았다. 무엇보다 악군이 염려됐다. 중독된 그녀는 정상이 아니었으니까.
“괜찮으십니까?”
향이 하나 탈 시간이 흐른 후에야 대답이 돌아왔다.
“괜찮다. 네 몸은 놀랍구나. 혼군의 내력에, 독군의 내력에…… 거기에다 나의 내력까지 뒤섞여 있으니.”
“모두 다섯 가지입니다.”
“다른 둘은 뭐지? 뇌군의 것인가?”
“아닙니다. 염군과 빙군으로 추정됩니다.”
혼군과 악군의 기운도 상반되어 섞이기 어렵다지만 뜨거움과 차가움을 상징하는 염군과 빙군의 기운은 그야말로 극과 극이다.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현상에 악군은 이해하기를 포기했다.
“내력은 움직이기 편한가?”
악군의 내력을 지적하는 것이다.
“천무태평악으로 완벽하게 제어되고 있습니다.”
물론 완전하지는 않다. 혼군의 내력도 혼천신공을 익힌 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됐고 아직도 완벽하진 않으니까. 악군의 내력도 같은 과정을 거칠 것이다. 다만 제어할 수 있는 내력의 양이 팔 할을 넘어섰기에 나머지는 천천히 성취하더라도 문제없었다.
“좋아, 그럼 이제 퉁소를 불어 보거라.”
주석하는 퉁소를 입에 대고 가장 자신 있는 곡조를 불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에 그나마 불어본 경험이 있어 어렵지 않게 적응했다.
아름다운 음률이 새벽을 깨우고 주변을 풍성하게 물들였다. 비록 서툰 연주였으나 악군은 만족하며 음률을 감상했다.
“자, 이제 시작해보자꾸나.”
악군이 음파에 내력을 싣는 원리를 설명했다. 천무태평악 비급에 적혀 있는 내용이었으나 악군이 세세하게 풀어주자 이해하기 한결 편했다. 첫 번째 과정은 내력을 음으로 변화하는 효율을 다뤘고 두 번째는 음파의 강도와 파편 종류를 공격 목표에 따라 최적화하는 방법을 설명했다.
모두 주석하가 처음 접하는 새로운 세계의 무공이었다. 지금까지 검법, 권법, 지법만 수련했던 그는 음공에 눈을 떴다.
다른 방식의 무공에 비해 음공은 내공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까다로운 무공이다. 어찌 보면 그에게 가장 적합한 무공이라 할 수 있었다.
끊임없이 퉁소를 불며 시험해보는 사이 창밖이 서서히 밝아왔다. 그제야 주석하는 밤새도록 무공을 연마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그는 피곤함을 느끼지 못했으나 악군의 건강을 우려했다. 아직 중독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악군은 시범을 보일 수 없었다. 주석하는 낮에 악군이 청산방을 상대했던 장면을 그리면서 스스로 체화하려고 노력했다.
음공에서 악기 종류는 중요하지 않다. 거문고이든 퉁소이든 초반에는 다를지 몰라도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면 마찬가지가 된다. 다만 주석하는 아직 그 경지에 이르지 못하여 다소 부작용을 느끼고 있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문제없단다. 네 기운이 나에게 편안함을 주는구나.”
주석하는 악군의 그 말을 충분히 이해했다. 그 또한 혼군이나 악군을 처음 만났을 때 비슷한 기분을 느꼈으니까.
“그래도 몸을 보중하십시오.”
“저녁부터는 그러지 말라고 해도 그럴 거니까. 오늘 비무는 제대로 해치워야지.”
비무에 집착하는 악군이 안쓰러우면서도 그럴 때마다 비무의 성격이 의심스러웠다.
“비무에서…… 지면 어떻게 됩니까?”
“절대 안 된다. 자존심 문제니까.”
주석하는 악군의 심정을 이해하기 어려웠으나 반박할 수도 없었다. 무리해서 무공을 전하는 가장 큰 목적이 화존을 이기기 위해서라니. 대충 비무에 임하겠다는 생각이 싹 달아났다.
주석하는 열심히 천무태평악에 몰입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퉁소 실력은 확연히 나아졌고 음공 역시 악군에 근접하게 됐다. 물론 당사자인 악군은 아직 멀었다고 그를 몰아붙였지만.
***
정오. 해가 남쪽 하늘을 넘어가기 시작할 무렵, 주석하는 봉담소 옆 넓적한 암반에 앉아 있었다.
그는 퉁소를 들고 노래를 연주하고 있었다. 다만 퉁소 소리는 전혀 나지 않았다.
눈을 감은 채 마치 신들린 듯 퉁소를 불자 봉담소에 떨어지는 폭포에서 물방울이 튀기 시작했다. 그가 연주에 심취할수록 떨어지는 폭포는 더 크게 영향을 받았고 물줄기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급기야 폭포수가 물방울 하나하나로 쪼개지며 주변에 뿌연 안개를 피어 올렸다.
떨어지는 햇빛에 찬란한 무지개가 걸렸다.
이제 주석하는 악기에서 음을 제거하는 무음화의 경지에 도달했다. 비록 음공의 절정은 아니지만 어디에 내놓아도 부족함이 없는 수준이었다.
평소라면 주석하도 하루 만에 거둔 놀라운 성취에 자부심이 가득했을 것이다. 다만 지금은 걱정이 앞섰다.
‘과연 이 실력으로 화존을 이길 수 있을까.’
화존은 정파십존이다. 최근에 신창패존을 상대해봤기에 정파십존의 무력을 익히 추정한다. 그 벽을 넘을 수 있을까.
그는 초조함으로 모옥을 곁눈질했다. 그 모옥 속에는 지금도 독을 치유하고자 운기 중인 악군이 있었다. 온종일 조금도 자세를 흩트리지 않고 가르쳤던 악군의 정성에 그도 감동했다.
비록 악군은 사부가 아니지만 그는 처음으로 악군 같은 스승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상상을 했다. 그는 마음으로는 이미 악군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었다.
악군이 약속했던 비무 시각이 됐다.
주석하는 가부좌를 튼 채 퉁소를 내려놓고 폭포를 바라보았다.
어느 순간 기운이 느껴졌다. 엄청난 압박감이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이러한 위압감을 전할 사람은 흑도팔군이 아니면 정파십존일 테니 당연히 화존일 것이다.
주석하는 그 기운에 대항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다. 장미의 가시처럼 피부를 찌르는 그 느낌은 그리 편하지 않았으나 견디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맞은편, 폭포수를 사이에 두고 반대편 암반에 한 인영이 나타났다. 흐릿한 그림자가 짙어지면서 연분홍 형체로 변했다. 그 형체는 순식간에 아름다운 여인으로 형상화됐다.
주석하는 눈을 부릅떴다.
대략 서른 정도로 보이는 미부가 눈앞에 등장했다. 머리를 틀어 올려 비녀를 꼽고 연분홍 궁장을 입은 여인이었다.
그녀를 보는 순간 주석하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녀는 마치 황후처럼 고아한 기품을 발산했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젊은 여자와 비교해서 전혀 손색이 없는 아름다움을 발산하는 여인이었다.
예전에 그는 우설금이나 남궁서란 같은, 누구나 인정하는 절대적인 미모를 갖춘 여인을 만났었다. 그런데 이 여인도 그 여인들에 조금도 밀리지 않는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실제 그녀의 나이는 겉보기보다 훨씬 더 많을 텐데.
우습게도 주석하는 그녀를 보는 순간 탄성을 터트렸다. 과연 화존(花尊)이었다. 한때 무림 최고의 미녀로 꼽혔다던.
화존의 눈썹이 약간의 분노를 담아 살짝 올라갔다.
“당신은 누구죠? 악군은 어디로 갔나요?”
“저는 주석하입니다.”
“주석하? 악군의 제자인가요?”
“제자는 아닙니다.”
이상하다는 듯 화존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찬찬히 그를 살폈다. 그를 살피던 시선이 봉담소를 향하고 다음에는 주변의 먼 곳을 뒤졌다. 몇몇 시신이 그녀의 눈에 잡혔다.
“또 청산방에서 쳐들어 왔나 보네요.”
“어제였습니다.”
“하아, 저들은 왜 그리 악군을 괴롭힌데…….”
다소 짜증이 섞인 말투에 염려가 묻어있었다. 그것만으로 주석하는 악군과 화존이 적대 관계가 아닌 친구 사이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오늘 비무는 목숨을 건 대결이 아니라 자존심을 건 대결이다.
“그런데 왜 악군 대신 그대가 나와 있죠?”
주석하가 대답하기도 전에 모옥에서 악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존, 혼자 왔어? 제자는?”
“아! 령이는 지금 중요한 순간이라 연무동을 떠날 수 없어. 그래서 나 혼자 왔지. 그런데 이자는 누구야?”
“오늘 그와 상대하면 돼.”
예상치 못한 대답에 화존의 안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녀는 주석하와 모옥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너…… 무슨 일 있는 거니?”
“아니, 그냥 몸이 좀 불편해서. 안타깝게도 오늘 직접 상대해주기 어려워졌어.”
“다음으로 미뤄도 되는데…….”
“약속을 미룰 수는 없지. 그것만으로도 패배를 시인하는 거니까. 염려하지 않아도 돼. 그는 나와 버금가는 실력을 갖추고 있으니까. 너를 실망시키지 않을 거야.”화존은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단지 심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모옥을 노려봤다.
주석하는 그녀의 내심을 읽기 어려웠다.
이윽고 한숨을 내쉬면서 화존이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죠? 왜 악군을 대신하죠?”
“저는…… 흑검문 소문주입니다. 아, 흑검문은 사천의 작은 흑도 방파이고요.”
그가 흑검문에 대해 주절주절 읊었으나 화존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 역시 흑검문은 무림 고수가 관심을 둘 리 없는 문파였다.
“최근에 악군에게 음공을 배웠습니다. 오늘 당신을 상대로 그 음공을 시험해보라고 하더군요.”
주석하는 일부러 하루 만에 음공을 배웠다는 사실을 숨겼다. 괜히 화존을 자극해서 좋을 일이 없다.
“호오! 천하의 화존을 상대로 시험이라…… 악군이 비무를 포기했나 보네. 흠, 그래도 이상한데? 악군이 제자를 들인 것도 아니고……, 그녀는 아무에게나 무공을 가르쳐 줄 사람이 아닌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화존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그를 노려봤다.
“당신! 비무를 한다는 게 무슨 뜻인 줄 알아요? 감히 나, 화존과 비무한다는 게 아무나 할 일은 아니잖아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악군의 무공으로 당신을 상대하겠습니다.”
“흥! 다른 무공을 모르나 보지. 난 상관없어요. 당신이 무슨 무공을 사용하든.”
화존은 기분이 상한 듯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급기야 그녀는 모옥을 향해 소리 질렀다.
“악군! 정 네 뜻이 그렇다면 상대해줄게. 하지만 내기의 보상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건 알지?”
“물론 알아.”
모옥에서 담담한 대답이 들려왔다.
결심을 굳힌 화존이 언성을 높였다.
“규칙은 알죠? 내가 당신의 몸에 손을 대면 내가 이기는 거예요. 반대로 일각이 넘도록 당신에게 접근하지 못하면 당신이 이기는 거고. 이건 악군과 비무할 때의 규칙 그대로니까. 아셨죠?”화존은 보법의 고수다. 지금 그녀는 폭포 저편 암반에 서 있고 주석하는 이쪽 편 암반에 앉아 있다. 주석하는 규칙을 금방 이해했다. 양측의 무공에 적합한 비무 규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