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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검천하-81화 (81/273)

81화 화존 (3)

지금 주석하가 앉아 있는 암반에서 화존이 서 있는 암석까지의 거리는 대략 오 장. 그 사이에는 왼쪽에 폭포가 쏟아지고 아래로는 봉담소의 물이 찰랑대고 있었다.

서로 간의 시야는 그리 맑지 않았다. 폭포수의 물이 튀고 안개가 연하게 끼어 시야를 방해했다.

“그럼 시작할까요?”

화존의 목소리가 맑고 경쾌했다. 얼굴이 예쁘면 목소리도 곱다더니 그녀의 목소리는 과연 그녀의 미모만큼이나 듣는 사람을 기분 좋게 했다.

주석하는 퉁소를 들고 입에 댔다.

무슨 곡을 불러야 할까. 천무태평악은 악보나 음률에 구애받지 않는다. 어떤 곡일지라도 음공을 펼치는 자체에는 무리가 없다. 하지만 이곳은 악군의 영역이고 공식적인 비무다. 그렇다면 악군이 좋아하는 곡을 연주해야겠지.

그는 천무태평악에 수록된 몇 개의 악보를 떠올렸다. 악군이 지었으리라 예상되는, 제목마저 천무태평악이라고 붙은 곡을 선택했다.

“좋습니다.”

주석하는 시작을 선언하며 퉁소를 들었다.

그 순간 번개처럼 화존의 그림자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마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듯 비무를 바로 끝내려고 처음부터 강수로 나왔다.

강호 경험이 부족하면 미처 대응하지 못하고 바로 당하기 딱 좋은 술수였으나 주석하에게는 다행히 전생의 경험이 있었다.

통소 끝이 교묘하게 다가오는 화존을 찔러 갔다.

화존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이게 악군의 무공인가?’

주석하가 휘두르는 퉁소는 음공이 아닌 검법처럼 느껴졌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공격에 임기응변으로 대응한 사실을 그녀라고 모를 리 없었다.

이대로 주석하의 몸에 손을 댈 수는 있었다. 다만 그 경우 퉁소가 그녀를 공격할 것이다. 퉁소의 위력이 별것 아닐 수 있지만 퉁소에 가격당하면 아무래도 모양새가 나지 않는다. 정파십존이 이름도 모르는 어린애에게 맞았다고.

비무를 하더라도 격식을 중요시하는 그녀는 바로 포기했다. 그녀의 신형이 허공을 넘어 반대쪽 암반 위에 착지했다.

“임기응변이 대단하군요.”

그때부터 주석하의 연주가 시작됐다. 화존은 그 노래가 악군이 작곡한 노래임을 바로 알아들었다.

- 오래도록 기다렸죠. 당신이 나를 바라볼 때까지.

구슬픈 음률이 봉담소를 메우면서 주위를 슬픔에 빠트렸다. 동시에 주석하의 주위로 호신강기가 어리면서 기류가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화존의 안면에 긴장감이 어렸다. 이미 수차례 경험해봤다. 악군의 음공은 저렇게 몸 주위를 떠도는 호신강기가 음파에 실리면서 상대를 가차 없이 공격해 들어간다. 그 음률의 파편은 상대를 직격하여 맞은 사람을 죽음으로 인도하는 살상 무기다.

“제법 성취가 좋은데요? 정말 언제부터 배웠어요?”

화존의 질문이 이어졌다. 물론 주석하의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다. 퉁소를 불고 있기에 대답하려 해도 할 수 없다. 다만 연주에 집중하는 주석하를 흩트리기 위해서다.

- 단아한 기품, 숨길 수 없는 표정. 그리움만 쌓였죠.

음률이 흐르고 화존이 다시 도약하려는 순간 강기의 파편이 그녀를 덮쳤다. 그 위력은 그녀의 상상 이상이었다. 흡사 정말 악군을 상대해서 싸우는 기분이었다.

화존은 음파의 공격을 피하며 다시 본래의 위치로 돌아갔다. 그녀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어떻게 이길지 고민하는 기색이다.

“아! 대단해요. 하지만 아직 멀었어요!”

상대를 인정하는 감탄사를 연발하던 화존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절정의 보법이 펼쳐진 것이다.

파아아악-

이번에는 음파의 파편이 서너 개로 쪼개지며 화존이 서 있던 자리를 급습했다.

- 이별은 피할 수 없고 사랑은 가슴을 가득 메워.

화존은 주석하의 공격을 피하면서 접근을 시도했다. 그녀의 신형은 더욱 빨라져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주석하에게서 일 장 이내로 접근했을 때였다.

급격하게 음파가 일어나면서 무지막지한 음공이 그녀를 공격해왔다. 과연 악군의 음공은 명불허전이었다.

이 초식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화존은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감미로운 퉁소 소리가 그녀의 귀를 지배했다. 연주가 무르익으면서 퉁소 소리에 실린 공력이 그녀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화존의 안면에 경탄의 빛이 어렸다.

- 꽃비가 날리고 기다림이 길어져도 사랑은 돌아오지 않아요.

주석하가 뿌리는 음파의 파편이 점점 강해졌다. 파편의 개수가 셀 수 없이 늘어났다. 파편은 물샐 틈 없이 연주자를 감싸면서 사방을 방어했다. 보법이 절정에 달한 화존이라도 저 파편을 뚫고 주석하에게 접근하기 쉽지 않았다.

애초에 화존은 주석하를 얕잡아 봤다. 설사 악군 본인과 대결하더라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하물며 얼마나 배웠을지 모르는 제자쯤이야.

그런데 그녀의 예상이 빗나갔다. 일단 상대의 공력이 어마어마했다. 거기에다 음공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공세를 펼쳤다. 마치 악군을 상대하는 것처럼. 이 음파의 기운은 분명히 악군의 것이었다. 분명히 다른 사람인데 어떻게 같은 사람처럼 느껴지는 걸까.

- 당신을 그린 하늘은 여전히 변함없네요. 마치 내 마음처럼.

애절한 곡이 화존의 심금을 자아냈다. 말할 것도 없이 훌륭한 연주였다. 이런 연주에 빠져들면 그녀가 불리했다.

“사랑하는 사람 있어요? 곡이 애절한데요?”

푸아아악-

화존의 신형이 수 개로 분리되었다. 절정의 보법이 만들어낸 허영(虛影)이었다. 마치 여러 명이 동시에 주석하를 노리는 것처럼 그림자가 주석하에게 몰려갔다.

퉁소 소리가 더욱 구슬프게 울리면서 폭포수를 강타했다. 음파의 파편과 물방울의 파편이 어우러지며 주변으로 뿌연 기막을 이뤘다. 쏟아지는 햇빛이 기막에 찬란한 무지개를 새겼다.

- 미소 짓던 당신을 기억하기에 당신의 눈빛에 묶여버렸죠.

‘으윽!’

화존은 음파의 충격을 몸으로 버티면서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보법이 빨라질수록 음공 또한 위력을 더하고 있었다. 음파는 방어에서 공격으로 전환했다. 이제는 상대를 경시하는 마음을 버려야 했다. 손해를 감수하지 않으면 상대에게 접근하기 어려웠다.

“악군의 화신? 당신! 무공이 대체…….”

화존은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재차 접근을 시도했다. 절정의 보법을 펼치는 그녀의 신형이 허공에서 사라지고 그림자가 가득 주변을 메웠다.

파파팍-

화존의 손끝에 어린 수강(手罡)이 주석하의 호신강기를 깨려고 시도했다. 역시 정파십존이었다. 그 충격파는 어마어마하여 주변에 파공성을 남기고 퉁소의 음률을 흩트렸다.

주석하 또한 그 충격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 내부에서 기혈이 들끓어 올랐다. 이제 정황은 단순한 비무 수준을 넘어서고 있었다.

- 눈을 감아도 떠오르는 그대의 고운 눈매는.

퉁소 음률이 더욱 강하게 이어지며 화존을 몰아붙였다.

공세에 실패한 화존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물론 이곳에 올 때 이런 어려운 싸움을 예상치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상대는 악군이 아니지 않은가. 악군과의 자존심 싸움에서 그녀는 절대 질 수 없었다.

그녀는 암반을 박차고 폭포수를 넘어 주석하에게 쏘아져 갔다. 혼신의 힘을 다해 수강으로 음파의 파편이 맴도는 주석하의 호신강기를 깨트려야 한다.

푸악-

거친 파공성이 울리고 다시 충격이 그녀에게 강해졌다. 이 충격은 주석하에게도 똑같이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의 젊은 나이로 보아 정파십존에 이른 그녀를 절대 상대할 수 없을 것이니.

화존은 음파의 공격을 통과하면서 질주했다. 마치 오색의 빛이 쏟아지는 것처럼 화사한 음률의 파편이 공격적으로 그녀를 휘감았다.

-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고 그리움만 쌓이네.

퉁소 소리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심지어 화존의 거센 공격이 가해졌을 때도 꿋꿋함을 유지했다. 그녀는 이런 현상이 어떻게 가능한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충격 속에서도 내력의 흐름이 자유롭다는 것을 믿기 어려웠다.

몇 차례 공격이 실패하면서 오히려 화존이 지치고 있었다. 원래 음공은 내력 소모가 심하다. 하지만 음파의 공격을 끊임없이 피해야 하는 그녀 또한 내력이 소모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움직임이 느려지면 여지없이 음파의 파편이 그녀를 공격했다. 다행히 아직 큰 곤경을 당하지는 않았다. 기껏 칼에 벤 것처럼 옷이 찢어지는 수준이었다.

그녀를 초조하게 만드는 것은 시간이었다. 일각 동안 그의 몸에 손을 데지 못하면 그녀의 패배다. 벌써 시간이 절반을 넘어서고 있었다. 평범한 공격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 입증됐다. 점점 그녀를 막다른 길로 몰아넣고 더 강력한 수를 쓰도록 전세가 변하고 있었다.

- 그리워하고 사랑하리니. 쏟아지는 눈물은 그치지 않고.

“예상보다 훨씬 대단하네요! 좋아요! 이제 제대로 해봐요! 다칠지도 몰라요!”

화존이 경고를 울리며 재차 보법을 밟았다.

쾌속무비!

아! 그녀를 정파십존에 이르게 한 절정의 보법이 재현됐다. 마치 허공을 밟는 것처럼 그녀의 신형이 허공을 떠서 움직였다.

화판답공(花瓣踏空). 꽃잎이 허공을 밟는다. 화존이 펼치는 최강의 보법을 일컫는 말이다. 이 보법으로 그녀는 당당하게 정파십존에 들었다. 그녀는 그 누구보다 빨랐고 유연했으며 허공에서도 자유로웠다.

- 긴 세월 막을 수 없고 흘러가는 그대의 사랑 잡을 수 없네.

퉁소 소리도 절정에 접어들었다. 화존이 강해진 만큼 주석하의 음공도 강력해졌다.

예리한 수강이 공격해 들어오면 그의 몸을 휘도는 음률의 파편이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더 강력하게 빛을 뿜었다. 그때마다 순백색의 빛이 폭발하면서 주변을 장식했다.

지금 두 사람의 대결을 관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나 이 비무는 보기 드문 명장면이었다. 목숨을 걸지 않았으나 어떤 대결보다도 치열했다. 이기겠다는 오직 하나의 목표를 위해 상대를 노렸다. 시간이 정해져 있는 이 대결은 점점 격해졌다.

예정된 일각의 시간이 가까워졌다.

곡조도 반복되는 후렴구로 바뀌었다.

-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고 그리움만 쌓이네.

퉁소 소리가 두 사람의 심금을 자극했다. 주석하는 곡이 주는 애달픈 감정에 빠져 무아지경으로 퉁소를 연주했다. 악군에게 이 곡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지만 슬픔이 가슴을 메웠다.

그의 뇌리에 한 여인의 형상이 점차 뚜렷하게 드러났다. 그 여인은 그를 보면서 원망이 담긴 눈길을 보냈다. 사랑과 그리움이 절절히 담긴 표정이었다. 슬픔이 담긴 그 아름다운 얼굴에 그는 충격을 받았다. 그 여인의 형상은 우설금이었다. 그녀가 왜 이 순간 떠오르는 건가.

“각오해요!”

화존의 경고가 설핏 그의 상념을 깨트렸다.

동시에 외부에서 강력한 파공음이 엄습했다. 놀랍게도 한곳이 아니었다. 사방 전체에서 화존의 수강이 그를 노리고 들어왔다.

푸아악-

기막이 찢어지는 소음과 함께 옷자락이 찢기는 소음이 동시에 울렸다. 다시 단전의 내력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몸이 본능적으로 위험을 알리고 있었다. 지금 최대한으로 운용 중인 악군의 내력이 아닌, 그가 제어할 수 있는 혼군의 내력도 아닌, 다른 내력이 그의 의지와 무관하게 맹렬하게 작동했다.

음파의 파편이 화존을 강타했다. 그것도 한둘이 아닌 수백 개의 파편이었다.

그 충격은 엄청났다. 화존은 순간 선택의 기로에 섰다. 이대로 물러날 것인가. 그렇다면 다시 이 상황이 계속된다. 불리하지는 않다. 다만 시간이 부족했다. 어느새 시간은 약속한 일각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여기에서 더 강력한 공세를 취한다면?

그녀의 손은 호신강기를 깨트리고 주석하의 몸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그녀 또한 큰 충격을 받게 된다. 비록 이 비무는 생사를 건 싸움이 아니지만, 절대로 지고 싶지 않았다. 악군도 아닌 이름 모를 서생에게는 더더욱.

당장 타격을 입더라도 이기고 볼 일이다.

- 그리워하고 사랑하리니. 쏟아지는 눈물은 그치지 않고.

애절한 퉁소 소리가 그녀의 귀를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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