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82화 (82/273)

82화 화존 (4)

충격에도 퉁소의 음은 끊기지 않았다.

화존은 주석하의 심후한 공력에 감탄했다. 음파에 실린 공력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 증가하고 있었다.

‘이자의 내력은 정파십존이나 흑도팔군에 버금간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감탄만 할 때가 아니었다. 상대의 공력이 강하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에게 불리했다. 물론 그럴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일각은 생각보다 훨씬 짧다.

- 긴 세월 막을 수 없고 흘러가는 그대의 사랑 잡을 수 없네.

후렴구의 반복이 끝났다. 이제 마지막 간주가 들어가면 주어진 시간도 끝이다.

마음이 조급해진 화존은 모험을 감행하기로 했다.

화판답공의 최고 경지!

그녀는 마지막 승부를 걸었다.

허공에서 화존의 존재가 사라졌다. 그만큼 그녀의 움직임이 빨라지고 정교해졌다.

이제 사방, 팔방, 하늘에서도 그녀의 신형이 나타나 주석하를 덮쳤다. 허공을 자유롭게 움직이는 절정의 보법이 화려하게 피어났다. 마치 꽃잎이 바람을 타고 허공에 흩날리듯 그녀의 신형도 변화무쌍한 궤적을 그렸다.

사람은 하늘을 날 수 없다. 새가 아닌 이상 허공으로 날아오른 물체는 아래로 떨어지기 마련이다. 화존의 보법은 그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고 있었다. 그녀가 왜 정파십존인지 명확하게 증명하는 장면이었다.

퉁소 소리가 더욱 고조됐다. 음파의 파편이 주석하의 주변을 맴돌며 방어하는 흐름에서 벗어나 그녀를 휘몰아쳤다. 최상의 방어는 공격임을 증명하는 듯했다.

피부를 강타하는 충격에 화존은 입술을 깨물었다.

‘질 수 없어!’

쾌속무비!

화존의 그림자가 주석하를 엄습했다.

콰아아앙-

강기가 부딪치며 음파와 강기의 파편이 천하를 뒤흔들었다. 온몸을 휩쓰는 강력한 충격에도 화존은 손을 거두지 않았다. 마지막 기회를 포기할 만큼 그녀는 어리석지 않았다.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는다.

오직 승부를 보겠다는 일념이 무리수를 강행하게 했다.

머리 위를 뚫고 들어오는 충격파가 주석하를 억눌렀다. 그 압력은 마치 산악이 무너지는 듯했다.

평소라면 이 정도에서 주석하도 그만두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눈앞에 꼿꼿하던 악군의 모습이 그려졌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독을 치유하는 지금까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그녀의 자세가, 상한 몸임에도 포기하지 않고 이 비무를 이기려고 그를 가르치던 그 장면이 잊히지 않았다.

게다가 천무태평악 곡조에 숨은 애절한 감정까지.

주석하는 자신도 모르게 악군의 내력을 극한으로 퉁소에 집약했다. 퉁소의 음공이 더욱 강해졌고 자연스럽게 육신을 보호하는 호신강기가 엷어졌다.

그 틈을 화존의 수강이 깨고 들어왔다.

단전에서 날뛰던 내력이 순식간에 그를 보호했다. 그 내력이 그를 감싸면서 급격히 찔러오는 화존의 수강을 막았다.

콰앙-

예상치 못한 강력한 반탄력에 화존의 손이 멈칫했다. 주석하의 정수리에서 불과 한치도 떨어지지 않은 지점이었다.

동시에 퉁소의 음파 파편이 화존을 휩쓸었다. 악군의 모든 내력이 실린 음공의 파편이 화존에게 집중되면서 걸리는 모든 것을 찢어발겼다.

“아악!”

화존의 공격은 성공하지 못했다. 한 치를 남겨두고 더는 접근할 수 없었다.

그녀의 보법이 멈칫하는 순간 그녀는 강기의 폭풍에 휘말려 십여 장을 허공으로 밀려났다.

봉담소 주위로 커다란 폭풍이 휘몰아쳤다.

강기의 파편, 물보라와 찢어진 옷자락에 흙먼지까지 모든 것이 뒤범벅되어 공간을 메웠다.

화존의 연약한 몸이 그 반발력에 허공으로 붕 떠오르다가 포물선을 그리며 아래로 추락했다.

풍덩-

그녀의 몸이 봉담소의 물에 잠겼다.

주석하도 무사하지 않았다. 화존의 공격에 반발하여 폭주한 내력이 그의 혈맥을 무지막지하게 흐르면서 엄청난 고통을 가했다. 만일 그가 악군의 내력만을 사용했다면 이 승부에서 이길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비록 그는 의도하지 않았으나 다른 내력이 그를 보호함으로써 승리를 얻게 됐다.

그는 신음을 흘리면서 내력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다. 퉁소 소리는 어느새 끊어졌다. 막 곡이 끝나기 직전이었다.

“하아!”

주석하는 묵직한 신음을 토하며 간신히 흐느적거리는 몸을 바로 세웠다. 겉으로 보기에 그는 처음과 똑같이 암반에 앉은 채 퉁소를 들고 있었다. 그의 자세는 악군을 연상케 했다.

한바탕 난리가 지나간 이곳은 다시 평화로운 전경을 회복했다.

봉담소로 떨어지는 폭포 소리만이 귀를 시원하게 울렸다.

어떻게 된 걸까?

어쨌든 화존은 그의 몸에 손을 대지 못했으니 그는 지지 않았다.

“화존은?”

그의 시선이 아래쪽 봉담소를 향했다.

연못에 빠져 얼굴만 물 밖으로 내밀고 있는 한 여인이 보였다. 여인이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며 외쳤다.

“대단하군요. 패배를 인정해요!”

화존은 시원시원했다.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주석하도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로써 악군에게 승리를 안긴 것인가. 악군은 열정을 다해 음공을 가르쳐 주었고 그는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주석하는 화존의 상태가 조금 이상하다는 사실을 그제야 눈치챘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여전했다. 다만 그녀가 입고 있던 분홍빛 궁장이 음파의 공격으로 완전히 찢겨 사라지고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음파의 파편이 그녀의 피부를 직접 강타하진 않았다는 점이다.

지금 그녀의 모습은 민망스럽게도 중의로 입은 얇은 유삼만 걸친 상태였다. 그것도 물에 빠져 완전히 젖었다.

그의 시선을 의식한 화존이 미소를 날렸다.

“그렇게 쳐다보면 실례 아닌가요? 이 나이에 총각 시선을 받으니 즐겁기야 하지만요.”

예의상 시선을 돌리긴 해야 하는데 주석하는 그럴 생각이 들지 않았다. 화존의 아름다운 외모가 또 그녀의 발랄한 성격이 마음에 들었던 걸까. 그는 민망할 만큼 화존을 뚫어지라 쳐다봤다.

화존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투덜댔다.

“나 이제 물에서 나갈 건데…… 뭐, 다 늙은 여자 책임질 생각 있으면 계속 봐도 좋고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그의 시선을 무시하고 화존이 연못에서 몸을 일으켰다. 얇은 유삼이 몸에 착 달라붙은 채 물방울이 곡선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주석하의 눈이 확 커지는 순간 짙은 장포가 허공을 날아와 화존을 감쌌다. 화존의 상황을 눈치챈 악군이 모옥에서 장포를 날려 보낸 것이다.

재빨리 장포로 몸을 두른 화존이 물 밖으로 뛰쳐나왔다.

“흥! 다른 사람 같으면 그 눈을 뽑았어!”

화존이 이를 갈며 그를 노려보았다.

사실 무례를 범할 생각은 아니었기에 주석하도 민망해져서 안면을 붉혔다.

그가 뭐라고 변명하기도 전에 화존이 신형을 날려 그가 앉은 암반으로 날아왔다.

“그래서 엉큼한 청년! 나 책임질 생각 있어?”

화존이 생글생글 웃으며 그의 앞에 섰다. 화존이라는 별호답게 그녀의 미모가 폭발적으로 빛난다. 더구나 물에 젖은 그녀의 머리카락이, 그녀의 안면 윤곽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장면은 환상 그 자체였다.

“헉!”

헛기침을 들이키는 주석하를 놀리듯 화존이 깔깔 웃었다. 패배했음에도 목소리는 밝게 통통 튀고 눈은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다시 보여줄까요?”

여민 장포 자락을 살짝 벌리는 화존의 도발에 주석하는 질끈 눈을 감았다.

“호호! 놀라긴. 주 공자라고 했죠? 무공이 매우 뛰어나던데…… 누구에게 배웠어요? 악군에게 음공을 배운 것은 맞고…… 그게 전부가 아니죠?”

그가 대답하기도 전에 모옥에서 경고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화존! 쓸데없는 관심은 거두지?”

“네 제자가 아니라니 자꾸 관심이 가잖아?”

화존이 생글생글 웃으며 주석하를 쓱 훑었다.

주석하는 머쓱해져서 머리를 긁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나이가 많은 선배인 것은 확실한데 겉보기에는 그와 나이 차가 없어 보이니 당황스러웠다. 더구나 그녀의 거리낌 없는 태도는 그의 말문을 막았다.

악군이 다시 소리쳤다.

“졌으면 얼른 약속이나 이행해.”

“알았어. 누가 안 한 댔니? 제자 불러와. 내 보법 전수해줄게.”

모옥을 향해 냅다 소리 지른 화존이 슬그머니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제자도 없으면서…….”

주석하는 두 사람의 비무에 걸린 약속을 생각해냈다. 진 사람이 이긴 사람의 제자에게 무공을 가르쳐주기로 했다던가. 대충 정황을 보니 화존에게는 제자가 있는 듯했으나 악군은 제자가 없었다.

“앞에 있는 그 사람에게 전수해. 그거면 약속을 이행한 거야.”

이어진 악군의 대답은 두 사람을 깜짝 놀라게 했다. 당사자인 주석하도 뜻밖의 제안에 어리둥절했다.

화존이 미간을 찌푸리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이 사람? 네 제자 아니라며?”

“어차피 난 제자 안 들일 거니까 상관없어. 그에게 네 보법을 전해.”

“끙! 그건 좀…….”

화존이 머뭇거리자 악군이 다시 요구했다.

“그렇게 해줘. 대신에 내 음공을 령아에게 전해줄게.”

“정말?”

화존의 안색이 환하게 밝아졌다.

령아가 화존의 제자인 모양이었다. 추측해 보니 비무 대결은 화존이 자신의 제자에게 음공을 전할 목적으로 성사된 듯했다.

여전히 얼떨떨한 주석하에게 화존의 시선이 돌아왔다.

“배울 생각 있어?”

무려 정파십존의 절기다. 이것은 기연이라고 부를 행운이다. 그는 거부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주석하는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화존이 흡족한 표정으로 주석하의 주위를 돌며 그를 훑어봤다.

“흐음, 괜찮네. 그럼 내 제자 할래?”

“네? 아, 아뇨.”

당황하는 주석하가 흥미로운 듯 화존이 그를 힐끔거리면서 킥킥 웃었다.

“하긴 스승과 제자는 혼인하면 이상하잖아?”

“예?”

띵-

그 순간 모옥에서 음파의 파편 하나가 번개처럼 화존을 급습했다.

“으악!”

화존이 다소 과장된 몸짓으로 후다닥 물러서며 모옥을 노려봤다.

“너 자꾸 헛소리할래? 한 번 더 하면 이번에는 장포를 확 벗겨버릴 거야!”

“허억!”

악군의 경고에 화존이 다급하게 장포를 여몄다.

그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주석하는 혀를 찼다. 아무리 생각해도 화존의 나이가 얼마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피이, 알았어. 가르쳐주면 되잖아!”

한바탕 소리를 지른 화존이 다시 주석하에게 시선을 돌렸다.

“흐음, 화판답공을 원해? 아니면 백변환영보를 원해?”

보법에서 화존의 비전절기가 하나가 아닌 모양이었다. 당연히 주석하는 욕심을 부렸다.

“혹시…… 둘 다는 안 될까요?”

“욕심은! 이건 여자를 붙여주니 처녀 맞냐고 우기는 꼴인데?”

“네?”

그게 왜 그렇게 해석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지만 주석하도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기회가 닿은 이상 최대한 많은 것을 얻어내야 했다.

그를 쓰윽 살펴보던 화존이 깔깔 웃으며 말했다.

“좋아, 내 부탁 들어주면 둘 다 가르쳐줄게.”

“뭔데요?”

“흐음, 너…… 여자한테 코 꿰일까 봐 긴장하는구나?”

“예?”

“다음에 내 제자 만나면 둘이서 비무를 해. 그게 전부야. 어때?”

그 정도 부탁이야 충분히 들어줄 수 있다. 주석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수락했다. 어려운 부탁도 아니고 애초에 이 비무가 제자에게 무공을 전수하려는 목적이었다니 지금 요구를 충분히 이해했다.

“자, 그럼 넌 어떤 보법을 알아?”

화존이 그를 빤히 쳐다봤다.

아름다운 얼굴과 맑은 눈동자에 주석하는 적잖게 당황하면서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보법요? 모르는데요?”

“흐음, 그래? 보법 배운 적 없어?”

“없는데요?”

“무……식하긴! 너 대체 소속 문파가 어디야? 무공도 제대로 안 배웠어?”

통통 튀는 목소리와 달리 내용은 바늘로 콕콕 찌른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화존의 표정에 주석하도 한숨을 내쉬었다.

“저요? 흑검문이라고요, 사천에 있는 작은 문파인데요? 거기에서는 사실 가르쳐 주는 거라고는…… 없죠.”

“흐음, 개천에서 용 난 건가?”

그녀가 빙그레 미소를 지은 채 다시 주위를 돌면서 그를 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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