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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검천하-83화 (83/273)

83화 화존 (5)

화존의 시선이 조금 부담스럽긴 했으나 주석하는 꿋꿋하게 버텼다.

“그래, 모를 수도 있지. 모르면 배우면 되고. 이해할게. 지금부터 딱 반나절 동안 가르쳐줄게. 받아들이고 못 받아들이고는 너 자질 문제야. 알지? 뭐…… 더 배우고 싶어서 제자로 들어오겠다면 환영해. 그럼 시작할래?”주석하는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화존과의 대화가 괜히 부담스러워서 빨리 시작하고 싶었다.

“잘 봐.”

화존이 허름한 장포의 옷고름을 단단히 여몄다. 그 장포 아래로 물에 젖은 포혜(布鞋)가 작은 발을 감싸고 있었다.

“먼저 백변환영보(百變幻影步)부터 가르쳐줄게. 발 위치를 잘 봐. 약간 혼란스럽겠지만 이름이 백변인 것에 비하면 별 것 아니거든.”

화존이 널뛰기하듯 가볍게 몸을 움직이며 이동을 시작했다. 높은 암반 위임에도 그녀는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주석하는 그녀의 발을 홀린 듯 주시했다.

화존의 발은 아름다웠다. 천으로 만든 작은 신발에 싸인 발이 예쁜 것인지 아니면 그녀의 발동작이 우아한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어찌 되었건 주석하는 그녀에게 무한한 호감을 느꼈다.

“하나, 둘 셋, 넷……. 알겠니?”

주석하는 고개를 저었다. 한두 번 보고 알면 무공 천재다. 당연히 주석하가 그 범주에 들어갈 일이 없다.

“흐음, 제대로 보는 것 맞아? 아무리 내가 예뻐도 얼굴을 보지 말고 발을 봐. 발!”

이 정도면 좀 재수 없어야 하는데 예쁜 게 사실이니 그녀의 말을 깔 수가 없다.

“우리 령아는 두 번 보고 다 외웠어. 걔는 천재거든. 물론 너에게 그걸 바라진 않아. 하지만…… 그렇게 내 얼굴만 보지 말고 발을 보라고!”

“령아가 제자인가요?”

“응. 예쁜 제자 있어. 어? 관심 있어? 이건 좀 곤란한데?”

열심히 발을 놀리던 화존이 갑자기 멈추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주석하는 내심 실소를 머금었다. 너무 근엄한 스승도 부담스럽지만 이처럼 경박한 스승도 도무지 집중되지 않는다. 문제는 이 스승의 이런 행동이 귀엽고 우아해 보인다는 거다.

주석하는 아무래도 눈에 콩깍지가 씐 기분이라 열심히 눈을 비볐다.

“자, 봤지? 어휴. 내 몸매만 봤네, 봤어. 이제 연결 동작해볼게. 잘 봐.”

화존이 열심히 숫자를 세면서 암반 위에서 폴짝거렸다. 긴 장포가 나풀거리며 그녀의 발을 감췄다 드러내기를 반복했다.

멍하니 쳐다보고 있자니 화존이 허리에 손을 턱 걸고 명령했다.

“자, 이제 해봐.”

잘 될 턱이 없지만 주석하는 똑같이 위치를 밟아 움직이며 보법을 시전했다. 당연히 어설프고 투박했다. 화존이 뛰던 분위기와는 완전 딴판이다.

“그게 아니고…… 몸이 그렇게 뻣뻣하면 안 되거든. 나처럼 우아하게. 나비처럼 가볍게. 이건 원숭이처럼 뛰어야지 곰처럼 발을 구르면 안 되는 거야.”화존이 손수 그의 허리를 세우고 자세를 교정했다.

대체 보법을 배우는 것인지 춤을 배우는 것인지. 그래도 열심히 따라 했다. 이런 기연은 절대 흔하지 않으니까. 아무나 받을 수 없는 엄청난 수혜이니까.

“그래, 좀 낫네. 다시 해봐.”

발 위치를 신경 쓰니 자세가 불량이다. 열심히 반복하고 있자니 화존이 옆에 와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실 발 위치가 중요한 게 아니거든. 몸의 유연성이 문제지. 어떤 자세에서도 보법을 펼쳐 응용할 수 있는 깨달음이 중요하거든. 그래, 이렇게…….”주석하가 열심히 자세를 잡는 순간 화존이 그의 등을 쿡 밀었다.

“으악!”

주석하는 비명을 지르며 봉담소에 풍덩 빠졌다.

그는 허우적거리면서 깔깔대며 웃는 화존을 째려보았다.

“이게 대체 뭐예요?”

“흥! 나만 빠질 줄 알았어? 너도 빠져야지.”

흐아, 이건 완전히 뒤끝 작렬이었다. 비무 때의 일로 앙갚음하다니.

그때 모옥에서 호통이 들려왔다.

“화존! 장난치지 말라고 했지? 장포 걱정해라! 확 벗겨버린다!”

“치! 알았다고! 이참에 혼인해 버릴까?”

화들짝 놀란 화존이 장포를 여미며 얼른 물에서 나오라고 손짓했다.

***

어둠이 깃든 방안에서 주석하는 정좌를 하고 운기조식을 했다.

이틀째 잠을 자지 않아 무척 피로했기에 잠시라도 운기조식을 통해 심신을 갈무리해야 했다.

그는 악군의 맑은 기운을 운용하며 의도적으로 외부로 기를 뿜었다. 그가 뿜어낸 기운이 악군의 중독 해소에 도움 되기 때문이다.

진기를 몇 차례 대주천을 하고 나자 피곤이 풀리고 심신이 상쾌해졌다. 이틀 동안 악군과 화존의 진신절기를 배웠으니 쉬운 일이 아니다. 비록 그들의 무공 전부는 아니더라도 핵심 무공을 완벽하게 얻어냈다.

이곳에 올 때 계획했던 목표를 초과 달성한 셈이었다.

발이 쳐진 맞은편에는 여전히 악군이 꼿꼿하게 허리를 세운 채 운기에 몰두하고 있었다.

아직도 주석하는 악군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두 사람 사이에 쳐진 발은 그들 사이를 확실하게 물리적으로 차단하고 있었다. 다만 주석하는 그 거리보다 훨씬 가깝게 악군을 느끼고 있었다. 동일한 기운 때문이기도 하고 그녀가 보인 호의 때문이기도 했다.

어쨌든 구배지례를 올리진 않았으나 마음만으로는 그녀가 스승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물론 화존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운기를 마치고 눈을 떴다.

“몸은…… 괜찮습니까?”

“네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 열흘은 걸리리라 예상했는데 하루 정도 더 지나면 완치될 것 같아. 네 기운이 나를 편하게 해주는구나.”

악군이 거의 나았다는 사실이 주석하를 기쁘게 했다.

“저야말로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음공을 익혔고 보법마저 익힐 기회를 주셨으니까요.”

“그게 모두 자네의 복인 것을…….”

악군의 음성은 평온했으나 주석하는 그 속에 담긴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악군은 그에게 무공을 전수하여 무척 다행으로 여기는 듯했다.

“음, 제가 왜 같은 기운을 품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잠시 대화가 끊어졌다.

얻을 것을 얻었으니 주석하는 그녀에게 숨김없이 알려줄 용의가 있었다.

“아니, 처음에는 궁금했는데…… 듣지 않는 게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왠지…… 천리를 깨는 느낌이 들어서 말이야.”

예상과 달리 악군이 거절했다.

말해주고 싶은 마음을 주석하는 꾹 눌렀다.

대체 앞으로 오 년 동안, 아니 이제는 사 년 남짓 동안 흑도팔군에게 무슨 일이 발생했던 걸까. 왜 그들은 십만대산 절벽 아래에 감금되어 있었던 걸까. 이렇게 고고한 기품의 악군이 어떻게 그런 곳에서 살아갈 수 있지?

지금 발 뒤편에서 품위 있게 정좌한 모습과 꿈에서 얼핏 본 남루한 괴인들의 모습이 대비되면서 주석하는 울컥 슬픔을 삼켰다.

모르긴 해도 그 기간에 악군은 엄청난 시련을 겪었으리라. 아니 악군만이 아니라 흑도팔군 모두가.

처음 혼군과 만났을 때는 딱히 사제간이란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런 정도 없었다. 그런데 뇌군, 악군을 거치면서 주석하는 이들에게서 사제의 정을 느꼈다. 공식적으로는 스승이 아니더라도 마음으로는 이들을 스승으로 대하고 싶어졌다.

“자네가 익힌 천무태평악은 아직 미숙해. 완벽해지려면 시간이 다소 걸릴 거야. 만일 화존과 생사결을 겨루었다면 그대는 살아날 수 없었을 거야.”화존에게서 보법을 배우면서 주석하도 깨달았던 부분이었다. 만일 화존이 정말 작정했더라면 그는 절대로 이길 수 없었다. 괜히 정파십존에 속한 게 아니었다.

“앞으로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그래, 화판답공은 제대로 익혔어?”

“화판답공과 백변환영보 모두 기본을 터득했습니다. 이제 숙련시키는 과정이 남았습니다.”

“자질이 있구나. 난 못할 줄 알았는데.”

화존이 열과 성을 다해 그를 가르쳤다. 짧은 시간이었으나 그녀는 가르쳐야 할 핵심과 중요한 깨달음을 모두 전수했다. 그녀와 그가 아무런 접점이 없음을 고려하면 이는 실로 파격적이었다.

놀랍게도 주석하는 그녀와 반쯤은 장난치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무공을 얻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런 분위기를 화존이 의도적으로 연출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제자랑 비무해 달라고 했지?”

“그렇습니다.”

“인연이 닿을지 모르겠지만 기회가 되면 해주게.”

“네, 그러겠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인연이…….”

“후우, 이야기하자면 길지.”

악군과 화존 두 사람은 같은 시기에 강호를 누볐다. 그들은 정과 사로 나누어져 있었으나 같은 여인이란 점 때문에 서로 통하는 바가 많았다. 그들은 서로 대립과 화합을 반복하면서 성장했다.

각자 흑도팔군과 정파십존이라는 정점에 올라선 후에도 이런 관계는 계속됐다. 그 관계가 청산에 악군이 은거한 이후에도 이어졌다.

“우리는 해마다 만나서 무공을 겨뤘다. 승패는 비슷했어. 어떨 때는 이기고 어떨 때는 지고. 둘 다 이것을 재미있어했어. 그러다가 최근에 화존이 제자를 거뒀지. 화존은 제자를 무척 예뻐했고, 제자에게 자신의 무공뿐 아니라 내 음공도 물려주고 싶어 했어. 그래서 이런 비무 조건이 생긴 거야.”

“공평하려면 악군께서도 제자를 거두셔야 하지 않습니까?”

“난…… 제자를 두기 싫었네. 지금도 마찬가지이고. 아직 젊어서 그런지도 모르지.”

“그런 줄도 모르고 제가 무공을 가르쳐 달라고 해서…… 죄송합니다.”

“아니야. 난 자네에게 무공을 가르쳐주게 되어서 오히려 기뻤네. 화존의 콧대를 누른 것도 즐거웠고. 그것만으로 충분하네.”

악군의 감정을 정확히 이해하기 어려웠으나 주석하는 묻지 않기로 했다. 그에게 악군은 약간 다른 세상의 사람처럼 느껴졌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신선이라든가 그것도 아니면 도를 닦는 사람이라든가.

정말 도를 닦는 화산의 자하검존에게도 그런 기운을 느끼지 못했는데 악군에게 도가 풍기는 분위기는 정말 특별했다.

“이제 동이 트면 떠나게나.”

축객령이 떨어졌다. 아쉽지만 가야 한다는 것을 주석하도 안다.

“퉁소를 돌려드리겠습니다.”

주석하는 검은빛의 묵직한 퉁소를 손바닥에 올렸다. 화존을 상대하면서 짧은 기간 사용했지만 이 퉁소가 보통 물건이 아님을 그도 직감하고 있었다.

재질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단단하기로는 강철과 같고 소리는 일반 퉁소를 월등하게 능가했다. 이런 퉁소이기에 엄청난 내력이 집중되더라도 충분히 버티며 음공을 펼칠 수 있다.

이 퉁소는 악군의 앞에 놓인 거문고와 함께 악군의 가장 중요한 신물임이 확실했다.

“그것은 흑검소라네.”

“흑검소요?”

흑검소(黑劍簫). 이상하게도 퉁소 이름에 검이 붙어 있다니. 그것도 주석하의 흑검문과 같은 이름이었다.

주석하는 흑검소를 다시 관찰하면서 기묘한 인연을 느꼈다. 퉁소 이름에 검이 붙은 이유는, 하필이면 흑검인 이유는 짐작조차 되지 않았지만.

“흑검소는 내가 우연히 얻은 신물이네. 이제 나와는 인연을 다한 것 같으니…… 자네가 가져가게.”

“네? 이건 악군께서 사용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나는 이 거문고면 충분하네.”

가슴이 울컥했다. 주석하는 고맙다는 마음마저 드러낼 수 없었다. 이상하게도 입을 열면 훗날 그녀가 처한 상황이 그려져서 슬픔이 먼저 올라왔다.

“흑검소도 이곳 청산에 처박히기보다 강호를 누비고 싶을 거야.”

주석하는 몸이 굳은 듯 움직일 수 없었다. 손바닥에 놓인 흑검소의 차가운 기운만이 그에게 전달됐다.

주석하는 시선을 들어 발에 가려진 흐릿한 여인의 윤곽을 쳐다봤다.

“부탁이 있습니다.”

“뭔가?”

“어르신의 용안을 한 번 알현하게 해주십시오.”

지금까지 꼿꼿하게 세워졌던 악군의 상체가 일순간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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