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만리안석의 능력 (1)
“당신은 저에게 사부와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의 얼굴조차 모른다면 어찌 인간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훗날 강호에서 만나더라도 알아볼 수 있도록 얼굴을 보여주세요.”이곳에 온 후 주석하가 정말 원하던 일이었다. 그는 악군의 모습이 궁금했다. 이처럼 고고하고 맑은 기운을 풍기는 그녀가 누구인지 정말 보고 싶었다.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이윽고 가벼운 한숨과 함께 대답이 돌아왔다.
“불허한다.”
이유도 없었다. 실망한 주석하는 발 너머 보이는 여인의 윤곽을 뚫어지라 쳐다봤다. 하얀 옷을 입은 가녀린 여인이라는 것 외에 달리 특별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어째서입니까?”
“불허한다.”
주석하는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동이 트면 흑검소를 들고 떠나거라. 배웅은 하지 않겠다.”
한결 싸늘해진 악군의 음성이 들려왔다.
주석하는 악군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비록 발 너머를 뚜렷하게 볼 능력은 없었으나 조금은 더 뚜렷하게 악군의 형상을 머리에 남기고 싶었다. 그러지 않으면 악군은 오래지 않아 흐릿하게 지워진 존재가 되어버릴 테니까.
창으로 점차 뿌연 빛이 들어왔다. 떠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주석하는 흑검소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두 손으로 포권을 취하며 허리를 굽혔다.
“기체후 일향만강하시옵소서.”
주석하는 모옥을 나섰다. 뿌옇게 동이 트고 있었다.
뒤에서 악군이 연주하는 거문고 음률, 천무태평악이 그를 배웅했다.
- 오래도록 기다렸죠. 당신이 나를 바라볼 때까지.
- 단아한 기품, 숨길 수 없는 표정. 그리움만 쌓였죠.
- 이별은 피할 수 없고 사랑은 가슴을 가득 메워.
- 꽃비가 날리고 기다림이 길어져도 사랑은 돌아오지 않아요.
- 당신을 그린 하늘은 여전히 변함없네요. 마치 내 마음처럼.
- 미소짓던 당신을 기억하기에 당신의 눈빛에 묶여버렸죠.
- 눈을 감아도 떠오르는 그대의 고운 눈매는.
-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고 그리움만 쌓이네.
- 그리워하고 사랑하리니. 쏟아지는 눈물은 그치지 않고.
- 긴 세월 막을 수 없고 흘러가는 그대의 사랑 잡을 수 없네.
***
청산에서 만진장까지는 먼 거리가 아니어서 주석하는 여유가 있었다.
급할 일도 없었기에 쉬엄쉬엄 길을 가던 그는 저녁이 되자 적당한 객잔을 찾았다. 술 한잔이 그리웠으나 같이 마셔줄 사람이 없었다.
그는 만진장에 두고 온 동료를 떠올렸다.
“도수, 혈혼도객, 유연, 녹윤영…….”
그들은 서로 출신이 다르고 성격도 판이하지만 예상보다 잘 어울렸다. 특히 유비연과 녹윤영은 초반에 다툼이 있어 보이더니 지금은 꽤 사이가 좋아졌다. 신창패존의 습격 때 유비연이 녹윤영의 앞을 막아섰던 것을 보면 두 사람 사이에는 정과 사의 대립을 떠난 화합이 있는 듯했다.
“설마…… 유 형이 녹 소저를 좋아하나?”
여전히 유비연이 남장 여인임을 모르는 주석하는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를 남녀 간의 문제로 치부했다.
“클클, 어쨌든 좋은 일이지.”
주석하는 봄날처럼 화사한 감성을 만끽하면서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들이 부러웠다. 자신도 전생의 그 처절한 고생을 겪지 않았더라면 그런 이성 간의 감정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 고생 때문에, 그 죽음 때문에 그런 감정이 얼마나 사치이고 지금 당면한 일의 발목을 잡는지 안다.
그래서 그는 적어도 백화루주가 되는 목표를 이루기 전에는 혼인을 비롯하여 여인을 옆에 두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제 한 목숨 건사하기 힘든 강호에서 사랑하는 여인의 목숨까지 감당할 자신이 전혀 없었다.
“생각을 말자…….”
눈앞에 녹윤영과 남궁서란에 이어 우설금이 떠오르는 순간 주석하는 화들짝 놀라 재빨리 머릿속을 털어냈다.
갑자기 오싹한 한기가 느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를 떠올리면 정신 건강에 부담이 간다.
간신히 술 생각을 접고 끼니만 때운 주석하는 방으로 들어갔다. 오늘 밤은 편하게 잘 생각이다.
침상에 누우니 잠은커녕 머릿속이 오히려 맑아졌다. 이틀째 잠을 자지 않았는데 피로보다 그간의 일이 먼저 떠올랐다. 발 너머로 흐릿하게 비치던 고고한 악군의 윤곽, 열심히 보법을 밟으며 가르쳐주던 화존의 발랄한 모습. 거기에 화존이 나삼만 걸친 채 물에 빠져 그의 혼을 빼놓던…….
“허억!”
감히 불경한 생각을. 주석하는 상체를 벌떡 일으키고는 마음을 다스렸다. 아무래도 전생과 달리 먹고살 만하니 쓸데없는 생각이 머릿속을 메운다.
오지 않는 잠을 자느니 다른 일을 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한 주석하는 품을 뒤졌다. 그날 접전 끝에 빼앗았던 만리안석이 손에 잡혔다. 지금까지 홀로 편한 시간이 없었기에 그는 여태껏 만리안석을 제대로 관찰하지 못했었다.
주석하는 만리안석에 끼워져 있던 양피지를 다시 읽었다.
- 만리안석(萬里眼石)은 배교의 신물이다. 만 리 밖을 볼 수 있다.
“흐음, 만 리 밖을 본다고?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그는 종이를 풀어 만리안석을 꺼냈다. 큼지막한 원형 구슬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
주석하는 만리안석이 미묘하게 달라졌음을 눈치챘다. 전체적인 모습은 같았다. 다만 만리안석의 푸른빛이 조금 더 짙어진 기분이었다. 어둠 속에서 흐릿하게 빛나는 푸른빛은 실로 오묘했다. 그것만으로도 범상치 않은 보석이라고 확신할 정도였다.
물론 이 구슬이 단순한 보석이라면 패존이나 귀군이 무리해서 강탈하지 않았을 것이다. 뇌군이나 우설금이 노렸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만리안석은 특별한 물건이라 봐야 했다.
“배교라…….”
문득 무한회귀공도 배교의 신물이란 사실이 떠올랐다. 중원의 서쪽에 있다는 신비한 문파, 이상한 사술로 유명한 문파이니 만리안석도 분명히 평범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만 리 밖을 본다는 걸까?
주석하는 구슬을 들고 요리조리 살피며 눈에 대고 보거나 굴리거나 별짓을 다 했다. 당연히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지친 그는 만리안석이 단순한 보석이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모두 눈이 먼 거지.”
그는 뇌군을 비롯하여 우설금까지 깡그리 욕한 다음 만리안석을 침상 머리맡에 뒀다.
다시 자려고 누운 그는 문득 만리안석이라고 적힌 양피지를 떠올렸다. 사용법이 어렵다면 분명히 적어놓았으리란 점에 생각이 미쳤다.
그렇다면 의외로 사용법이 단순할지도 모른다. 만리안석은 평범한 사람들이 사용하는 보석이 아니라 무림 문파에서 나온 것이니……. 일반인과 무림인의 가장 큰 차이점은 뭘까.
번뜩 떠오른 생각에 주석하는 머리맡에 놓아둔 만리안석을 다시 손에 집었다.
만리안석의 신비로운 푸른빛이 눈을 자극했다.
“만 리 밖을 본다면 난 무엇이 보고 싶은 걸까?”
가장 먼저 아버지 주격과 누이동생 주소은이 지나갔다. 집을 떠난 지 한참 되었으니 보고 싶을 때도 됐다.
다른 사람이라면…… 또 우설금이 떠오른다.
“이건 마교가 두려워서라고.”
주석하는 새삼 변명하며 마지막 방법을 실행했다. 그는 악군의 맑은 내력을 조금 끌어올려 만리안석에 주입했다. 혼군과 악군의 내력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된 그에게 만리안석으로 내력을 전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의 내력이 천천히 만리안석으로 흘러 들어가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만리안석의 푸른빛이 강하게 주위로 폭사했다. 마치 찬란하게 빛나는 푸른 보석 같았다.
동시에 주석하는 우설금을 떠올렸다.
“헉!”
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만리안석의 내부가 하얗게 달아오르면서 뚜렷한 장면이 새겨졌다. 주석하는 구슬 속에 떠오른 장면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금방 알아챘다. 바로 우설금이었다.
우설금이? 대체 우설금이 왜 구슬에 나타나지? 그녀의 주변은 어두웠고 그녀는 어떤 민가에 잠입한 듯했다.
지금 주석하가 놀란 사실은 우설금의 행동이 아니었다. 만리안석의 신비한 능력 때문이었다. 만리안석에 보이는 장면은 바로 지금 이 시각의 우설금이었다. 지금 이 순간 우설금은 어떤 민가에 잠입해서 무엇인가를 하고 있었다.
그녀와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나 만리안석으로 목표한 상대를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는 신비가 그를 경악하게 했다. 과연 배교의 신물은…… 특별하고도 무서웠다.
무한회귀공과 만리안석 모두를 경험한 주석하는 배교의 신물에 혀를 내둘렀다. 이게 가능한 일이었다니!
그가 놀라는 사이 우설금이 경쾌하게 움직였다. 그는 우설금 옆에서 함께 행동하는 흑귀와 백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지?”
놀람이 가시자 이제는 우설금의 행동에 관심이 쏠렸다.
민가의 안방으로 뛰어 들어간 우설금은 곧바로 손을 저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하얀 강기가 일었고 그 강기는 마치 검강처럼 방 안에서 자는 사람의 목을 그었다. 일순간 무려 십여 명의 사람들이 영문도 모른 채 저승으로 떠났다.
주석하는 우설금의 잔인한 행동에 입을 쩍 벌렸다. 역시 마교는 어쩔 수 없는 건가.
이번에는 그녀 옆의 흑기와 백기가 검을 휘둘러 방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주석하는 그들이 대체 무슨 짓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임무를 끝낸 우설금이 동료와 함께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무엇을 하는지 잠시 그들은 집 앞에 서서 대기했다. 우설금의 시선이 먼 곳을 향했다.
잠시 후 소란이 일며 사람들이 몰려왔다.
우설금은 전혀 개의치 않고 동료와 함께 몸을 날렸다. 몰려든 사람들의 면면이 만리안석에 힐끗 지나갔다.
“헉!”
주석하가 놀라는 순간 만리안석의 빛이 사라졌다. 동시에 우설금의 모습도 지워졌다.
“어? 이런…….”
만리안석은 평범한 투명구슬처럼 변해 있었다. 지금까지 빛났던 푸른빛이 완전히 소멸한 모습이었다. 이제는 평범한 유리구슬과 마찬가지였다.
당황한 주석하는 만리안석에 다시 내력을 주입했다. 하지만 만리안석은 푸른빛이 돌아오지 않았고 구슬 내부에 어리던 장면도 나타나지 않았다.
방금 본 장면은 마치 꿈을 꾼 기분이었다. 한참 동안 주석하는 만리안석을 손에 들고 그 신비를 재현하려고 노력했다.
몇 번을 다시 진기를 주입해봐도 변화가 없자 주석하는 만리안석을 원래의 상자에 넣었다. 다시 사용할 수 있는지 오직 한 번만 쓸 수 있는지 나중에 확인해봐야 할 듯했다.
편하게 누워 방금 본 장면을 떠올렸다.
어떤 민가에 침입한 우설금이 살상을 자행하는 장면은 끔찍했다. 자느라 무방비인 사람의 목을 단칼에 벴다. 그녀의 출신이 마교이기에 짐작은 했으나 직접 눈앞에서 보니 그 잔인함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 있는 게 신기하네. 그런데 마지막 장면은…….”
정작 주석하를 놀라게 한 다른 장면도 있었다. 만리안석의 빛이 꺼지기 직전에 그는 안면이 있는 얼굴을 목격했다. 그 얼굴은 바로 남궁서란이었다. 비록 순식간에 스치듯 흘러갔지만 확실했다.
그렇다면 우설금이 습격한 곳이 남궁세가였을까?
주석하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전생과 비교하면 아직 마교가 준동하지 않을 시점이다. 이 시기는 마교가 아닌 정파와 사파가 서로 얽혀 정사대전으로 발전할 때였다.
뭔가 바뀐 걸까? 아니면 원래 이렇게 흘러갔는데 자신이 모르고 있었던 걸까.
만리안석이 정말 현재의 장면을 보여준 것인지 아니면 그를 미혹하여 보고자 하는 장면을 거짓으로 보여준 것인지 불명확하지 않은가.
시간이 흐르면 확실하게 드러날 일이었다.
주석하는 불편한 마음을 갈무리하고 눈을 감았다. 잠이 오지 않아 만리안석을 꺼냈다가 머릿속만 더 복잡해졌다. 이건 늑대를 피해 다른 길로 갔다가 호랑이를 만난 격이었다.
그날 밤 내내 주석하는 몸을 뒤척이며 제대로 잠들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