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만리안석의 능력 (2)
이틀 후 주석하는 만진장에 도착했다.
뇌군과 만난 후로 그는 만진장의 귀빈이 됐다. 그가 도착하자마자 연락을 받은 총관 방순이 버선발로 뛰어나왔다. 과거 문 앞에서 적대시하던 태도에 비하면 천지개벽이다.
“돌아오셨습니까?”
주석하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가신 일은 잘 되셨는지요?”
“그럭저럭.”
그가 굳이 방순에게 모든 일을 전달할 필요는 없다. 정보의 가치는 아는 자가 적을수록 올라가는 법이다. 악군과의 일은 오직 뇌군에게만 털어놓을 것이다. 물론 그것도 제한적으로만.
장원에 들어선 그가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방순이 긴장한 표정으로 넌지시 물었다.
“주군을 만나시겠습니까?”
“어디 계시지?”
“지금…… 회담 중이십니다.”
“누구랑?”
“뭐, 그때 그 제갈세가 가주와 말입니다.”
그 회담이 아직도 계속인 듯했다. 그만큼 서로 타협점을 찾기 쉽지 않다는 거겠지.
굳이 회담장에 가서 뇌군을 도울 생각은 없었다. 물론 도울 능력도 없다. 차라리 휴식을 취하는 게 낫다는 생각에 주석하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만나죠. 지금은 도착했다고만 전해주세요.”
주석하는 대충 일러놓고는 먼저 자신의 처소로 향했다. 도수를 비롯한 일행의 안위가 더 궁금했다.
처소 앞에 마치 햇볕을 쬐는 강아지처럼 모두 모여 있었다.
“무슨 일 있어?”
그들 앞에 나타나며 인사를 툭 던지는 순간 모두의 화난 시선이 집중됐다.
“어디 갔다 왔어요?”
가장 먼저 반응한 사람은 녹윤영이었다.
그녀의 도끼눈에 주석하는 영문을 몰라 하다가 슬금슬금 눈치를 봤다. 생각해 보니 이들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떠났었다.
물론 이유가 있긴 했다. 악군을 만나러 간다면 그 이유를 상세히 설명해야 하고 위험하다며 같이 가자고 고집할 인간들이었으니까. 그런 수고를 덜기 위해 통보하지 않고 그냥 내뺐던 건데…….
이럴 때는 뇌군 핑계를 대는 것이 최상이다. 설마 뇌군에게 물어보겠어?
“뇌군이 어디 좀 다녀오라고 하더라고. 하아! 이 나이에 심부름이라니.”
신세를 한탄하는 그의 태도에 생각 없는 도수는 바로 맞장구를 쳐주었으나 녹윤영과 유비연은 미심쩍은 표정을 거두지 않았다.
주석하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동안 별일 없었어?”
“많았죠. 뇌군과 만사지존의 회담이 위태위태해요.”
녹윤영이 그동안의 일을 열심히 설명했다. 물론 그녀도 회담의 주요 내용을 알지 못한다. 다만 소문과 분위기만 전할 뿐이다.
“게다가 암군이 등장했어요.”
암군(暗君)! 흑도팔군에 속하는 흑도 무림의 최강자다. 거대 사파 집단인 암흑단(暗黑團)을 이끄는 자다. 현 무림에서는 정파에 소림이 있다면 사파에는 암흑단이 있다고 할 정도로 그 규모가 크고 세력도 방대하다.
암군을 끌어들인 뇌군의 능력도 놀라웠지만 암군이 개입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회담 분위기가 뇌군의 열세임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애초에 정파 쪽에는 만사지존과 자하검존 두 사람이 참여했는데 사파 쪽에서는 뇌군 홀로였으니 원군이 필요했으리라.
아마 회담이 길어진 가장 큰 이유는 암군이 오기를 기다렸기 때문이겠지.
“멀리서 암군을 한 번 봤는데…… 정말 대단했어요.”
녹윤영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할아버지보다도 더?”
“에이, 그건 아니고요.”
하여튼 암군의 강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는 뜻이다.
이미 정파십존이나 흑도팔군을 여러 명 만난 주석하는 딱히 암군이 놀랍거나 기대되지 않았다.
“이제 둘둘이니 뇌군이 힘 좀 쓰겠네. 난 한숨 자고.”
주석하는 대수롭지 않게 소감을 말하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주석하가 사라지자 그들 또한 미간을 찌푸리며 뿔뿔이 흩어졌다.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며 주석하의 방을 유심히 살핀 사람은 유비연이었다. 그녀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민에 빠졌다.
“분명히 뇌군의 명으로 중요한 일을 수행한 것 같은데……. 그걸 어떻게 알아내지?”
유비연은 이곳에 있는 동안 사부인 자하검존을 만났었다. 사부에게 주석하를 제대로 감시하라는 언질을 받았던 터라 더 신경이 쓰였다.
그녀가 정파 사람임을 모두가 알기에 딱히 첩자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으나 그래도 친구를 배신하는 것 같아 찜찜했다. 하지만 이들보다는 사부가 더 중요하고, 애초에 그녀는 사파가 아닌 정파 사람이니 무림의 정의를 위한 일이라면 마다할 생각은 없었다.
***
연못가의 정자에서 네 사람이 치열한 눈치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 네 사람은 천하 무림인들이 경배하는 만사지존, 자하검존과 뇌군, 암군이었다.
암군은 비교적 젊은 불혹의 나이였고 강인한 몸을 자랑하여 누가 봐도 평범한 무림인이 아님을 직감케 했다. 특히 각이 진 사각 턱은 그의 강함을 암묵적으로 드러내어 타인을 압도했다.
은은히 주변을 찍어 누르는 기운이 가히 사파 최고 단체인 암흑단을 이끄는 수장다웠다.
이미 한차례 설전을 치른 듯 정자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고 상대를 노려보기만 했다.
그 침묵을 깬 사람은 만사지존 제갈휘였다.
“그렇다면…… 우리의 제안을 거절한다고 봐도 되겠소?”
“그건 아니오. 우리는 최대한 양보를 했소. 그런데도 핍박을 계속하니 우리도 선택의 여지가 없지 않겠소?”
뇌군의 대답에 자하검존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핍박은 무슨…….”
암군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전혀 대응하지 않았다. 그가 이곳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묵직한 중압감이 가해졌다.
제갈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뇌군을 질책했다.
“본인은 뇌군의 태도가 솔직히 당황스럽소. 처음에는 많은 양보를 비추다가 정작 지금은 칼같이 협상의 여지를 끊어버리니. 암군께서 오신 후부터 더욱 심해지셨소. 도대체…… 그 속내를 모르겠소.”
“그렇지 않소. 본인은 항상 같은 태도로 회담에 임했다오.”
뇌군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부인했다.
사실 회담은 제갈휘가 말한 것처럼 흘렀다. 뇌군은 처음에는 저자세였다가 지금은 대등하게 태도를 바꿨다. 남들이 보기에는 암군이 참석하면서 돌변한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주석하라는 패가 생겼으니 이제는 굳이 정파십존에게 끌려갈 이유가 없다…….’
뇌군이 보기에 주석하는 최소한 흑도팔군 일인의 역할을 감당할 패였다. 시간이 지나면 일인이 아니라 이인, 아니 삼인 이상의 역할을 할 것이다. 그 패는 지금까지 정파십존에게 기울어져 있던 세력 균형을 맞추어준다.
이제는…… 설사 정사대전이 일어나더라도 그냥 밀리지 않을 자신감이 생겼다. 다만 그 뒤를 노리고 있을 마교가 문제다.
이런 뇌군의 속셈을 알 길이 없는 제갈휘는 뇌군의 의도를 알아내고자 무던히 고민했다.
“끙!”
나지막하게 신음을 내뱉은 제갈휘가 휴정을 선언하려 할 때였다.
하얀 전서구 한 마리가 날아와 제갈휘의 어깨에 앉았다. 적지인 이곳까지 전서구가 날아오는 경우는 정말 드물었다. 달리 말하면 그만큼 급한 일이란 의미이기도 했다.
모두가 당황한 표정으로 시선을 모았고 제갈휘는 익숙한 동작으로 전서구에서 양피지 조각을 빼냈다.
양피지를 읽은 제갈휘의 안색이 확 변했다. 그는 삼매진화로 양피지를 곧바로 태웠다.
“무슨 일이오?”
자하검존의 질문에 제갈휘는 뇌군을 향해 흉흉한 적의를 드러냈다. 뇌군이 흠칫 놀라는 순간 제갈휘의 통보가 떨어졌다.
“지금 창궁무존께서 이곳으로 오고 있소. 회담을 그때 속개합시다.”
창궁무존(蒼穹武尊). 남궁세가의 가주이자 정파십존인 최강고수다. 사실상 남궁세가가 오대 세가의 수장이기에 그 영향력이 다른 십존을 능가했다. 그런 거물의 등장은 엄청난 파란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대체 무슨 일 때문이오?”
어쩔 수 없이 뇌군이 물었다. 내용을 알아야 대책을 세울 수 있다.
제갈휘의 싸늘한 시선이 암군을 향했다.
“며칠 전 남궁세가가 습격당했소. 남궁가주께선 그 범인으로 암흑단을 지목했소.”
화산파와 혼천교가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것처럼 남궁세가와 암흑단도 멀지 않다. 그렇다 보니 서로 대립이 심했다.
암군이 기분 나쁜 표정으로 묵직한 음성을 토해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어쨌든 남궁가주가 도착하기를 기다립시다.”
싸늘한 말을 남기고는 제갈휘가 일어섰다.
정사 회담은 점점 알 수 없는 수렁으로 빠지고 있었다.
***
목적을 완수한 주석하는 몸과 마음이 편했다.
뇌군의 도움으로 악군을 만나고 돌아왔으니 이곳에서 할 일이라면 뇌군에게 경과를 보고하면 끝이다. 다만 빨리 뇌군과 만나지 않는 이유는 뇌군이 바쁘기도 하고 회담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결과가 궁금해서였다.
사실 주석하도 이제는 그리 바쁘지 않다. 앞으로 만나야 할 흑도팔군이 셋이나 남았지만 이미 두 사람의 진기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게 된 마당에 급할 일이 아니었다. 남은 셋은 중원 전역에 흩어져 있어서 어차피 시간이 걸린다.
그런 이유로 주석하는 일행과 함께 인근 저잣거리를 배회했다.
덕양이 생각나서 절로 미소가 머금어졌다. 길거리의 노점상을 구경하면서 먹거리를 입에 물었다. 이렇게 놀면서 사는 재미가 훨씬 낫다.
“저것도 맛있어 보이지 않냐?”
절인 과일을 꼬치에 꿴 당과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주석하느 동료를 찾았다. 정작 일행은 그만큼 먹을 것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의 눈에 장신구 노점에서 목걸이와 귀걸이를 만지작거리는 녹윤영과 유비연이 들어왔다.
“어? 저것들이 언제 저리 친해졌지?”
항상 둘이서 툭탁거리더니 지금은 둘도 없는 다정한 연인처럼 보였다. 여자인 녹윤영이야 장신구에 관심을 둔다지만 유비연이 그 옆에서 맞장구를 칠 줄은 전혀 몰랐다.
‘남자인 유 형이 장신구에 관심이 있을 리 없고…….’
그렇다면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유비연이 녹윤영에게 장신구를 선물하려고? 유비연이 녹윤영에게 연정이 생겼나?
“크크, 역시 남녀 사이는 오리무중이야.”
동료들이 서로 반목하는 것보다 사이좋은 게 훨씬 낫다. 그러잖아도 유비연이 홀로 정파라 마음에 걸렸는데 사이좋은 둘을 보니 괜한 걱정이었다.
흐뭇한 표정으로 둘을 살피던 주석하는 다시 당과에 눈을 돌렸다.
“어?”
방금 있던 당과가 사라지고 없었다. 이런! 귀신이 곡할 일이!
“아저씨 여기 있던 거 어디 갔어요?”
당과 파는 노점상이 웃으며 그의 뒤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도수가 어느새 당과를 맛있게 먹고 있었다. 귀신같은 놈!
“으으.”
“일각만 기다리시죠. 다시 만들어 드리리다.”
젠장. 친구의 당과를 뺏어가는 천하에 의리 없는 놈! 다시는 저놈과 함께 마실 나오나 봐라. 저놈과 다니면 앞으로 성을 간다. 이건 좀 아닌가?
주석하는 내심 욕설을 퍼부으며 입맛을 다셨다.
무공이 강해도 당과를 만들 수는 없다. 기다리라니 어쩔 건가. 그는 노점상 앞에 쭈그리고 앉아 한숨을 토했다.
“도수! 이거 어때?”
녹윤영이 귀걸이를 걸어보며 의견을 구했다.
“음, 그거? 아깝네.”
당과에 눈이 팔린 도수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뭐가 아까운데?”
“귀걸이가. 그 낯짝에 귀걸이가 많이…… 으악!”
녹윤영이 주먹을 쥐고 도망치는 도수를 쫓아갔다.
그때 저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말 세 마리가 정신없이 질주하며 다가오다 도수를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이런 복잡한 동네에서 저렇게 미친 듯 말을 몰다니! 이것은 군자의 도리 문제이기 전에 안전의 문제가 아닌가.
“야! 미친 자식아!”
도수가 화가 나서 빽 소리를 질렀다.
말이 지나가면서 뿌연 먼지가 자욱했다.
좁은 길을 스쳐 지나가던 세 필의 말 가운데 한 필이 급하게 멈추더니 뒤로 돌아왔다.
주석하는 당과를 기다리느라 주저앉은 채 말에 탄 사람을 올려다봤다.
“헉!”
보고 싶지 않은 인물이 말에 타고 있었다.
주석하의 안색이 일그러지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젠장! 오지게 재수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