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86화 (86/273)

86화 창궁무존 (1)

주석하, 그가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은 딱 둘이다.

한 사람은 우설금. 그녀를 만나면 어째 으슬으슬 추워지는 게 절대 엮이고 싶지 않았다. 예상치 못하고 만리안석으로 우설금의 살인을 본 뒤로 그 증세가 더 심해졌다.

다른 한 사람은 덕양에서 악연을 키웠던 남궁서란. 이 여자는 무섭다기보다 짜증이 나는 부류다. 어쨌든 만나봐야 인생에서 도움 될 일이 없다.

그런데…….

지금 그의 눈앞에 쫙 빠진 백마를 타고 나타난 여자는 남궁서란이었다.

한 성깔 하는 그녀는 욕설을 듣고 무심코 되돌아왔다가 주석하를 발견했다. 당연히 그녀의 미간도 와장창 찌푸려졌다.

“당신은!”

주석하를 알아본 남궁서란도 뾰족하게 소리를 질렀다.

잠시 이리저리 눈을 돌리며 눈치 보던 남궁서란이 그를 노려보았다.

“나도 재수 없는 건 마찬가지거든요!”

덕양에서 만났을 때도 언성을 높였는데 이번에도 만나자마자 같은 결과가 나왔다.

그렇게 빨리 지나가면서 그 말은 또 어떻게 들었데? 주석하는 일어나기도 귀찮아 주저앉은 채 말 위의 그녀를 노려봤다. 오늘따라 산뜻한 노란색 경장을 입고 있어서 그녀의 미모가 한층 돋보였다. 역시 천상삼화라고 무심코 탄성을 발하려던 주석하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왜 예쁜 여자들은 하나같이 다 이 모양이냐.’

미모를 타고난 우설금이나 남궁서란을 보면 아무래도 예쁜 여자들은 정신 상태가 좀 이상한 듯했다.

“됐슈. 난 볼일 없으니 얼른 가쇼.”

주석하는 퉁명스럽게 대꾸하고는 노점상에게 시선을 돌렸다.

당연히 무시당하고 고분고분히 넘어갈 남궁서란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급해 죽겠는데 먼저 시비 건 사람이 누군데!”

빽 소리를 지르던 남궁서란은 주석하가 상대해주지 않자 머쓱해졌다. 저잣거리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그러잖아도 아름다운 미모가 관심을 끄는 데다 하필이면 이 복잡한 거리에서 하얀 말을 타고 있으니 관심이 집중됐다.

살짝 쪽팔림을 느낀 남궁서란이 말고삐를 잡아채려 할 때였다.

“어? 흑접?”

게다가 흑접 옆의 남자는 어딘지 모르게 그녀의 눈에 익숙했다.

“아! 검봉이네. 오랜만이야.”

녹윤영이 웃으며 아는 척했다. 비록 정사로 다르지만 두 사람은 가끔 만난 적이 있기에 친분이 있었다. 그 옆에서 유비연이 열심히 눈을 찡긋거리며 인사했다.

“남궁 소저! 여기서 뵙네요.”

그때야 남궁서란은 이 서생이 누구인지 눈치챘다. 천상삼화의 일인인 설매검화 유비연이었다.

유비연이 남장을 한 것도 이상했고 흑도인 흑접과 어울리는 것도 수상쩍었다. 더구나 이 자리에 저 밉상인 주석하가 있다는 것은……. 덕양과 이곳은 엄청나게 먼 거리니 절대 우연히 만났을 리가 없었다.

호기심이 동한 남궁서란은 유비연의 연극을 맞춰 주기로 했다.

“유…… 유 소협도 오랜만입니다.”

어쨌든 그녀가 아는 척하니 유비연의 질문이 쏟아졌다.

“무슨 일로 그리 급하게 가나요? 혹시…… 만진장으로?”

“네, 만진장요. 설마? 그대들도 만진장에 머물고 있어요?”

남궁서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흰 머문 지 며칠 됐습니다.”

유비연의 대답에 남궁서란은 다시 일행을 쭉 살폈다. 아무리 봐도 뭔가 이상한 조합이다. 주석하 옆의 녀석은 덕양에서 보았던 것 같기도 한데…….

“그런데 무슨 일입니까?”

유비연의 차분한 질문에 남궁서란은 몇 차례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본가가 공격을 받았어요. 꽤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우리는 암흑단의 소행으로 추정하고 있어요. 마침 암군이 이곳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대충 대답한 남궁서란이 유비연에게 인사하고는 급히 말을 몰았다.

주석하는 주저앉은 채 남궁서란이 남긴 대답을 곰곰이 씹었다.

‘우설금이 저지른 사건을 암군이 덮어썼구나.’

이곳에서 유일하게 상황을 제대로 파악한 사람은 주석하뿐이었다. 당연히 만리안석 덕분에 알게 된 진실이었다.

주석하는 마교의 교활함에 섬뜩해졌다. 화산파에서 가적성을 죽이고 혼천교에 덮어씌운 것도 마교였다. 그나마 그때는 가적성이 마교의 비밀을 쥐고 있었기에 마교도 충분히 명분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다. 마교는 암흑단과 남궁세가의 반목을 끌어내려고 의도적으로 남궁세가를 습격했다. 만리안석이 아니었다면 주석하도 진실을 몰랐을 것이다.

물론 우설금이야 본인의 뜻이라기보다 마교 상부에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겠지만……. 아닌가? 마교에서 우설금의 지위가…… 최상위인 마교수호사령이라 했던가.

주석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마교가 정파와 사파의 대립을 부추기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지금 만사지존과 뇌군은 마교의 간계에 놀아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전생에서 마교 때문에 죽었기 때문일까. 마교가 무림을 어지럽히는 것이 신경 쓰였다. 백화루주가 되더라도 마교 천하 아래서는 행복이 없다는 단순한 논리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는 마교의 침공만은 피하고 싶었다.

“얼른 가봐요.”

녹윤영이 여전히 주저앉은 주석하를 채근했다.

빨리 가면 그 남궁서란과 또 얼굴을 봐야 하는 건가? 방금 남궁서란을 다시 보는 순간 주석하는 확실하게 깨달았다.

남궁서란은 그에게 우설금과 비교할 수 없는 밉상이었다. 남들은 두 여자가 모두 아름답다고 할지 모르지만 두려움을 제외하면 우설금은 시원스러우면서도 가슴을 뛰게 하는 얼굴인 반면 남궁서란은 짜증을 부르는 얼굴이었다.

“난 천천히 갈 거니까 먼저 가세요.”

퉁명스럽게 대꾸한 주석하는 노점상 주인이 당과를 주기만을 기다렸다.

***

주석하는 다음 날이 되어서야 주섬주섬 정자로 구경 갔다.

물론 정사 회담이 열리는 정자 부근은 다른 사람의 접근이 허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주석하는 예외다. 뇌군과 주석하의 특별한 관계를 아는 방순 총관은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연못의 경관은 예전처럼 아름다웠으나 청산에서 자연 그대로의 봉담소를 접했던 주석하에게 이곳은 전혀 눈길을 끌지 못했다. 그날 주석하가 진식을 깨트리면서 엉망으로 만들었던 화원은 이미 복구되어 있었다.

정자에는 다섯 사람이 양 진영으로 나뉘어 무거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모두 강호에서 혁혁한 명성을 날리는 인물로 정파십존의 만박지존, 자하검존, 창궁무존에 흑도팔군인 뇌군과 암군이었다. 그 면면에 오금을 펴기 힘든 분위기이건만 주석하는 개의치 않고 다가갔다.

그를 발견한 뇌군이 손짓했다.

“주 공자도 앉게.”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복잡했다. 감히 흑도팔군, 정파십존과 나란히 앉으라니 이 청년이 누군지 궁금할 수밖에. 젊은 사람이 이 자리에 앉는다는 사실에 경악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쾌하게 여겼다. 급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다만 그를 아는 자하검존은 굳은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일전에 진식을 깨트리던 날 한차례 얼굴을 보았던 만사지존도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를 관찰했다.

주석하는 자리에 앉으며 가져온 흑검소를 옆에 두었다.

흑검소는 겉으로 보기에 거무칙칙하고 볼품없는 대나무 퉁소처럼 생겨 남들의 이목을 끌기 어렵다. 다만 이곳에서는 달랐다.

뇌군은 흑검소를 보는 순간 그가 악군의 무공을 이었다고 확신했다. 한편 다른 사람들도 흑검소를 놓치지 않았다.

“흐음, 주 공자? 그 퉁소는…….”

“이것 말입니까?”

주석하는 자랑하듯 흑검소를 쓱 들어 보였다.

흑검소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제갈휘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건…… 악군의 신물 아니오?”

“그렇습니다만.”

주석하가 긍정하자 놀라움과 호기심이 증폭됐다. 지금까지 공식적으로 악군의 진전을 이었던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악군의 제자요?”

창궁무존 남궁후가 물었다.

주석하는 남궁가주인 남궁후를 처음 만났다. 그의 얼굴은 남궁천과 상당히 닮았고 훤칠했다. 부자지간이니 너무 당연한가. 차이점이라면 남궁천이 부드러운 인상임에 반해 남궁후는 더 남자답고 과묵한 인상이었다.

둘 다 미남자이자 영웅의 면모를 풍겼다.

“제자는 아닙니다.”

그에게 도움을 준 남궁천의 아버지이기에 주석하는 예의를 갖췄다.

“그런데 어떻게 흑검소를……?”

주석하는 별일 아니라는 듯 미소를 머금었다.

“악군께서 저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악군이 선물로 주었다는 것은 악군의 진전을 일부라도 이었음을 뜻했다. 놀란 자하검존이 급히 되물었다.

“자네는 혼군의 진전을 이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습니다만.”

제갈휘는 신음을 삼켰고 남궁후는 예상치 못한 놀라운 젊은이의 등장에 호기심을 드러냈다.

그렇게 첫 대면이 흘러간 후 뇌군이 본격적으로 주석하를 회담에 끌어들였다.

“주 공자를 부른 이유는 주 공자가 최근 벌어진 두 사건의 목격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화산파와 혼천교의 다툼 때도 있었고, 신창패존과 귀군의 싸움도 목격했습니다. 누구보다도 이 사건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뇌군의 시선이 자하검존을 향했다.

이 회담에는 혼군이 없기에 그날의 다툼은 자하검존의 일방적인 주장이 먹혀들었다. 뇌군은 이를 뒤집을 패로 주석하를 부른 것이다.

“끙!”

자하검존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 기침했다. 물론 자하검존은 지금까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혼천교의 잘못을 부풀리고 화산파의 잘못을 최대한 감췄다.

뇌군이 차분하게 주석하의 답변을 유도했고, 주석하는 아는 한도에서 성실하게 대답했다. 사람들은 주석하가 자하검존과 혼군의 결전에 개입하여 내력으로 싸움을 중지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이번에는 신창패존과 귀군이 엮인 사건의 질문이 쏟아졌다.

주석하는 이 사건도 성실하게 대답했다. 다만 뇌군의 눈치를 보니 만리안석을 언급하기 원치 않은 것 같아 그도 그 부분을 뺐다. 또 우설금의 정체도 모른다고 둘러댔다. 우설금을 제대로 언급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이 사건에서 우설금은 정체 모를 여인으로 둔갑했다.

회담에 참여한 사람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주석하가 신창패존이나 귀군과 겨뤄 전혀 다치지 않았다는 사실과 정체 모를 여인의 등장은 놀라웠다.

회담을 장악한 뇌군은 대만족이었다.

“그래서 주 공자의 객관적인 증언을 보면 화산파가 증거도 없으면서 먼저 싸움을 걸었고 신창패존이 막무가내로 표국의 물건을 뺐으려고 했다는 결론이 납니다. 즉 두 사건 모두 정파의 무리한 압박에서 비롯된 일이니 무림맹에서 정파십존을 단속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자하검존께서 거짓말했다는 거요?”

“아, 그 말이 아닙니다. 우리 흑도의 잘못이 아니란 거지요.”

제갈휘와 자하검존은 의도한 전략이 먹히지 않자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때 남궁후가 화제를 전환했다.

“그럼 우리 남궁세가를 침범한 범인도 암흑단이 아니란 거요?”

기습을 항의하러 왔던 차라 남궁후의 목소리는 분노로 차 있었다.

“그 부분도 증거가 없으니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차분한 뇌군의 지적에 정파인들이 모두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남궁후의 분노는 더욱 활활 타올랐다.

“현재 안휘 주변에는 감히 남궁세가에 시비를 걸 문파가 암흑단 외에는 없소. 그날 기습한 수법도 매우 유사하오. 무슨 증거가 더 필요하다는 거요?”

“나는 치사하게 그런 짓을 하지 않소.”

처음으로 암군이 강하게 맞받아쳤다.

“평소 암흑단의 행동을 생각해보시오.”

창궁무존과 암군 사이에 일촉즉발의 분위기가 감돌았다.

사건의 원흉을 아는 주석하는 한숨이 나왔다. 과연 마교의 농간은 무서웠다.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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