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87화 (87/273)

87화 창궁무존 (2)

주석하의 추측에 따르면 가적성의 죽음과 남궁세가 습격 사건의 배후에는 우설금이 있었고, 그녀는 마교 사람이었다.

정파에서는 그 두 사건을 모두 흑도의 책임으로 덮어씌웠다.

그는 제갈휘를 곁눈질했다. 과연 정파의 군사인 제갈휘가 그 사실을 모를까. 적어도 진실은 모를지언정 사파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이 억지란 사실쯤은 깨닫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주장을 고수하는 이유는 정사대전에서 승리할 자신이 있기 때문일 테고. 정파와 사파의 대립은 마교의 계략에 빠지는 결과였다.

“흐흐, 무존! 잘 생각해라. 나를 비난하는 것은 개의치 않으나 암흑단을 비난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암군의 으스스한 경고가 튀어나왔다.

“암군! 아니란 증거를 보여라!”

남궁후가 벌떡 일어서면서 분노를 폭발시켰다. 암군을 두려워할 남궁후가 아니었다.

옆에 있던 자하검존 또한 슬그머니 일어나서 창궁무존을 응원했다.

제갈휘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지금 이곳에는 만사지존인 자신과 뇌군을 제외하면 정파는 둘이고 사파는 암군 혼자다. 당연히 격한 싸움이 벌어지면 정파의 압승이다. 단지 이곳이 뇌군의 본거지란 점이 문제라지만 기관진식은 자신이 해결하면 된다.

어쨌든 손해 볼 상황이 아니었다. 제갈휘는 뇌군을 살피며 비웃음을 지었다. 손해를 차단하려면 뇌군이 적당히 물러선 타협점을 제시할 시점인데…….

이상하게도 뇌군은 말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 밑바탕엔 알 수 없는 자신감이 깔려있었다.

제갈휘는 심기가 불편해졌다. 무슨 수를 숨겨놓은 건가. 정파십존 두 사람을 감당할 수가 있나…….

무심코 주위를 휙 둘러보던 제갈휘의 눈에 주석하가 잡혔다.

분위기는 점점 악화했다.

암군도 남궁후의 기세를 그대로 치받았다. 자존심 싸움으로 넘어가면서 두 사람이 요란한 설전을 벌이더니 전장을 정자 아래 화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암군을 두고 남궁후와 자하검존이 연합하여 대치한 국면이 됐다.

“오늘 네놈의 피로 죽어간 가문의 원혼을 달래겠다.”

“자신 있으면 덤벼보던가.”

“이 쓰레기 같은 놈이!”

“검존이 없으면 찌그러졌을 놈이!”

정파십존과 흑도팔군이라는 지고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말다툼이 하류 잡배와 다른 바 없었다.

주석하는 내심 실소를 머금었다. 이 싸움을 말려야 하는지 그대로 두어야 하는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암군의 손에 검이 잡혔다. 암군은 검을 주무기로 사용한다.

남궁후의 손에도 어느새 검이 들렸다. 남궁세가 또한 검법으로 유명하다. 양쪽 모두 검을 사용하기에 두 사람은 평소에도 상대를 강하게 의식했다.

본가를 습격한 원흉이 암흑단이라고 간주한 남궁후와 남궁세가의 위세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암군 사이에 화해는 불가능했다.

챙!

두 사람의 검이 부딪치며 금속성이 일었고 그 여파가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좋다! 오늘 생사결을 펼쳐보자!”

남궁후가 내력을 끌어올리며 검에 진기를 주입했다.

우우웅-

시퍼런 검강이 한자나 뻗었다.

당연히 그 위세에 눌릴 암군이 아니었다. 암군의 검에서도 검강이 발현했다.

“와라!”

남궁세가의 검법은 웅장하고 힘이 넘쳤다. 무림인들이 감탄하는 제왕의 검이다.

반면 암군은 극쾌를 추구한다. 암흑단이 살수를 기반으로 세력이 커졌기에 그의 검은 빠름과 효율을 추구했다.

빛의 속도로 암군의 검이 남궁후를 찔러 갔고 남궁후의 검강이 자연스럽게 방어막을 형성했다.

콰앙-

과연 정파십존과 흑도팔군이었다. 기세가 부딪치자 거대한 충격파가 터지며 주위로 폭풍이 몰아쳤다.

순간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주석하는 강자들의 싸움을 구경하느라 넋이 나갔다. 고수의 싸움은 보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된다. 특히 주석하처럼 이제 고수로 막 발돋움한 경우는 더욱 그렇다.

제갈휘는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두 사람의 접전을 관찰하며 자하검존에게 눈빛을 보냈다. 만일 남궁후가 위험하면 개입하라는 무언의 암시였다.

자하검존은 제갈휘와 계획을 공유했다. 당연히 그는 검병에 손을 얹고 상황을 지켜봤다. 여차하면 전장에 뛰어들 태세였다.

뇌군은 급작스럽게 전투가 전개되자 장원을 보호하기 바빴다. 그의 손에서 돌조각이 사방으로 뿌려졌다. 전투 중에 퍼지는 강기의 파편이 주변을 파손하지 않도록 차단하는 진법을 펼쳤다.

쿠쿵-

두 거인의 기세는 막상막하였다. 어느 한쪽이 죽을 때까지 결판을 내자는 듯 격렬하게 부딪쳤다.

멀리까지 퍼져나간 소음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장원을 지키는 무사들과 지금 이곳에 와있는 손님들이 북적였다. 그 속에는 도수를 비롯한 주석하 일행과 남궁천과 남궁서란 남매도 있었다.

남궁천과 남궁서란은 부친의 싸움을 말리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

비록 충동적으로 시작한 전투였으나 싸움을 시작한 이상 반드시 이겨야 한다. 남궁후도 암군도 이 사실을 인식했다. 그들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한 명예가 있으니까. 작게는 본인의 명예이고 크게는 정파와 사파의 명예였다.

덕분에 싸움은 점점 치열해졌다. 이제는 함부로 말리기조차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암군의 검초는 빛보다 빨랐고 남궁후의 검은 태산처럼 장엄했다. 그들은 각자의 장점을 최대로 발휘하여 상대를 압박했고 상대의 공격에 반응했다.

챙- 채챙-

검이 허공을 가르고 공간을 장악했다. 두 사람은 상대방의 허점을 찌르며 다음 초식을 고민했다. 이대로 흐르면 자칫 양패구상으로 빠질 위험이 있었다.

이를 두고 볼 자하검존이 아니었다.

이 싸움은 창궁무존과 암군의 자존심 대결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 이면에는 정파십존과 흑도팔군의 치열한 경쟁이 숨어 있다.

역사는 승자만 기억한다. 이 싸움에 검존이 개입하여 둘의 합공으로 암군을 죽였다 해도 비난할 사람은 없다. 흑도팔군 가운데 한 사람을 이곳에서 처리하면 정파는 확실한 우세를 거머쥘 수 있다.

암군의 검이 번개처럼 남궁후의 가슴을 찔러 갔다.

남궁후의 검이 중후한 곡선을 그리며 찔러오는 검을 차단했다. 강한 충격과 함께 암군의 신형이 휘청거렸다. 힘을 실은 남궁세가 검법의 장점이 여지없이 드러난 초식 교환이었다.

자하검존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검법에서 이미 극강의 경지에 이른 그다. 뜻이 세워지는 순간 바로 검이 흐른다. 그는 암군의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번쩍!

자하검존의 검이 빛살처럼 암군에게 뻗었다. 일순간 균형이 흐트러진 데다 남궁후의 검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던 암군은 전혀 대응할 수 없었다.

자하검존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비난은 나중 문제다. 지금은 일단 암군을 처리하고 봐야 한다. 이 일 초는 훗날 정파의 승리를 다진 초석으로 인정받을 것이다.

쾅!

달콤한 상상에 잡혔던 자하검존은 검에 전해지는 충격에 눈을 부릅떴다.

회심의 일격이 막혔다! 있을 수 없는 현상에 자하검존은 재빨리 암군의 동향을 살폈다. 정작 암군은 그를 보지 않고 있었다. 암군의 시선은 자신의 머리 위를 향해 있었다.

암군을 공격하던 남궁후도 마찬가지였다. 암군의 자세가 흐트러진 이상 승리를 잡을 기회였다. 그런데 남궁후 또한 미간을 찌푸리며 허공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자하검존의 눈길이 천천히 허공을 향했다. 그의 일검이 막힌 공간이었다.

아! 허공에 한 사람이 떠 있었다. 한 손에 검은 퉁소를 잡고 세 사람을 내려다보며 오만하게 버티고 있었다. 자하검존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 순간 제갈휘의 탄성이 새어 나왔다.

“흑검소!”

흑검소의 특이한 변신은 과거에 들은 바가 있었다. 평소 악기인 퉁소 역할을 하는 흑검소는 공력이 주입되면 검처럼 날카로운 기운을 뿜어낸다. 악군은 흑검소를 대체로 퉁소로 사용했지만 때로는 검처럼 활용하기도 했었다.

그렇기에 흑검소에 다섯 치가량의 하얀 기운이 뻗은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자하검존의 검이 암군을 공격하는 순간 흑검소에 어린 검강이 검존의 공세를 막고 흘렸음이 분명했다.

그 흑검소를 잡은 자는 의심할 여지없이 주석하였다.

주석하를 목격한 사람들의 표정이 경악으로 바뀌었다. 흑검소에 검강이 어린 사실은 놀랍지만 이해할 수 있다. 주석하는 흑도팔군인 혼군의 진전을 이었지만, 흑검소를 들었으니 악군의 진전도 이었을 테니까. 그 무공의 강함은 짐작하고 있었다.

검존에 비견하긴 어려울지라도 한 번쯤 공세를 차단할 능력은 충분할 터였다.

그런데 지금 흑검소를 들고 허공에 떠 있는 건 어떤가.

“화판답공!”

뇌군마저 신음을 토해냈다.

화존의 초절정 보법인 화판답공을 주석하가 시전한 것이다. 화존은 주석하와 인연이 있는 흑도팔군이 아니다. 그녀는 정파십존이다. 어떻게 화존의 무공이 주석하에게서 튀어나올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이 놀라는 사이 주석하는 마치 허공을 걷듯이, 꽃잎이 허공을 날 듯 사뿐사뿐 움직이며 세 사람의 머리를 넘어 부근에 내려섰다.

“그만하시죠.”

주석하가 흑검소를 거두며 빙그레 웃었다.

암군을 습격했던 자하검존은 머쓱해졌고 다른 사람들은 넋이 빠져 있었다.

신음을 삼키면서 제갈휘가 다급하게 물었다.

“자네 화존의 제자인가?”

“전 누구의 제자도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화존의 무공을…….”

주석하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굳이 그가 세세하게 답변해줘야 할 이유는 없다.

자하검존과 주석하의 개입으로 남궁후와 암군의 대결은 흐지부지됐다. 두 사람은 이제 충동적인 행동에서 벗어나 신중하게 유불리를 쟀다. 당연히 자신도 위험할 수 있는 싸움을 계속할 용의는 없었다.

하지만 새카만 무림 후배인 주석하의 말을 들을 사람 또한 없었다.

“암군이 본가를 침범했다.”

“시비를 건 사람은 창궁무존이다.”

남궁후와 암군이 여전히 팽팽한 설전을 벌였고 자하검존 역시 살기를 거두지 않았다.

주석하는 한숨을 내쉬며 두 사람을 말렸다.

“확실한 증거 없이 상대를 비방하지 마시죠.”

“증거를 남길 사람이 아니지 않으냐?”

“가적성의 죽음과 혼천교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남궁세가 침입 사건도 암흑단이 아닙니다. 그 모두는 다른 사람이 벌인 일입니다.”

주석하의 열변에 사람들이 고개를 저었다.

“네가 어찌 아느냐?”

“범인이 이런 분란을 목표로 했다고 생각지는 않으십니까?”

주석하가 떨어트린 새로운 시각은 큰 파문을 일으켰다. 지금까지 아무도 그런 방향에서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정과 사의 테두리에서 어떻게 하면 상대를 제압할 수 있을지만 고민했었으니까.

이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보다 이 사건을 그들의 입맛에 맞게 재단하려 했다.

처음으로 남궁후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의견을 받아들였다.

“주 공자, 당신은…… 범인이 누군지 알고 있나?”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주석하는 흑검소를 어루만지며 당당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비록 자네는 당사자가 아니어서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겠지만 나는 가주로서 반드시 파헤쳐야 하네.”

“압니다. 그럼 생각해보시지요. 그날 가문 사람들이 어떻게 죽어 있었는지.”

남궁후는 습격당한 숙소를 떠올렸다. 거의 스물에 가까운 사람들이 잠을 자다가 봉변을 당했다. 그들은 조금도 반항한 흔적이 없이 목이 잘렸다. 실로 끔찍한 참상이었다.

그는 범인이 뛰어난 자객이었고, 이런 자객을 양성할 수 있는 곳이 암흑단뿐임을 이 자상이 증명한다고 생각했다.

“그 참상을 일개 자객이 저지를 수 있을까요? 그 많은 사람을 소리도 없이 한 방에 처리하려면 상대는 얼마나 강해야 할까요?”

“설마…… 암군이 직접?”

남궁후의 분노한 시선이 다시 암군을 향했다.

주석하는 담담한 목소리로 지적했다.

“그게 아니라 그런 강자라면 왜 숙소 하나만 처리하고 사라졌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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