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창궁무존 (3)
남궁후의 머리를 벼락처럼 치는 의문이 있었다.
그날 숙소에서 참변을 당한 남궁세가의 무인들은 결코 하수가 아니었다. 자객 숫자가 많다고 해서 가능한 문제가 아니다.
만일 자객 숫자가 많았다면 그들은 한 숙소가 아닌 여러 숙소에서 사건을 저질렀을 것이다. 마치 경고하듯 오직 한 숙소에서만 만행을 자행했다.
주석하의 지적이 이어졌다.
“그날 그 사건을 누가 가장 먼저 발견했습니까?”
남궁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한쪽에서 상황을 지켜보는 딸 남궁서란을 향했다.
“그때 목격한 범인이 몇 명이었는지 물어보시죠.”
주석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궁서란이 버럭 소리쳤다.
“주 공자, 말재간으로 암흑단이 빠져나갈 길을 열어줄 속셈인가 보죠?”
주석하는 남궁서란과 사이가 좋지 않았기에 그녀의 말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무시하고 계속해서 남궁후와 대화를 나눴다.
“그래서 몇 명의 적을 봤습니까?”
남궁후는 그날 남궁서란의 보고를 떠올렸다.
“한둘 정도였소.”
“목에 그어진 상처는 어떠했습니까?”
“예리한…… 검보다 날카로운…….”
“그렇다면 범인이 얼마나 고수였는지 감이 잡히시겠죠.”
남궁후는 주석하가 지적한 핵심을 깨달았다. 그런 능력자는 암흑단에서도 암군 정도밖에 없다. 사용 무기도 예리함으로 따지면 검이 아닌 검기나 검강 수준이다.
암군이 야밤에 그런 무리수를 둘 리가 없다. 게다가 그날 기습했던 적은 남궁서란을 보자마자 달아났다. 그런 강자가 남궁서란을 두려워할 일이 없지 않은가.
남궁후는 신음을 내뱉으며 물었다.
“음, 그 고수가 과연 누구라 생각하오?”
정파십존이나 흑도팔군 수준의 고수여야 한다. 하지만 어폐가 있다. 그들이 가진 명예에 비하면 이번 사건은 절대 이롭지 않다. 그렇기에 이 사건을 벌일 적합한 인물을 찾아내기 어려웠다.
“저도 모릅니다. 어쩌면 정파와 사파가 서로 반목하면 이익을 보는 집단일지도 모르죠.”
주석하는 완곡하게나마 마교를 지칭했다. 이것으로 그가 할 일은 끝났다. 남은 일은 제갈휘와 뇌군이 결정해야 한다. 그래도 서로 싸우겠다면 어쩔 수 없고.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뇌군이 적극적으로 동의했다.
주석하는 주변 사람들을 향해 씨익 미소를 짓고는 정자를 떠났다. 그의 뒤를 도수를 비롯하여 녹윤영 등이 줄줄이 따라갔다.
남궁서란은 멀어지는 주석하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왠지 주석하가 세인들의 주목을 받는 자체가 싫었다. 그는 덕양이라는 시골에서 별 볼 일 없던 한량이 아니었던가.
그때와 오늘 보여준 무공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단지 오늘 주석하가 그녀의 말을 무시했다는 사실만 뚜렷하게 머리에 박혔다.
***
숙소로 돌아오는 동안 녹윤영이 옆에 붙어 흥분한 목소리로 재잘댔다.
“오늘 펼친 무공은 뭐예요? 그…… 시커먼 퉁소로 검존의 검강을 막았잖아요? 그것도 검강이에요?”
녹윤영은 주석하가 혼군의 무공만 익혔다고 생각했었다. 혼군의 무공 외에는 흑검문이라는 소문파의 무공뿐이니 고려 대상이 아니다. 그런데 오늘 그가 보여준 무공은 혼군의 무공과 결이 달랐다.
“흑검육식이었어요.”
“흑검육식요?”
“흑검문의 비전절기죠.”
“아하!”
녹윤영도 금방 이해했다. 별 볼 일 없는 문파인 줄 알았는데 그래도 뼈대가 있었나 보다.
실제로 주석하는 화존의 화판답공을 이용해서 허공을 밟으면서 흑검소에 진기를 주입하여 검강을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검존의 공격을 막은 초식은 기초적인 흑검육식이었다.
단 일 초일 뿐이었으니 흑검육식으로도 충분했다. 만일 추가 초식이 필요했다면 선택은 또 달랐을 것이다.
“그…… 오늘 보여준 놀라운 보법요.”
“네? 아! 그거요?”
“그거 나도 가르쳐줄 수 있어요?”
주석하는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녹윤영은 그 보법이 무척 탐이 났나 보다.
“그거 놀랍기도 하지만 허공에서 엄청 우아했는데…….”
정작 주석하는 자신이 펼치는 장면을 직접 볼 수 없어 그녀의 묘사가 이해되지 않았다. 다만 그에게 가르쳐주던 화존의 모습을 떠올리니…… 역시 우아한 게 맞았다.
“그건 조금 힘들어요. 내게 가르쳐 준 분께서 타인에게 전수하면 안 된다고 했거든요.”
무공 전수에서는 흔한 일이다.
녹윤영은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어쩔 수 없이 수긍했다.
두 사람의 뒤를 유비연이 조용히 따라가며 주석하를 주시했다. 오늘 주석하의 행동은 그녀에게도 충격이었다.
과거에 혼군과 검존의 다툼을 막는 장면을 보았기에 주석하의 무공을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그가 보인 신기는 혼군의 것이 아니었다. 대체 언제 그가 그렇게 성장했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옆에서 지켜볼수록 그는 놀라운 재능의 소유자였다. 그렇다고 무공 천재라고 보기엔 어딘지 모르게 어수룩하고.
그녀가 혼란에 빠져 있을 때 뒤에서 요란한 외침이 들려왔다.
“야! 주석하!”
그들 일행의 발걸음이 일시에 멈췄다.
남궁서란이 허겁지겁 달려오고 있었고 그 뒤를 남궁천이 뒤따라왔다.
주석하는 무슨 일인지 몰라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기다렸다.
“헉헉, 내가 생각해 봤는데…….”
남궁서란이 가쁜 숨을 삼키며 그를 노려보았다.
주석하는 어째 귀찮은 일에 휘말릴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으나 그렇다고 여러 사람 앞에서 도망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당신, 남궁세가 사건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남궁서란의 추궁에 주석하는 눈만 뻐끔거렸다.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어째 허를 찔린 느낌이다.
“그날 적을 목격한 사람이 나란 사실과 내가 무엇을 목격했는지 아는 사람은 아버지밖에 없는데…….”
“만사지존과 뇌군의 회담에서 언급됐겠지요.”
“아니! 아버지가 그렇게 세세한 내용을 말했을 리가 없어! 당신 대체 뭐야? 어떻게 아냐고!”
주석하는 말문이 막혔다. 이것은 뜻하지 않은 치명적인 기습이었다. 그렇다고 만리안석으로 그 장면을 봤다고 이야기할 수도 없지 않은가.
그는 방금 자신이 남궁후에게 언급했던 말을 되새겼다. 아쉽게도 말투 하나하나를 기억할 수는 없었다.
‘젠장, 엉뚱한 데서 의심을 받게 되네. 앞으로 조심해야겠어.’
주석하는 어색함을 털어내면서 가볍게 응수했다.
“누구나 머리가 있으면 생각해낼 내용 아닙니까?”
남궁서란의 눈썹이 확 올라갔다. 주석하의 대답이 그녀가 머리가 나쁘다고 놀리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당신! 내가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당신 말대로 그 사건을 저지르려면 엄청난 고수라야 해. 정파십존 급이거나 그 바로 밑이거나. 거기에 딱 부합하는 유일한 인물이 있어!”순간 주석하는 우설금을 떠올렸다. 이 여자도 우설금을 알고 있나? 절대 그렇지 않으리란 생각을 하며 그는 그녀를 주목했다.
정작 남궁서란이 지목한 사람은 의외였다.
“바로 당신이야! 당신이 범인이니 그때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아는 거지.”
남궁서란의 선언에 주석하는 말문이 막혔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생각지도 못한 돌발 사태에 모두 입만 쩍 벌렸다.
“거봐, 정곡을 찔리니 대답 못 하지? 남궁세가 사건이 있던 그 날 당신은 어디에 있었지?”
“그때 나는 여기 만진장에…….”
“거짓말! 당신이 그 전후로 만진장에서 보이지 않았다는 증언을 확보했다고!”
하필이면 그때는 그가 악군을 만나러 만진장을 비웠던 때였다. 악군을 만나러 간 사실을 밝히면 그 목적을 말해야 하고 이는 그가 회귀자임을 드러내는 단서를 주게 될지도 모른다. 그로서는 피하고 싶은 결과였다.
“만진장과 남궁세가의 거리는 꽤 멉니다.”
“당신 같은 고수에겐 별것 아닌 거리겠지.”
“난 경공에는…….”
무심코 말을 꺼내던 주석하는 바로 입을 닫았다. 지금은 화존에게 보법과 신법을 배워서 이런 변명이 통하지 않는다. 어째 계속 꼬이는 느낌이다. 남궁서란의 말재주를 감당하기 쉽지 않았다. 이래서 노인과 여자를 조심하라는 성현의 말씀이 있었던가.
“자신의 행적도 못 밝히잖아! 오늘 당신이 한 말을 모두 종합해보면 그날 사건을 당신이 저지른 게 확실해. 내가 그날 범인을 얼핏 봤는데…….”
“봤는데?”
“검은 옷을 입은 자가 있었어!”
당연히 검은 옷이 있었겠지. 우설금과 함께 다니는 흑귀가 있었을 테니까. 그렇다고 붉은 옷과 흰옷은 보지 못 했냐고 물을 수도 없어서 주석하는 속앓이만 했다.
주석하는 입을 닫고 싸늘한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기세가 오른 남궁서란은 거침없이 말을 내뱉었다.
“지금 다시 추리해보니 가적성을 죽인 자도 당신이 분명해!”
갑자기 여기에서 가적성이 왜 튀어나오는 걸까. 주석하의 미간이 모여 주름이 졌다.
“당신은 사천에서부터 가적성이 마교의 비밀을 알아서 쫓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 변명할 생각하지 마. 그때 이미 당신이 가적성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언해줄 사람은 널렸으니까.”가적성 호위를 하루 맡기도 했으니 가적성과 안면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다.
“가적성이 화산에서 살해당했을 때 당신도 화산에 있었지? 그 점은 저기 유…… 유 소협이 증언해줄 거야. 이상하지 않아? 두 사건 모두 당신이 연관되어 있어. 거기에다 당신의 무공은 가적성을 죽이고도 남을 충분한 수준이야!”사람들의 시선이 유비연에게 쏠렸다.
방금 나온 남궁서란의 추측은 사람들을 새로운 가능성으로 인도했다. 그제야 사람들은 주석하가 두 사건이 벌어졌을 때 현장 부근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번은 우연이라지만 두 번은 필연이다.
주석하는 슬그머니 주먹을 쥐었다. 식은땀이 느껴졌다.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서 죄를 뒤집어 쓰는 기분이다.
“이 가증스러운 살인귀야! 변명해 봐! 넌 가문의 원수가 분명해!”
급기야 남궁서란이 검을 뺐다.
천상삼화의 일인인 남궁서란의 별호는 검봉(劍鳳)이다. 남궁세가는 검법이 뛰어난 가문이고 적어도 그녀는 현 무림에서 젊은 여인 가운데 최고의 검공을 습득했다.
뒤에 서 있던 남궁천이 그녀를 말리려 했으나 남궁서란은 말을 듣지 않았다.
눈앞에 흉수가 있는데 머뭇거릴 남궁서란이 아니었다. 그녀는 다짜고짜 주석하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주석하의 일행이 말리기도 전에 남궁서란의 검은 주석하의 가슴을 찌르고 있었다. 주석하는 움직일 생각도 하지 않았다.
턱!
주석하의 손이 남궁서란의 검을 붙잡았다. 그녀의 검은 그의 가슴에서 불과 한치도 떨어지지 않은 지점에서 멈추었다.
“이 살인마가!”
남궁서란은 대로해서 검을 빼려 했다. 주석하의 손에 잡힌 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남궁서란이 비록 강호에서 검봉이란 위명을 쌓았지만 그녀와 주석하의 무공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 컸다.
“놔! 정당하게 승부를 가리자고!”
분노로 눈에 보이는 게 없어진 남궁서란이 검을 잡고 부들부들 떨며 소리쳤다.
보다 못한 유비연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남궁 소저, 정사가 반목했을 때 이익을 얻는 자가 범인일 수도 있잖아요?”
“그게 전부 사파의 음모라고! 뇌군이 저자를 이용해서 모든 일을 꾸민 거야!”
남궁서란이 유비연을 노려보면서 싸늘하게 소리쳤다.
지금까지 벌어진 모든 사건의 범인으로 주석하가 지목되는 순간이었다.
주석하의 안색이 무거워졌다.
그는 이번 생에서도 이런 식으로 핍박받고 싶지 않았다. 이번 생에서는 남에게 휘둘리지 않고 본인 뜻대로 살고 싶었다. 그 선을 남궁서란이 넘고 말았다.
싸늘한 눈빛과 함께 그는 남궁서란의 검날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