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창궁무존 (4)
남궁세가는 검법으로 유명한 문파이고 남궁서란 역시 검법에 일가견이 있는 무림인이다. 당연히 그녀가 소지한 검이 평범할 리 없다.
그녀의 검은 장인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명검이다. 그런 검이 쉽게 부러질 리 있을까.
남궁서란의 검이 부러지는 순간 모두의 안색이 확 변했다. 대부분 검을 맨손으로 부러트린 주석하의 내공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건만 오직 한 사람, 남궁서란만은 자신의 애검이 부러졌다는 생각에 앞뒤를 가리지 못했다.
“어? 이 자식아! 감히 내 검을!”
화가 머리끝까지 난 남궁서란은 부러진 검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며 주석하에게 달려들었다.
재차 검이 날아오자 주석하는 몸을 살짝 뒤로 물리며 보법을 밟았다. 순간 화존의 화판답공이 물 흐르듯 펼쳐지며 주석하의 신형이 허공에 붕 떠올랐다.
목표물을 잃은 남궁서란이 깜짝 놀라 시선을 위로 드는 순간.
쐐액-
주석하가 잡고 있던 토막 난 검날이 남궁서란에게 홱 날아왔다.
“으악!”
기겁한 남궁서란이 몸을 움츠렸고 주석하가 뿌린 토막 검은 아슬아슬하게 남궁서란의 머리를 스쳤다.
검에 잘린 그녀의 머리카락이 허공에 나부끼고 머리에 꽂았던 장신구, 금봉잠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단정하던 머리가 마치 귀신처럼 흘러내려 바람에 휘날렸다.
주변 사람들 또한 얼이 빠져 있었다. 부러진 검이 남궁서란을 스쳤을 때 사람들은 그녀가 크게 다칠지도 모른다고 마음을 졸였다.
넋이 나간 사람들이 서로를 쳐다보며 입만 벌렸다.
주석하는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허공을 걸어 내려왔다.
남궁서란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야! 이 거지발싸개 같은 자식아! 이 천하의 몹쓸 녀석아!”
그녀는 욕을 퍼부으며 부러진 검을 들고 돌진했다. 뒤에 있던 남궁천이 재빨리 그녀를 붙잡았다.
“서란아! 진정해라!”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 저 자식이 나를 갖고 놀잖아!”
붙잡는 남궁천과 뿌리치는 남궁서란이 뒤엉켜 혼란이 일었다.
사람들은 말문을 열지 못하고 두 사람을 쳐다봤고 잠시 그들을 냉랭한 표정으로 노려보던 주석하는 몸을 돌렸다.
“으아앙-”
급기야 남궁서란이 울음을 터트렸다.
“서란아, 진정해라.”
“으흐흑, 나를 이렇게 다룬 남자는 없었어!”
천상삼화라 불리던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는 엉망이 되어 있었다.
녹윤영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주석하를 따라갔고, 유비연은 안타까운 심정에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
만진장에서 제갈휘가 머무는 거처는 본채에서 한참 떨어진 깊숙한 지점에 있는 별채였다.
제갈휘도 북적이는 것을 싫어하기에 그 취향을 고려하여 뇌군이 마련해준 외딴 전각이었다.
전각을 방문한 유비연은 호흡을 고르고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무림맹 군사인 만사지존 제갈휘를 독대하는 것은 처음이다. 비록 그녀가 천상삼화라 하지만 이것은 단지 외모로 평가한 지위로 무공이나 강호 영향력 면에서 제갈휘에 미칠 수준이 아니었다.
가끔 자하검존의 제자 신분으로 제갈휘에게 인사한 적은 있으나, 오늘처럼 독대할 일은 전혀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긴장을 감추지 못하고 실내로 들어갔다.
“어서 오게.”
머리를 상쾌하게 해주는 맑은 향이 아련하게 피어오르는 대청에 제갈휘가 보였다. 서탁에는 무림맹에서 전한 것으로 보이는 각종 문서가 복잡하게 널려 있었다.
이곳 만진장에 와서도 무림맹의 대소사를 챙기는 부지런함에 유비연은 감탄했다.
그녀는 두 손을 맞잡고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만사지존 어르신을 뵙습니다.”
제갈휘가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
“남장이 제법 잘 어울리는구나.”
“아는 사람은 여자인 줄 다 아는걸요.”
이미 유비연은 강호에서 다양한 인맥을 쌓고 있어서 그녀가 여자란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주석하와 도수 정도일 것이다.
“그는 아직 모르나?”
“아직은요. 조만간 밝혀야 할 것 같긴 합니다.”
“그의 성격이…… 꼼꼼하거나 세심한 면은 없나 보군.”
유비연도 제갈휘도 그가 누구인지 암묵적으로 알았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사부에게 언질을 받았겠지만…… 몇 가지 확인할 일과 부탁이 있어서다.”
유비연은 본능적으로 주석하와 관련된 일임을 직감했다. 그가 아니라면 무림 말학인 그녀를 무림맹 군사가 직접 보자고 부를 일이 없을 테니까.
그녀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조심스럽게 제갈휘를 응시했다.
얼핏 보면 백발이 성성한 인자한 할아버지였다. 저 사람이 무림맹의 실질적인 권력자이자 전 무림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믿지 못할 것이다. 그는 무공이 아닌 머리로 천하를 좌지우지하는 사람이다.
“오늘 낮에 주 공자와 남궁 소저 사이에 다툼이 있었다지?”
“네.”
“그때 옆에서 지켜봤겠군?”
유비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 소저가 주석하를 범인으로 지목했다던데, 가적성을 죽인 범인으로.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남궁서란이 주석하를 지목하긴 했다. 다만 유비연은 그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남궁서란의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고 뒷받침하는 증거도 없다. 적어도 지금까지 그녀가 주석하를 지켜본 바에 따르면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범인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그동안 주석하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지 않았더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사건이 나던 날 그의 행적을 확실하게 입증할 수 있느냐?”
“하필 두 사건 모두 제가 옆에 없을 때긴 했습니다만…… 그는 그런 일을 꾸밀 만큼 악하지 않습니다. 그의 기본은 선량합니다. 함부로 사람을 죽일 자가 아닙니다.”
“흐음, 흑도 출신인데도?”
“네.”
확고한 유비연의 대답에 제갈휘가 생각에 잠겼다. 주석하는 무공이 경시할 수준이 아니고, 출신 또한 흑도 문파인 데다 혼군의 진전을 이었다고 알려졌기에 요주의 인물로 떠올랐다.
거기에다 어찌 된 일인지 오늘은 악군의 신물과 화존의 무공을 선보였다. 악군은 사파이지만 화존은 정파다. 어떻게 된 일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혼란스러운 자였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자하검존의 제자가 일찌감치 옆에 붙어 동정을 파악하고 있었다.
“너도 알다시피 그는 향후 무림의 균형을 깨트릴 중요인물이다. 만일에…… 오늘 남궁 소저가 말했듯이 그가 정파와 사파의 혼란을 노리고 일을 저질렀다면 이는 정말 중요한 문제다.”
“그럴 일 절대 없습니다.”
“나도 안다. 하지만 만약이란 게 있지 않으냐. 그러니까 앞으로도 그를 눈여겨 감시하기 바란다.”
유비연은 어쩔 수 없이 수긍했다. 어차피 지금도 사부의 명으로 하는 일이다. 단지 부담이 조금 더 늘었을 뿐.
다만 그녀는 제갈휘의 말투와 표정에서 그가 정말로 주석하를 의심하고 있지는 않단 느낌을 받았다. 주석하를 범인이라 생각하고 주시하라는 뜻은 아닌 듯했다. 물론 제갈휘가 무엇을 노리는지는 그녀가 알 방법이 없다.
“그리고…….”
제갈휘가 화제를 돌렸다.
대화가 끝났다고 일어나려던 유비연은 멈칫하며 다시 자리를 잡았다.
“무한회귀공이라고 들어봤느냐?”
“네. 스승님께서 일전에 말씀해주셨습니다.”
유비연은 화산파에 돌아왔을 때 자하검존을 만난 자리에서 얼핏 들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가적성이 마교에서 알아낸 정보라 했던가.
“나와 자하검존은 무한회귀공을 익힌 자를 찾고 있다.”
“마교에서 나온 정보니까 천마가 익히지 않았을까요?”
“그렇다. 천마는 확실히 익혔겠지. 다만 나는 다른 사람이 또 있을 수 있다고 본다. 미래에서 회귀한 사람 말이다.”
일전에 자하검존이 그녀에게 갑자기 무공이 늘어난 사람을 찾아보라고 일렀던 기억이 났다. 그때 그녀는 주석하를 떠올렸었다. 물론 그가 혼군의 진전을 잇는 과정을 들은 후로 그런 가능성을 접어버렸지만.
“이 문제는 무림맹의 앞날을 좌우할, 아니 무림의 미래를 결정할 중요 문제다. 강호를 누비면서 비슷한 후보자를 본 적이 있느냐?”
“갑자기 무공이 증가한 사람요?”
“그래, 미래에서 왔다면…… 어느 날 크게 달라진 사람이 있을 거다. 예전에는 삼류고수였는데 지금은 절정고수로 바뀌었다거나. 그런 자를 눈여겨봐야 한다. 그런 자가 있으면 바로 무림맹으로 보고하거라.”유비연은 살짝 안면을 찌푸렸다.
흔치는 않지만 어느 날 무공이 발전하는 사람은 있다. 전대 기인이 남긴 비급을 얻거나 만년설삼 같은 영약을 먹었다거나. 그런 기연은 종종 무림에 회자된다. 회귀자가 존재한다는 사실도 의문이지만 그런 식으로 회귀자를 찾겠다는 발상도 어이없기는 마찬가지다.
“가능한 일입니까?”
“그렇지.”
“천마가 무한회귀공을 익혔다면 어떤 식으로 사용할까요?”
그녀의 질문에 제갈휘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가 천마라면…… 천마도 사람이다. 천마에게 전해지는 마교 절학은 쉽게 익히기 어려울 거다. 물론 내공도 인간인 이상 시간이 걸린다. 이것을 무한회귀공으로 극복하려면…….”교주인 천마에게 주어진 무공을 이른 시일에 성취할 수 없고, 아무리 영약을 먹더라도 내공에 한계를 느끼면 천마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시간이다.
예를 들자면 현재 미완성인 천마는 지금부터 십 년 전으로 돌아가 현재 익히는 무공을 계속 연마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다른 사람보다 십 년에 해당하는 시간을 벌게 된다. 이를 무한히 반복하면 현재 나이 마흔인 천마가 실제로는 백 년 이상의 세월을 산 것과 같은 효과를 누린다.
물론 과거로 돌아간 십 년 동안 무림에서 벌어질 사건을 미리 알고 있어서 얻는 이익도 무시할 수 없다지만 이는 무한한 시간을 늘리는 효과에 비하면 별것 아니다.
“어르신께선 지금의 천마가 실제로는 백 년 이상 산 괴물이란 뜻입니까?”
유비연은 숨이 턱 막혔다. 그녀가 이럴 진데 무림맹 군사인 제갈휘가 느끼는 압박감은 더할 것이다.
“그렇네. 그보다 더 우려스러운 점은 천마 외의 다른 회귀자가 존재할 가능성이다. 우린 그자를 찾아야 해. 그자는 천마의 꼭두각시일 가능성이 크니까.”제갈휘가 지적한 방식이라면 주석하는 해당하지 않았다. 주석하가 혼군의 무공 진전을 이은 방법은 이런 식이 아니었으니까. 유비연은 그런 이유로 주석하를 회귀자 후보에서 제외했다.
다만 제갈휘의 우려를 십분 이해했기에 그녀는 강호를 돌아다니는 동안 열심히 정보를 캐보겠다고 다짐했다.
***
주석하가 만진장에 온 목표는 이미 달성되었다.
뇌군을 만났고 미흡하지만 의견을 들었다. 악군을 만난 것도 행운이었다. 이곳에서 남은 일이 없기에 주석하는 떠날 시점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차에 오늘 남궁서란을 만나면서 기분이 상했다. 그 여자가 왜 그에게 감정적으로 구는지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잠시라도 같은 공간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떠나겠다고 뇌군에게 전갈을 넣어두었다.
밤이 되었을 때 그의 숙소로 방순 총관이 방문했다.
“주군께서 부르십니다.”
주석하도 바라던 바였다. 왜 하필 밤에 부르는지 의문이지만 오늘 밤 작별을 고하면 내일 떠날 수 있을 것이다.
“네, 지금 가겠습니다.”
주석하는 흔쾌히 대답하고 방순을 따라 화원으로 나왔다.
어둠 속에서 달빛이 은은하게 내렸다. 하늘에 반달이 걸려 있었다.
어설프게 화원에 들어갔다가 진법에 갇혔던 일을 상기하면서 주석하는 조심해서 방순을 뒤따랐다.
뇌군의 처소까지는 제법 거리가 되었기에 주석하는 달빛이 내리는 화원을 구경하면서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의 눈에 회담이 열렸던 정자가 들어왔다.
그 정자에서 사람 그림자가 느껴졌다. 검을 잡고서 폭발적인 위압감을 내뿜는 인물, 그는 뇌군이 아니었다.
“주 공자?”
그 인물이 지나치는 주석하에게 말을 걸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