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90화 (90/273)

90화 창궁무존 (5)

방순을 따라가던 주석하는 걸음을 멈추었다.

정자 위의 인물을 본 방순이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바쁜가? 나와 잠시 이야기할 수 있겠나?”

검을 잡은 인물은 정파십존이자 남궁세가 가주인 창궁무존 남궁후였다.

낮에 남궁서란과의 우발적 사건이 없었더라면 명쾌히 만났겠지만 지금은 껄끄러웠다. 딸인 남궁서란을 위협했다고 분노한다면 감당하기 어렵지 않은가.

주석하가 머뭇거리자니 남궁후가 재차 요구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걸세.”

마지못해 주석하는 정자 위로 올라갔다. 평소보다 유난히 긴장됐다.

정자에서 바라본 연못은 어설프게나마 제 모습을 찾아 달빛 아래 고요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저 연못을 망가트린 사람이 자신이었다는 생각에 주석하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순간 남궁후의 손이 그의 가슴을 향했다.

“막아보게!”

얼떨결에 위협을 느낀 주석하는 손바닥으로 남궁후의 공격을 막았다.

쿵!

두 사람의 손바닥이 중간에서 딱 부딪치면서 주석하의 신형이 휘청거렸다. 갑작스러운 남궁후의 공격을 막으려고 주석하는 혼군의 내력을 끌어올린 상태였다. 아직은 악군보다 혼군의 내력을 다루기가 수월했다.

주석하가 혼천신공을 운용한 것을 확인한 남궁후가 서서히 내력을 끌어올렸다.

우우웅-

마주친 손바닥을 통해 태산 같은 압력이 밀려들자 주석하도 대항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이 내력을 더 끌어올리면서 주변 공기가 마치 폭풍의 소용돌이 속에 빠진 듯 회오리를 일으켰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주석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남궁서란의 복수를 하려는 건가? 다짜고짜 공격한 남궁후의 행동이 거슬렸다.

하지만 상대의 태도는 그를 죽이려는 걸론 보이지 않았다. 그의 응수를 확인하면서 점차 강도를 증가하고 있었다.

주석하는 이를 악물고 공력을 끌어올렸다. 의도가 무엇이건 상대의 도발을 참을 만큼 군자는 아니었다.

상대는 정파십존, 주석하라 해도 쉬운 상대가 아니다.

고오오오-

내력이 치솟고 마주친 손바닥이 경련을 일으켰다.

과연 창궁무존다웠다. 그의 내공은 장강처럼 넓고 끝이 없었다.

쉽게 상대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주석하는 고민에 빠졌다. 자칫하면 그의 몸 내부에 다섯 가지 진기가 잠재해 있음을 들키게 될지도 모른다. 남궁후의 의도가 그의 무공을 시험하려는 것임은 알겠는데, 그렇다고 속수무책으로 알려줄 수는 없었다.

혼군의 내력만으로 감당하기 쉽지 않자 단전에서 반응이 왔다. 비록 주석하가 혼천신공을 익혔다지만 아직 완벽하게 혼군의 내력을 사용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이대로 버티자니 단전의 열기가 심상찮다. 단전의 모든 기운을 들킨다면 최악이다.

주석하는 이마에 땀을 흘리며 선택의 기로에 섰다. 어느 쪽이든 그가 질 가능성은 없다지만.

그 순간 마주친 손바닥에서 가해지던 압력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남궁휘가 내력을 조금씩 거두어들이는 기색이다.

주석하도 따라서 내력을 조금씩 줄였다.

두 사람이 손바닥을 회수하고 어색한 표정으로 마주했다.

“젊은 사람이 대단하군.”

“과찬이십니다.”

“지금 뇌군을 만나러 가나 보지?”

역시 늙은 생강답게 주석하의 목적지를 바로 맞췄다.

“그렇습니다.”

“그래, 뇌군이 자네를 인정하나 보군. 좋아, 다만…… 뇌군은 그리 좋은 사람이 아니란 것만은 일러두고 싶네.”

주석하는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뇌군은 흑련의 군사이니 정파인 남궁후가 좋게 볼 리 없다.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

남궁후가 검을 정자 난간에 걸고 입을 열었다.

“낮에 서란이와 다퉜다고 들었네. 아비가 된 자로서…… 미안하게 생각하네. 아이가 워낙 철부지처럼 자라서 말이지.”

“괜찮습니다. 누구나 그런 의심을 가질 수 있지요.”

예상 밖으로 남궁후가 사과해오자 주석하는 한결 마음이 놓였다. 정파십존이나 되는 인물이 이처럼 사과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대를 만난 이유는…… 그대가 흑검문 소문주라고 들었는데 그런가?”

“네, 그렇습니다. 일전에 창천일룡이 방문했던 적이 있습니다.”

창천일룡은 남궁천의 별호다.

“나도 들었네. 부친은 잘 계신가?”

“부친을 아십니까?”

“아니, 모르네.”

생각해보니 당연했다. 주격은 흑검문의 규율 때문에 오십 년간 덕양을 떠나지 못했다. 당연히 정파십존이나 되는 인물이 흑검문을 방문했을 리도 없고.

“잘 계십니다. 아직 정정하시죠.”

“주 공자는 이것이 강호 초출인가?”

“그렇습니다. 그동안 덕양을 떠나지 못하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화산과 이곳 만진장을 방문했습니다. 남궁 소저와는 덕양에서 우연히 만난 적이 있고요.”

“그랬군. 강호를 다녀보니 어떠한가?”

남궁후의 음성에서는 전혀 적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마치 아버지의 자애로움이 느껴졌다. 주석하는 의도를 알 수 없었으나 편하게 대화를 나눴다.

어린 시절과 부친 근황을 대답하다가 주석하는 진의를 물었다.

“그런데 흑검문에 관심이 많으신 듯합니다?”

“예전부터 알던 문파네. 가본 적은 없지만. 그동안 흑검문이 오십 년 규율에 묶여 있었다는 사실도 아네.”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주석하는 얼어붙었다.

이름 없는 문파를 안다는 것도 놀라운데 그 내부 비밀마저 꿰뚫고 있다니. 더구나 남궁세가는 사천에서 멀리 떨어진 문파가 아닌가.

“그걸 어떻게?”

“흑검문에서 걸출한 후계자가 나올 줄 알았어. 자네를 보니 감회가 새롭네. 언제 시간 나면 부친과 함께 남궁세가에 한번 들러주지 않겠나?”

“제 부친께서 고향을 떠나시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셔서…….”

무슨 일인지 모르기에 주석하는 완곡하게 거절했다.

“그래, 그럼 내가 한번 흑검문을 방문하고 싶네만.”

“편하신 대로 하십시오.”

굳이 오겠다는 사람을 말릴 생각은 없었다. 다만 남궁세가의 가주가 어떻게 흑검문을 알고 있는지, 왜 흑검문에 호의를 보이는지 의문이었다.

잠시 주석하를 살피던 남궁후가 손을 저었다.

“가보게. 실례가 많았네.”

주석하는 포권을 취해 인사하고는 정자를 떠났다.

***

뇌군의 서재는 평범했다.

예전에는 주석하의 숙소에서 만났기에 이 서재를 방문한 것은 처음이었다. 이곳은 명실상부 흑련의 심장부이고 중요문서가 널린 곳이다. 뇌군이 이곳에 주석하를 끌어들였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컸다.

물론 주석하는 그런 세세한 정치 놀음에 신경 쓰지 않았다. 덕분에 편안하게 뇌군을 만났다.

“화존의 무공은 어떻게 된 건가?”

“얼떨결에 배웠습니다. 마침 화존이 봉담소를 방문했더군요.”

주석하는 세부 내용을 모두 빼고 결과만 말해주었다.

한참 주석하는 빤히 쳐다보던 뇌군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재주가 좋아. 화존에게서 무공을 배우다니. 화존은 함부로 제자를 들이지 않는 깐깐한 여자이거든.”

의외의 평가였다. 주석하가 보기에 화존은 무척 밝고 심성도 편한 여인이었다. 한 사람을 놓고 어떻게 이리 상반된 평가가 나올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자네, 내일 떠날 거지?”

“어떻게 아셨습니까?”

“낮에 남궁 소저랑 다퉜다고 들었네. 자넨 이곳에 온 목적을 달성했으니 더 있고 싶지 않겠지.”

“그렇습니다. 오늘 남궁 소저가 엉뚱한 소리를 해서…….”

주석하는 과연 뇌군이 심기가 깊다는 생각을 했다.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말게. 나도 자네의 실체를 몰랐다면 그렇게 의심했을 테니까.”

뇌군의 말은 이곳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오해할 소지가 다분하다는 점을 암시했다.

의심을 받는다는 게 좋을 리 없지만 주석하는 개의치 않았다. 본인이 당당하면 상관없다고 생각했고, 또 그들이 오해하더라도 이제는 무력에서 꿀리지 않을 자신감이 있었다.

“가기 전에 몇 가지만 당부하겠네.”

“말씀하시죠.”

악군을 소개한 일로 신뢰가 생기긴 했으나, 기본적으로 둘 사이는 주고받는 이익 관계다.

“남은 흑도팔군 세 사람에게는 내가 서신을 보내 놓겠네. 자네가 찾아갈 거라고. 그 정도면 되겠나?”

“충분합니다.”

이미 악군을 방문할 때 뇌군의 서신이 효력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기에 주석하는 매우 고마웠다.

정작 뇌군은 우려를 표시했다.

“자네는 우리가 왜 사파라 불리는지 아는가?”

“글쎄요.”

“그만큼 신의가 없다는 뜻이네. 정파든 사파든 누구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지만 사파인이 더 심하지. 모두가 악군과 같다고 보면 안 되네. 남은 자들이 자네에게 호의적일지 아니면 적대적일지 알 수 없네. 그래서 항상 조심해야 해.”전생을 통해 정파인이든 사파인이든 똑같이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체험한 주석하였다. 지금까지 만난 혼군이나 악군은 그에게 대단히 호의적이었다. 뇌군의 당부는 나머지 사람도 그렇게 호의적이기 어렵다는 말이다.

“염군은 대막 부근에 거주하고, 빙군은 북해, 독군은 운남이지. 모두 거리가 멀어. 그러니 자네도 돌아다니기 쉽지 않을 거야.”

“그래도 한번은 만나야겠지요.”

“그래, 응원하지. 난 자네가 그들의 무공을 모두 익혀서 사파 역사상 전무후무한 고수가 되어주기를 원하네.”

주석하가 생각지도 못했던 목표였다. 자신이 흑도팔군이나 정파십존에 비해 전혀 밀리지 않는다고 확신하면서 어렴풋이 자각하던 사실이긴 했다.

“알잖나? 한 명의 절대 고수가 그 아래 열 명의 고수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그동안 나는 어떻게든 흑도팔군이 정파십존의 우위에 서고 사파가 정파를 누르기만을 고심해왔네. 그런데 자네를 만나면서 그 목표가 마교 제압으로 바뀌었어. 자네가 큰 역할을 해줄 수 있으리라 보네.”부담감을 팍팍 심는 당부였다. 주석하는 받아들이지도 거부하지도 못했다.

처음의 선입견과 달리 뇌군은 의외로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어차피 오 년이잖나? 오 년 내로 마교 천하가 온다며?”

“그, 그렇긴 합니다만…….”

“그래서 나도 전략을 완전히 바꿨지. 정파와 굳이 대립하지 않으려고. 과연 제갈휘 그 양반이 따라줄지 모르겠지만 혼자서는 손뼉을 칠 수 없는 법. 전쟁도 혼자서 할 수 없고.”뇌군이 껄껄 웃었다. 그는 품에서 얇은 책자를 꺼냈다.

“이걸 자네에게 주겠네. 시간 나면 읽어보게. 자네가 기관진식을 전혀 모르는 것 같아서 쉽게 풀이했네.”

뇌군이 건넨 책 표지에는 ‘천하무적 기관진법’이라고 적혀 있었다.

천하무적? 어디선가 많이 본 제목인데? 덕양의 그…… 헌책방에서…….

주석하는 뇌군의 배려에 감사했다. 뜻밖의 선물이었다. 그날 진법에 갇혀 고생한 경험을 생각하면 앞으로도 그런 위기에 빠지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기초이긴 하지만 내가 심혈을 기울여 창안한 기관진식과 제갈세가 독문 진법의 파훼법이 적혀 있네. 마교의 알려진 진법도 조금 다루긴 했어.”

주석하에게 대단히 중요한 내용이었다. 그는 책을 품속에 소중하게 집어넣었다.

뇌군이 그의 팔을 잡으며 격려했다.

“부디 남은 흑도팔군 세 사람을 만나 목표를 이루게. 앞으로 가장 조심해야 할 사람은 정파십존이야. 자네의 성취를 본 이상 그들이 자네를 그냥 놓아둘 것 같지 않아서 말이야.”생각지도 않은 경고에 주석하는 고개를 숙였다. 이름을 날리니 고민할 일이 늘었다. 이런 식으로 인생이 풀리기를 바랐던 것은 아닌데…….

“어려운 점이 생기면 언제든 찾아오게나. 만진장은 항상 열려있다네.”

힘이 되는 말에 주석하는 감사를 표했다. 물론 뇌군에게도 본인의 욕심이 있겠지만 그 방향이 같다면 기꺼이 환영할 일이다.

만진장의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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