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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검천하-91화 (91/273)

91화 암군 (1)

아침밥을 먹고 주석하는 떠나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동료들 모두 직감하고 있었기에 특별히 아쉬워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유비연만은 사부로부터 명확하게 임무를 하명 받지 못해 주저했다.

“그래서 이제 어디로 갈 건데요?”

녹윤영의 질문에 주석하는 갈 곳을 떠올렸다. 남은 세 흑도팔군이 있는 장소가…… 대막, 북해, 운남이라 했던가. 그나마 운남은 조금 낫지만 나머지 두 곳은 끔찍하게 멀었다.

한숨이 푹푹 쏟아졌다.

“왜 그래요?”

“중원을 돌아다니고 싶었는데 그 크기를 경험해보니 평생 돌아다녀도 다 가보기 힘들 것 같아서요.”

대충 둘러댔다.

“뭘 걱정해요? 그냥 발 가는 대로 가면 되지.”

“하하, 그렇네요. 그럼 북해로 가볼까요?”

주석하가 북해를 언급하자 모두의 안색이 말이 아니었다. 대충 미쳤냐는 표정이다.

한참 고민하던 녹윤영이 먼저 찬성으로 돌아섰다.

“우와! 그럼 저도 얼음 나라를 구경할 수 있겠네요? 이히히.”

찬 기운을 맞은 듯 몸을 떨면서도 녹윤영이 용기를 뿜어냈다.

도수는 뭔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동의했다.

“에휴, 그래. 강호 유람을 시작했으면 뿌리를 뽑아야지.”

혈혼도객은 어차피 주석하를 따라야 한다.

유비연은 한참 주석하와 녹윤영을 번갈아 보더니 한숨을 푹푹 쉬었다.

“유 형은?”

“저는…… 북해라고 했죠? 이참에 북해빙궁 구경해봐야죠.”

어쨌든 그녀도 북해로 가겠다고 선언했다. 자하검존과 만사지존이 계속 주석하를 주시하라고 했으니 그녀도 달리 선택하기 어려웠다.

“그럼 같이 떠나죠.”

홀로 먼 길을 가기보다 함께 가는 것이 더 나으니 주석하도 만류할 생각은 없었다.

그들이 만진장 정문으로 갔을 때 문 앞에 한 인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남궁천이었다.

“주 공자, 떠나시나 보네요.”

“예, 계속 머물 수는 없으니까요.”

비록 남궁서란과는 악연이었으나 남궁천에게는 도움을 받았던지라 주석하는 여전히 그를 신뢰했다. 어젯밤 가주인 남궁후와의 만남도 나쁘진 않았었다.

남궁천의 손짓에 주석하는 두 사람만 길옆에서 따로 시간을 가졌다.

“어제 아버지를 만나셨더군요.”

“네, 그렇습니다. 우연이었죠.”

정말 우연인지 아니면 남궁후의 의도였는지 지금 생각하면 모호했다.

“아버지께서 주 공자에게 상당한 인상을 받으셨어요.”

“무려 정파십존의 관심을 받다니…… 영광입니다.”

“예전에 만났을 때는 잠재력만 있었는데, 이제는 무림고수로 개화하셨군요. 부럽습니다.”

“창천일룡이란 위명에 비하면 아직 멀었지요.”

대충 덕담을 주고받았다. 남궁천이 이곳에 기다리고 있다가 그를 만난 것이 이런 이야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머뭇거리며 말을 빙빙 돌리던 남궁천이 정색했다.

“서란이 말입니다. 기분 나쁘셨더라도 이해해주십시오.”

남궁천이 사과했다. 주석하는 이미 개의치 않은 상태였다.

“아닙니다. 전 진즉에 잊었습니다.”

“그 아이가 항상 귀여움만 받으며 자라다 보니…… 어제 같은 일을 벌였습니다. 너그러이 용서해주시지요.”

주석하는 대답 대신 환하게 웃었다. 이 두 사람은 어째 오누이이면서도 성격이 딴판이다.

“오래지 않아 저와 아버지가 함께 흑검문을 방문할 겁니다. 문주님에겐 선대의 일로 찾아뵙는다고 미리 귀띔해주세요.”

“선대의 일?”

주석하는 흑검문을 비교적 소상하게 알고 있던 남궁후를 떠올렸다. 남궁후도 찾아오겠다고 넌지시 의사를 비쳤는데…….

“자세한 내용은 그때 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남궁천은 지금 바로 이유를 알려주지 않았다. 어차피 아버지 주격에게 물으면 알 문제니 주석하도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주소은이 남궁천의 방문을 기대하고 있다. 저절로 주소은의 부탁을 해결했으니 그도 만족스러웠다.

“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주석하는 남궁천을 향해 포권을 취하고 작별을 고했다.

***

만진장을 나와 고개를 넘어가면서 유비연이 물었다.

“주 공자, 남궁세가와 친해요?”

“그래 보여요? 정파와 사파라 이상해요?”

“그것도 그렇고…… 어제 남궁 소저와…….”

어제 남궁서란에게 적의를 드러낸 그의 모습이 충격이었나 보다. 하긴 강호에서 공개적인 장소에서 남자가 그렇게 여자를 위협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창천일룡과는 예전에 친분이 조금 있었습니다.”

주석하가 덕양을 거의 떠나지 않았기에 유비연은 그 친분이 어떻게 생긴 것인지 궁금했으나 되물을 수는 없었다.

남궁세가의 가주가 흑도 문파를 방문하는 일은 흔치 않다. 그것도 친분이 목적이라면 모두가 놀랄 일이다. 유비연은 점점 오리무중인 주석하와 흑검문의 정체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지금까지는 사부의 명령 때문에 주석하에게 관심을 가졌다면 이제는 자신의 호기심이 오히려 우선이 됐다. 보면 볼수록 이 사람은 신기한 구석이 많다. 그녀는 주석하를 통해 사파에 대해 가졌던 선입관이 많이 바뀌었음을 깨닫지 못했다.

유비연이 생각에 잠겨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 주석하는 난데없는 예리한 기운을 느꼈다. 순식간에 피부를 찌르는 듯한 위험이 느껴졌다.

“위험해!”

주석하는 반사적으로 유비연을 밀치며 흑검소를 들어 올렸다.

챙-

날아오던 검기가 흑검소를 맞고 튕겨 나갔다. 얼떨결에 흑검소로 막았기에 제대로 내력이 실리지 않았으나 다행히 공격한 검기도 중후하지 않고 가벼웠다.

유비연은 안색이 하얗게 질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주석하가 아니었다면 그 검기가 그녀의 가슴을 꿰뚫었으리란 공포 때문이었다.

도수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암습에 특화된 검법인데…….”

과연 도수답게 적의 공격 수법을 한눈에 알아챘으나 검기를 날린 상대의 무공이 무시무시해서 도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주석하는 안면을 굳히고 암습자를 찾았다.

그들이 지나가는 산길의 오른쪽에 커다란 바위가 있고, 그 너머로 한 인물이 툭 튀어나왔다.

“으하하! 주석하인가?”

그를 아는 인물이다. 무심코 눈을 돌린 주석하는 경악해서 몸이 굳었다.

짙은 자의를 걸친 중년의 남자, 바로 암군이었다.

만진장에서 다른 기인들과 함께 만났을 때는 잘 몰랐었다. 그런데 지금 이곳에서 암군이 홀로 있으니 그 존재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그날 나와 창궁무존 사이에 끼어들더니 오늘도 역시 명불허전이구나. 이것도 막을 수 있느냐?”

암벽을 넘어 암군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암군이 손에 든 장검이 허공을 가르고 검기가 벼락처럼 유비연을 향해 쏟아졌다.

“으악!”

유비연은 암군이 갑자기 왜 자신을 공격하는지 알지 못했다. 암군의 공격은 감히 그녀가 어찌해볼 수준이 아니었다.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어 그녀는 주저앉은 채 머리를 감쌌다.

암군이 왜 이러는지 주석하도 알 재간이 없었다. 그날 그는 싸움에 끼어들어 자하검존의 공격을 대신 막아줬다. 분명히 호의로 한 일인데 상대가 그 트집을 잡으니 갑자기 날벼락을 맞은 셈이었다.

주석하는 허겁지겁 흑검소로 암군의 공격을 막았다. 이번에는 혼군의 내력을 실어 확실하게 검기를 차단했다.

콰앙-

흑검소에 막혀 갈라진 검기가 사방으로 불꽃이 튀었다.

“대체 왜 이러는 겁니까? 유 소협을 왜 공격하는 거죠?”

주석하는 재빨리 유비연의 앞을 가로막으며 소리쳤다. 무려 흑도팔군에 속한 절대 기인이 강호에 출마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후배를 핍박하는 꼴이었다. 아무리 정사로 분리되어 있다지만 이는 과한 보복 아닌가. 암군의 명성에도 해가 될 일이었다.

“흐음, 유 소협? 그는 자하검존의 제자가 아니더냐? 비열한 자하검존의 업보를 제자가 대신 할 수도 있는 거지.”

대수롭지 않게 응수하며 암군의 검기가 다시 유비연을 향해 날아왔다.

이번에는 주석하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굳게 버틴 채 흑검소로 가볍게 상대의 공격을 막았다.

암벽에서 표표히 떨어져 내리던 암군이 피식 웃었다.

“제법인데? 그럼 이것도 막아 보거라.”

유비연을 노리고 다시 검기가 몰려왔다.

암군의 몸놀림은 빨랐다. 그는 주석하를 가운데 두고 사방으로 움직이면서 공격했다. 공격 방식도 단순했다. 오로지 유비연을 향해 검기만 뿌리고 있었다.

주석하는 크게 당황했으나 금방 적응했다. 다만 암군이 그가 아닌 유비연을 노리고 있으니 암군을 공격하지 못하고 수세에 몰려 방어밖에 할 수 없었다.

점점 약이 오르는 사이 주석하는 암군의 공격이 일정한 형식으로 반복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예전에 그는 도수와 자주 비무를 벌이며 수련했었다. 암군이 거느린 암흑단은 살수 집단에서 세력을 키운 단체이고 그렇다 보니 암군의 무공 또한 도수와 기본 흐름이 비슷했다.

게다가 암군이 같은 초식을 반복하니 주석하는 금방 익숙해졌다. 몇 초식 지나지 않아 이제는 그가 똑같이 펼칠 수 있을 정도가 됐다.

“이런 건 어떠냐?”

다시 검기가 유비연에게 몰려왔다.

주석하는 재빨리 그녀를 가로막으며 흑검소를 이용해서 방어했다.

챙-

이번에는 앞선 초식보다 조금 더 복잡하고 위력도 강해졌다. 검기를 막은 흑검소에 충격이 느껴졌다. 당연히 주석하도 내력을 더 끌어올려 대항했다.

그를 중앙에 두고 사방으로 암군이 돌아다니면서 마치 자객이 기습하듯 검기를 퍼부었다.

몇 번 반복이 지나가자 주석하도 똑같이 흑검소를 휘둘렀다.

흑검소에서 검기가 뻗어 똑같은 초식으로 암군을 공격했다. 흑검육식으로는 반격하기 여의치 않다고 생각한 주석하의 임기응변이었다.

몇 차례 그의 반응을 시험하던 암군이 흡족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좋아! 자! 마지막이다!”

이번에는 이전과 확실히 위력이 다른 검기가 몰려왔다. 암군의 초식은 더욱 빨라졌고 위력은 더 강해졌다.

이제는 주석하도 여유 있게 대응할 수 없었다. 그는 혼군의 내력을 모두 끌어올려 상대를 맞이했다.

두 사람의 공방에 지면이 흔들리고 강기의 충격파가 파문을 그리며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아마 흑도팔군의 두 기인이 전력을 다해 싸우면 이런 결과가 나타나리라.

콰아앙-

이마저 주석하가 익숙해졌을 때 암군이 공세를 멈췄다.

“대단하구나.”

“대체 왜 이러십니까?”

주석하는 암군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다만 암군이 그도 유비연도 죽일 의사가 없다는 정도는 진작 알아챘다.

암군이 그의 앞으로 다가와 여전히 뒤에서 웅크리고 있는 유비연을 슬쩍 보고는 주석하의 어깨를 툭툭 쳤다.

“방금 내가 펼친 초식은 세상 사람들이 암천살검이라 부르는 절세 검법이다. 초식에 제대로 강기를 실은 후 속도를 높여라. 그럼 더 완벽해질 거다.”암천살검(暗天殺劍)! 모두 오 초식으로 이루어진 무림 최강의 살수 초식이었다. 상대를 효율적으로 빨리 죽이기 위해 창안한 암군의 독문 무공. 암군은 이 살초로 무림에서 명성을 쌓았으니 그 위력이 어마어마했다.

“예?”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주석하가 그를 쳐다보자 다시 암군이 어깨를 툭툭 쳤다.

“네 녀석이 그날 끼어들면서 사용한 검법 초식이 너무 허접해서 한 수 지도해줬다. 그날 신세도 갚을 겸.”

한 수 지도라니? 지도 방식이 괴상하긴 했지만, 무려 누구나 탐내는 암군의 검법이다. 물론 흑검육식이 허접한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뜻밖의 기연에 주석하는 할 말을 잃었다. 초식을 따라 할 수 있을 만큼 습득했지만 여전히 믿기 어려웠다. 왜 암군이 그에게 무공을 가르쳐 준 걸까.

“왜? 달리 부탁할 게 또 있느냐?”

암군의 태도는 더욱 점입가경으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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