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암군 (2)
주석하는 멍한 표정으로 암군을 살폈다.
짙은 눈썹과 각이 진 턱이 그려낸 사내다운 인상에 환한 웃음을 머금은 얼굴은 완벽한 호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날 회담 중에는 암군이 묵직해 보이더니 지금 인상은 진중하면서도 인정미가 있었다.
주석하는 미소를 지으며 유비연을 돌아봤다. 그녀는 맥이 풀려 주저앉은 채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래도 조금 너무 하신 것 아닙니까?”
“난 네가 도울 줄 알았다. 설사 죽더라도 검존의 제자니 내가 아쉬울 일은 없다.”
암군도 정사를 확실하게 구분했다. 평소 정파에 쌓인 게 많았던 모양이다.
비록 유비연의 상태가 조금 나빠 보이긴 했으나 그가 어찌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다. 정사를 가릴 생각이 없는 그와 달리 다른 무림인은 확실히 피아를 구분하고 있으니까.
다만 이렇게 일방적으로 암군의 무공을 배우고 보니 심기가 거슬리긴 했다. 그는 주위를 휙휙 둘러봤다.
도수가 입을 헤 벌리고 침을 질질 흘리는 게 보였다.
‘어? 저 자식은 또 왜 저래? 예쁜 여자라도 봤나?’
어제 무려 천상삼화인 남궁서란을 보고도 꿈쩍 않던 녀석이니 여인에게 홀릴 놈은 아니다.
도수의 시선이 암군에게 꽂혀 떨어질 줄 모르고 있었다.
주석하는 금방 그 마음을 알아챘다.
방금 암군이 펼친 무공은 도수의 검법과 대단히 유사하다. 무엇보다 그 원리와 검의(劍意)가 같다. 도수가 이 검법을 익힌다면 한층 성장할 수 있다. 현재 살검회가 붕괴된 상황에서 앞으로 도수가 더 나은 검법을 배울 기회는 없다.
주석하는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부탁할 게 있으면 들어주시겠습니까?”
“그렇다. 네놈에게 신세 진 것도 있고, 뇌군의 부탁도 있고. 뭐냐?”
뇌군이 나왔다. 역시 오늘 무공 전수는 뇌군과 암군의 합작품이었다. 제법 뇌군의 득을 크게 본다.
주석하는 도수에게 손짓했다. 도수가 열심히 뛰어왔다.
“이 자식을 암흑단에 넣어 좀 굴려주세요.”
“어? 굴리라니! 왜에에!”
도수가 기겁하고 소리를 빽 질렀다.
“넌 가만히 있어.”
주석하가 난리 치는 도수의 머리채를 붙잡고 팔로 감싸 안았다. 불과 열 살 남짓한 개구쟁이들이 장난치는 모습이다.
“누구지?”
둘 사이가 보통이 아님을 눈치챈 암군이 도수를 세밀하게 훑었다.
“살검회 소회주입니다. 살검회는…… 사천의 작은 살수 문파인데 어쩌다 쫄딱 망해서…….”
“뭐가 쫄딱 망해? 내가 다시 뻣뻣하게 세울 건데!”
도수가 호기롭게 소리쳤다.
암군이 담담한 미소를 머금고 도수의 어깨를 콱 잡았다.
“생각 있느냐?”
“네? 다, 당연히…….”
“고생 좀 할 텐데?”
“괘, 괜찮습니다!”
“좋다, 허락한다.”
“아아! 아버지! 어머니! 드디어 제가…….”
순간 도수의 두 발이 땅에서 떨어졌다. 그의 얼굴은 세상을 모두 얻은 표정이었다.
주석하는 진심으로 암군에게 감사했다. 자신에게 독문 무공을 알려준 것도 고마웠지만 친구인 도수를 거두어준 것은 더 고마웠다.
이래저래 도수에게 마음의 짐을 느끼던 차였다.
무려 흑도팔군이 아닌가. 그런 자가 도수를 받아줬으니 이제부터는 도수 본인의 노력으로 미래가 결정될 것이다. 물론 도수가 잘 해내리라고 그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
어쩌다 보니 도수를 암군에게 떠넘기고 주석하는 혈혼도객과 유비연, 녹윤영과 함께 호북을 벗어났다.
날은 저물었고 산길이 계속됐다. 오늘은 오랜만에 노숙할 처지인가 보다.
주석하는 품속에 손을 넣었다. 은자가 수북하게 손에 잡혔다. 비마표국에서 표행이 끝나고 받은 돈이다. 돈이 있는 데도 쓸 수가 없다. 야산에서 돈으로 먹거리나 잠자리를 얻을 방법이 없으니.
“음, 혹시 육포 있어요?”
주석하의 시선이 유비연을 향했다.
녹윤영은 그런 것을 준비해서 가지고 다닐 여자가 아니다. 혈혼도객은…… 갖고 있었으면 이미 녹윤영에게 다 빼앗겼겠지.
유비연의 눈썹이 쓱 올라갔다.
“벌써 몇 개짼지 알아요?”
“배가 고픈데 어떡해요?”
배가 고픈 것은 생리현상이지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극구 항변했으나 유비연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나중에 갚아요! 두 배로!”
유비연이 꼭꼭 숨겨둔 육포 한 조각을 그에게 넘겼다.
주석하의 입술이 쓱 벌어졌다. 유비연은 겉보기와 비슷하게 마음이 여리다. 정파라서 그런가 생각해보았으나 꼭 정파이기 때문은 아닌 듯했다. 아마도 천성이 모질지 못할지도.
어쨌든 그녀가 맨 뒷짐이 궁금했다. 목숨을 걸고 사수하는 저 행낭 속에는 별별 물건이 다 들어있었다. 한번은 육포를 찾으려고 행낭을 뒤지려 했다가 맞아 죽을 뻔하기도 했다.
“오늘은 어디에서 자죠?”
“더 가면 주막 나와요.”
“헉, 그래요? 육포 괜히 먹었네. 어쩜 그렇게 길을 잘 알아요?”
“으구, 여기 갔던 길이잖아요!”
유비연의 비난에 주석하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가 보기에는 다 그 길이 그 길처럼 보였다. 어릴 때부터 덕양에만 머물다 보니 그의 머릿속에서 길은 두 종류로 이분화되어 있었다. 덕양과 비슷한 길, 덕양과 다른 길.
산길을 헤치고 반 시진가량 가니 주막이 나타났다.
주막의 면면을 접한 주석하도 기억났다. 비마표국을 따라 이곳에서 저녁을 먹다가 무려 신창패존과 귀군을 만났었다.
이 주막을 다시 들리게 될 줄이야. 이름도 없는 낡은 주막인데 요지에 있어서 두 번째 들리게 됐다. 요지에 있으니 다른 손님도 많아야 정상인데 그날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손님이 거의 없었다.
“여기에서 밥 먹고 자고 가죠.”
유비연의 제안에 모두가 찬성했다.
그들이 주막에 들어가니 주인장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주인장도 그날의 일을 기억하는 듯했다. 그리고 방금 들어온 주석하 일행이 그날 이곳에 숙박했던 사람들이란 것까지.
무려 하룻밤 새 몇 사람이 죽어 나갔으니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눈치를 녹윤영이 바로 알아챘다.
“아저씨, 오늘 또 일 터질까 봐 겁내시는 거예요?”
“아, 아닙니다.”
상대가 무림인인 것을 알기에 주인장은 몸을 사렸다. 부딪쳐봐야 손해임을 경험으로 터득한 그는 손님이 조용히 머물고 떠나주기를 바랄 뿐이다.
“그럼 따뜻한 국수나 한 그릇씩 주세요. 모두 사 인분요.”
녹윤영이 제일 먼저 의자에 걸터앉으며 주문했다. 주석하를 비롯한 일행은 곧바로 같은 탁자에 둘러앉았다. 오늘은 야영하지 않아도 되니 모두 안심한 분위기였다.
예상보다 시간이 더 걸려서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그들은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면서 식사를 했다.
오늘 굶지 않아도 되는 행운에 유비연을 제외한 사람들은 맛있게 국수를 들이켰다.
한창 먹고 있자니 유비연이 탁자 아래로 주석하의 허벅지를 툭 건드렸다.
“주 공자,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그녀의 목소리가 나직했기에 주석하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뭐가요?”
“주인장이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 보이지 않아요?”
“글쎄요.”
전생에서도 주석하는 그렇게 성격이 꼼꼼하지 않았다. 말단인 그를 누가 노릴 일도 없었고, 조심한다고 하여 해결될 문제도 아니었다.
유비연의 언질에 주석하는 한쪽 구석에서 그들을 살피는 주인장을 쓱 쳐다봤다. 주인장이 얼른 눈을 돌렸다. 어쩐지 사람이 불안정해 보였다.
주석하는 유비연의 눈썰미가 대단하다고 감탄하면서 그 이유를 생각해 봤다. 딱히 주인장과 그들 사이에 있을 문제는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갑자기 주막 문이 벌컥 열렸다.
“으악!”
유비연과 녹윤영이 비명을 질렀고 주석하와 혈혼도객은 미간을 찌푸리며 문 쪽을 바라봤다.
예상치 못한 인물이 문을 막고 있었다. 마치 그날처럼.
“패존? 당신이 어떻게?”
주석하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날 신창패존은 만리안석을 포기하고 도망치지 않았던가? 그것도 바로 이 주막에서. 그랬던 신창패존이 다시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컸다.
그날의 복수라고 하기엔 귀군이나 우설금이 없으니 모양새가 이상하다. 어쨌든 그를 노릴 이유는 만리안석 때문이 아니겠는가.
불현듯 품속의 만리안석이 떠오르자 주석하는 안절부절못했다. 도둑이 제 발 저린 형국이다.
“흐흐, 그때 그 인간들이 모여 있군.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렸다고? 주석하의 시선이 주인장을 향했다. 주인장이 후다닥 주방으로 들어갔다.
역시 주인장이 이상해 보인 이유가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의 도착을 주인장이 알린 건가? 아니면 뭔가 딴짓을 한 건가.
신창패존이 거대한 창을 앞세우고 걸어 들어와서는 그들의 맞은편에 의자를 꺼내고 앉았다. 그의 기세에, 그의 몸집에 비해 의자가 정말 작아 보였다.
“당신은 왜 여기에? 어?”
무심코 일갈하던 녹윤영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그녀의 안색이 심각해지더니 다른 사람을 바라보며 호소했다.
“내…… 내공이 모이지 않아.”
유비연과 혈혼도객도 놀라서 운기를 시도했으나 마찬가지였던 듯 안색이 새파래졌다.
“음식에 산공독이 들어있었어.”
녹윤영의 서릿발 날리는 시선이 주인장을 찾았다. 당연히 사라지고 없었다.
“어쩐지 주인장이 이상하더라니…….”
유비연도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모두 산공독에 중독되어 내공을 사용할 수 없었다.
정작 주석하는 아무런 증상이 없었다.
그가 섭취한 산공독은 몸에 들어오자마자 독군의 내력에 의해 순식간에 소멸했다. 독암쌍로의 무형지독은 매우 독하여 급하게 단전의 내력을 격발시켰다. 그 덕에 주석하도 그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반면 산공독은 매우 약한 독이었기에 독군의 내력은 주석하가 모르는 사이에 저절로 치유하고 순식간에 다시 잠들었다. 그 바람에 주석하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당신인가요?”
녹윤영이 화가 나서 신창패존을 노려봤다.
“으하하, 그렇다.”
“정파십존인 당신이 이런 짓을 벌이다니! 사람들의 이목이 두렵지 않나요?”
“전혀. 난 정파의 승리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가리지 않는다. 사파인이 거리낌 없이 사용하는 수단을 나라고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신창패존의 시선이 녹윤영에서 주석하에게 넘어왔다.
“네놈…… 이름을 모르겠다만…… 넌 지금 산공독에 중독되어 내공을 사용할 수 없다. 내 질문에 순순히 답하라. 그러면 네놈도 또 네 동료도 살려주겠다.”주석하는 신창패존의 막무가내에 비웃음을 지으며 묵묵히 상대를 쳐다봤다.
“그 물건은 어디에 있느냐?”
역시 목적이 만리안석이다.
“그날 전투 중에 부서진 것 아니오?”
“거짓말!”
신창패존이 버럭 소리쳤다. 그의 분노가 주막 내부를 강타하며 탁자와 의자가 진동을 일으켰다.
무시무시한 눈초리로 신창패존이 윽박질렀다.
“내가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 봤다. 처음 내가 손에 넣었을 때는 그 물건이 확실히 있었어. 그런데 마지막으로 그 붉은 옷 여자의 손에서는 빈 주머니였지. 그럼 누가 가져갔겠나? 바로 너뿐이야. 좋은 말로 할 때 내놓아라!”
“벌써 좋은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주석하는 동료들을 확인하며 빈정거렸다.
“이놈이! 네놈이 말할 때까지 한 사람씩 죽여주마! 누가 좋을까? 저 여자부터? 혼군의 손녀라고?”
신창패존의 장창이 녹윤영을 가리켰다.
녹윤영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주석하는 가소롭다는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 자신이 없으니 비열한 수단을 썼구나!”
“이놈! 자신이 없다니! 단지 네놈의 입을 열기 위해 이 방법을 썼을 뿐이다. 네놈 따위는 산공독 없이도 충분히 요절낼 수 있다!”
신창패존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급변했다.
유비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날도 저랬었다. 최근에 정파십존의 민낯을 너무 자주 접했다. 그녀가 지금까지 지켜온 정파인의 긍지가 송두리째 사라졌다.
“패존! 당신은 사람을 잘못 골랐다!”
주석하는 옆에 놓아둔 흑검소를 집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