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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검천하-93화 (93/273)

93화 패존과 불존 (1)

무한회귀공의 영향으로 회귀한 주석하가 선천적으로 싫어하는 것이라면 남에게 휘둘리는 인생이다. 전생에서 정파 사파 양쪽으로 휘둘리고, 마교의 칼받이가 되면서 인생의 주도권을 쥐어본 적이 없었다.

그가 신창패존에게 분노한 이유는 산공독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는 정파도 사파만큼 충분히 이기적이며 사악하다는 사실을 안다. 과거에 숱하게 경험했던 일이다. 다만 겉으로 드러나는 정파의 행동은 항상 의(義), 협(俠)으로 위장되어 있어서 사람들을 현혹한다는 것도.

지금 이 순간이 그를 화나게 한 이유는 산공독을 사용해서 동료를 제압하고 인질로 사용해서 그를 휘어잡으려 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에서건 그는 이런 식의 전개를 혐오했다.

만일 신창패존이 무림에 알려진 것처럼 당당하게 그에게 도전해왔다면 그는 만리안석을 걸고 비무 대결을 벌일 수도 있었다.

주석하가 흑검소를 손에 잡자 신창패존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산공독에 중독되지 않은 건가?’

물론 신창패존은 주석하를 흑도팔군 만큼 높이 보지 않았다. 정당하게 싸워도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굳이 산공독을 동원한 이유는 만일을 대비하고 주석하의 입을 열기 위해서다.

동료를 위협하면 주석하가 그 물건의 행방을 말할 줄 알았다. 그런데 오히려 분노해서 발끈했다.

지금 신창패존의 선택은 둘 중 하나였다. 동료를 먼저 제압해서 원래의 계획을 고수하거나 아니면 범 무서운 줄 모르는 저 녀석을 때려잡거나.

흑검소를 들고 공격 태세를 취한 주석하를 노려보며 신창패존은 녹윤영에게로 신형을 미끄러트렸다. 주석하의 저 행동은 거짓이며 실제로는 산공독에 중독되어 전혀 위력이 없으리라고 추측했다. 일단 혼군의 손녀로 위협한다면…….

그렇게 결정하고 녹윤영에게 손을 뻗는 순간,

쐐액-

주석하의 흑검소가 벼락처럼 신창패존을 찔러 갔다.

예상치 못한 공격은 강했다. 그것도 무려 흑검소에서 뻗어 나온 검강이 무방비 상태의 신창패존을 노렸다. 놀랍게도 주석하는 산공독에 중독되지 않았다.

“헉!”

신창패존은 녹윤영을 향해 뻗었던 손을 거두어들였다. 이대로 녹윤영을 잡았다가는 팔이 잘릴지도 모른다. 동시에 그는 장창으로 방어 태세를 구축하면서 몸을 틀어 흑검소의 검기를 흘렸다.

서걱-

아슬아슬하게 검기가 신창패존의 왼쪽 어깨를 스쳤다. 별것 아니었으나 꽤 깊이 상처가 파고들어 순식간에 어깨를 붉게 물들였다. 장창을 쥔 오른손이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피하는 데도 일가견이 있구나!”

패존이 수습하기도 전에 주석하는 조롱을 보내며 발을 박찼다. 그의 신형이 허공으로 가르며 재차 신창패존을 향해 검기를 쏘아냈다.

콰직-

신창패존은 앞뒤 가릴 것 없이 장창으로 검기를 막았다. 묵직한 충격이 창을 통해 전달됐다.

그때도 경험했던 주석하의 무공이지만 일대일 상황이 되자 확실하게 능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혼군에 못지않다!’

신창패존은 주석하를 경시하는 마음을 버렸다.

공세를 날린 주석하의 공격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마치 검처럼 흑검소를 휘두르면서 퉁소에서 뻗어 나온 검강으로 신창패존을 노렸다.

“독이 안 통하다니!”

수세에 몰렸다고 생각한 신창패존이 분노를 터트리며 힘껏 장창을 횡으로 그었다. 그에게 수세란 받아들일 수 없는 굴욕이었다.

장창에서도 강기가 폭발했다. 창강이 주석하를 벼락처럼 스치고 주변 기물을 갈랐다. 주막 입구가 와르르 무너졌다.

예전처럼 주석하는 주막을 보호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주인장이 그들을 중독시킨 장본인이었으니 주막이 부서지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순식간에 장창과 흑검소에서 뿜어진 강기에 의해 주막 지붕과 벽이 날아갔다. 자연스럽게 주석하는 넓은 공간을 훨씬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즉 화존의 보법을 활용할 여건이 마련됐다.

“패존! 오늘 넌 이곳에서 살아갈 수 없다!”

경고와 함께 흑검소에서 무지막지한 검강이 뿜어졌다.

“내가 할 소리다!”

신창패존의 장창에서도 창강이 길게 뻗어 나와 공기를 갈랐다. 무공이 신의 경지에 이른 자가 아니면 펼칠 수 없는 대접전이 펼쳐졌다.

흑검소의 검강과 화존의 백변환영보의 조합은 막강했다. 검강은 중후와 예리함을 상징했고 백변환영보는 빠름과 변화를 의미했다.

“네놈은 건드리지 말아야 할 사람을 건드렸다! 패존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별 볼 일 없는지 확인시켜주마!”

감히 누가 흑도팔군 앞에서 이런 소리를 할 수 있을까.

신창패존은 지금까지 이처럼 무례한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는 상대가 미치지 않았는지 의심해야 했다.

푸아악-

검강이 순식간에 신창패존의 전면을 갈랐다.

콰앙-

신창패존의 창강이 검강을 파괴하면서 충격파가 번졌다. 여전히 신창패존은 공격의 주도권을 잡지 못했다.

백변환영보를 펼치는 주석하는 빨랐다. 신창패존의 전면에서 번뜩이던 흑검소가 어느 틈에 측면으로 돌았다. 그의 발은 보이지 않고 신형도 점차 흐릿해졌으며 남은 것은 흑검소가 만들어낸 환영뿐이었다.

그 환영이 사방에서 신창패존을 엄습했다.

“빠르다!”

신창패존도 감탄했다. 예전의 주석하는 이렇지 않았다. 그때는 혼군의 무공을 꽤 잘 쓴다는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은 무공의 결이 완전히 달라졌다.

“대체 무슨 무공이!”

장창으로 백변환영보를 따라잡을 수 없자 신창패존은 속절없이 밀리기 시작했다. 그는 화존과 겨뤄본 적이 없었다. 같은 정파십존이었으니 싸울 일도 없었던 데다 화존의 무공을 높이 치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화존의 보법에 대해 거의 지식이 없었다. 당연히 지금 주석하가 펼치는 보법이 화존의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서걱-

이번에는 옆구리로 검강이 들어와 베고 지나갔다.

신창패존은 점점 분노가 극에 달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애송이가 그를 괴롭히니 치솟는 분노가 오히려 행동에 지장을 줄 지경이었다.

예상과 달리 열세가 계속되자 신창패존은 전의를 가다듬었다. 그는 패배라는 단어를 떠올려본 적이 없다. 아직 그는 절기를 제대로 꺼내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아낄 시점이 아니었다.

“이노옴! 네놈을 창으로 찢어발기리라!”

단단하게 두 발을 지면에 고정하고 창을 든 팔이 크게 회전을 그리면서 사방으로 창강을 쏟아냈다.

뇌전무적신창(雷電無敵神槍)!

그를 정파십존에 올려놓은 절정의 창법이다. 그 위력이 산을 가르고 강물을 거슬러 그를 패존이라 불리게 했다. 그 패도적인 기운이 밀물처럼 주석하에게 몰려갔다.

마치 거대한 공간이 일그러져 압박하는 기분 속에 주석하는 이를 악물었다.

지금까지 내공이 아닌 초식으로 이만큼 그를 압박했던 순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정파십존이나 흑도팔군이 전력을 다해 쏟아내는 공세를 그는 처음으로 맞이했다.

당연히 주석하도 절정의 초식에 맞서 혼군의 내력을 끝까지 끌어올렸다.

힘에는 힘으로 맞선다. 비록 상대가 패도(覇道)로 이름 높은 패존일지라도 힘에서 밀리기는 싫다. 그렇기에 보법으로 피하지 않고 맞섰다.

패존의 힘에 맞설 마땅한 검법 초식은 없다. 주석하는 흑검소에 모든 기력을 불어넣은 채 흑검육식을 펼쳤다.

콰아아앙-

과연 뇌전무적신창이었다.

창과 흑검소가 엉키며 공간을 터져나가고 충격파가 주변을 휩쓸었다. 주막은 무너진 지 오래였다. 주석하의 동료들은 공전절후의 격투에 몸을 피하기 급급했다.

“허접한 그 초식은 뭐냐?”

달리 패존이 아니었다.

신창패존은 흑검소를 힘으로 찍어 누르며 창으로 전장을 압도했다. 창에서 뿜어지는 창강이 태산처럼 검강을 억눌렀다.

주석하는 당연히 이 결과를 예상하고 있었다. 신창패존의 무지막지한 위력은 강호에서도 이름이 높다. 비록 그가 혼군의 내력을 무리해서 사용한다고 해도 마땅한 초식이 없는 검강으로는 절대 버티기 어렵다. 흑검육식은 검강을 고려해 고안한 초식이 아니었다.

흑검소가 날렵하게 장창을 흘렸다. 물이 흐르듯 매끄러운 응수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흑검소가 벼락처럼 앞으로 뻗었다.

번쩍!

암군에게서 배운 일검필살의 초식, 암천살검이 펼쳐졌다.

뇌전무적신창이 하늘을 덮을 위력을 지녔다면 암천살검은 흑야를 가르는 번개처럼 오직 한 곳에 위력을 집중한다.

그 둘은 초식의 개념이 다르다. 목적이 다르니 결과도 다르다.

장창을 크게 휘둘러 상대를 압도하는 순간 신창패존은 허를 찌르고 들어오는 주석하의 흑검소에 당황했다.

“암군?”

그는 이 초식이 암군의 무공임을 바로 알아봤다. 상대가 혼군의 제자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암군의 무공이 펼쳐지자 적잖게 당황했다.

정파십존의 위명은 헛것이 아니다. 그의 대응은 빨랐다. 장창을 회수할 시간이 부족하다고 직감한 그는 재빨리 상체를 눕히며 흑검소의 검강을 흘렸다. 동시에 남은 한 손으로 접근해온 주석하의 완맥을 잡아챘다.

주석하의 흑검소가 변화를 일으켰다.

암천살검의 두 번째 초식이 빛의 속도로 펼쳐졌다.

달리 자객에 특화된 검법이 아니다. 주석하의 첫 번째 초식은 상대의 빈틈을 찔렀고 두 번째 초식은 이에 대응하는 상대의 응수를 무력화했다.

흑검소의 움직임이 너무 빨랐기에, 암천살검이 보이지 않았기에 신창패존은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창으로 막을 수 없자 신창패존은 흑검소가 검이 아닌 퉁소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흑검소 주위를 검강이 감싸고 있지만 이는 자신의 호신강기로 대응 가능하다고 봤다.

그의 판단은 빨랐다. 가슴을 찔려 치명상을 입을 수는 없기에 신창패존은 흑검소를 손으로 막았다.

콰앙-

검강과 호신강기가 만나면서 발생한 충격파를 뚫고 신창패존은 흑검소를 손으로 붙잡았다. 손가락이 찢어질 것 같은 충격이 엄습했으나 목숨을 건 싸움에서 이런 손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흑검소를 잡아당기면서 다른 손에 든 창을 버리고 주석하의 목을 쥐어갔다.

주석하도 목을 노리는 신창패존의 공격을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그는 흑검소를 쥐지 않은 다른 손으로 상대의 공격을 막았다.

쿵-

두 손이 맞부딪치면서 서로 엉켰다.

흑검소를 양쪽에서 잡은 채 두 손 역시 맞부딪친 국면으로 바뀌었다.

신창패존의 입가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네놈은 끝이다!”

이런 하룻강아지는 내공으로 짓밟는다! 나이 어린 주석하의 공력이 패존이라 불리는 그를 어떻게 감당할까. 승리를 확신한 신창패존은 내력을 총동원해서 주석하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신창패존에게 가장 확실한 수단이었다. 내공이란 절대 나이를 무시 못 하는 법 아니던가. 어떤 초식을 익혔는지 알 수 없는 상대를 완벽하게 제압할 방법이었다.

당연히 이런 식의 내공 대결은 주석하도 환영하는 바였다. 그가 암천살검을 펼치며 신창패존의 이런 반응을 유도한 이유도 내공 대결의 승리를 확신하기 때문이었다.

먼저 신창패존이 주석하를 압박하면서 기세를 올렸다.

“하룻강아지 같은 놈!”

“강아지가 아니라 호랑이거든!”

고오오오-

주석하의 기운이 되살아났다.

신창패존은 처음에 다친 어깨가 부담으로 작용했다. 전력을 다해 힘을 쓰다 보니 부상이 악화하여 혈맥이 터졌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패존! 하늘 위에 하늘이 있음을 보여주리니!”

주석하의 섬뜩한 경고가 잇달았다. 이는 과거에 신창패존이 강호를 누비면서 사파인을 처단할 때 자주 쓰던 외침이었다.

주석하를 얕잡아 보았던 신창패존은 강력한 기운이 압박하자 당황했다. 상대의 내력은 절대 자신의 아래가 아니었다. 게다가 이런 내력 대결에서는 싸움을 피하거나 빠져나갈 수도 없다.

막다른 길이었다. 그 길 끝에는 삶 아니면 죽음만이 존재한다.

“오늘 정파십존은 정파구존이 될 것이다!”

오만한 일성이 신창패존의 머릿속을 깨웠다. 이렇게 된 이상 신창패존도 목숨을 걸었다.

내력 다툼에 주석하의 단전이 들끓기 시작했다. 혼군의 내력이 온 힘을 다하는 가운데 남은 네 기운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고오오오-

어마어마한 기운이 주석하의 양손에서 발현되기 시작했다. 이는 신창패존의 죽음을 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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