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패존과 불존 (2)
신창패존은 자신이 내력이 밀리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정확한 서열을 매길 수 없으나 현 무림에서 최고의 내공을 지난 자는 소림사의 기인인 반야불존(般若佛尊)이 꼽혔다. 흑도팔군에서는 극양진기를 가진 염군(炎君)이 최강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이 둘을 빼면 내공 면에서 그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다고 자부했던 신창패존이었다.
그런데 지금 정파십존도 아니고 흑도팔군도 아닌 애송이에게조차 내공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있었다. 우위가 아니라 오히려 밀리는 국면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신창패존은 눈을 부릅뜨고 더욱 내공을 뽑아 올렸다. 마주 잡은 흑검소도 서로 맞댄 손바닥도 꼼짝하지 않았다.
보면 볼수록 눈앞의 상대는 기이했다. 혼군의 무공을 사용하는 줄 알았는데 암군의 무공을 사용했다. 거기에 내공은 대체 무슨 영약을 먹었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을 수준이다.
애초에 오늘 싸움에서 이렇게 악전고투를 벌일 줄 신창패존은 생각지 않았다. 산공독을 쓴 이유도 상대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입을 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상대는 산공독마저도 가뿐하게 넘어섰다. 도무지 이해불가인 자였다.
머릿속이 복잡했으나 지금 고민할 여유는 없었다.
균형을 이루던 내공 대결이 갑작스럽게 역전됐다. 주석하의 어마어마한 내력이 일순간에 패존을 짓눌렀다.
이는 단전에 잠자던 다른 유형의 내공이 잠을 깬 결과였으나 신창패존이 알 수는 없었다. 그는 압도적인 내력이 밀려오자 속수무책이 됐다.
버티는 두 다리가 지면으로 파고든다. 하늘이 무너지는 중압감이 전신의 혈맥을 터트렸다. 무시무시한 내력의 밀물이 내부 혈맥을 순식간에 쓸었다.
콰앙-
마치 거대한 태풍에 휘말리듯 강력한 반발력이 강타하며 신창패존은 속절없이 튕겨 나갔다.
당연히 내상이 기를 흩트리고 참을 수 없는 비릿한 핏물이 목구멍을 넘어왔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지.’
밀리는 순간 신창패존은 장창을 움켜잡았다. 설사 바로 공격으로 전환하기는 어려울지라도 이 장창은 상대의 공격을 방어할 태세를 갖춰줄 것이다.
뒤로 날려가면서 가까스로 몸의 균형을 잡은 신창패존이 창을 꾹 쥐는 순간이었다.
번개보다 빠르게 주석하의 암천살검이 펼쳐졌다.
속도를 중시하는 검초의 특성이 유감없이 발휘되어 신창패존은 미처 창으로 방어할 수 없었다. 흑검소의 검강이 신창패존의 약해진 호신강기를 깨고 들어갔다.
푹-
번개보다 빨랐다. 흑검소에서 뻗은 검강이 신창패존의 가슴을 꿰뚫었다.
주석하가 그토록 빨리 검강을 사용할 수 있을지 몰랐던 신창패존은 경악했다. 상대는 내력이 마르지 않는 괴물이었다.
내력 대결에서 완승하는 순간, 혼군의 내력이 거의 소모되었다고 생각한 주석하는 다룰 수 있는 다른 진기를 쏟아냈다. 바로 악군의 것이다. 마지막 기회란 생각에 모든 내력을 흑검소에 쏟아부었다.
악군의 내력은 흑검소의 검강을 형성하고 신창패존의 호신강기를 깼다.
그것으로 긴 싸움이 끝났다.
가슴에 뚫린 구멍에서 피 분수를 뿜어내며 신창패존은 빠른 속도로 무너졌다. 장창을 지팡이 삼아 몸을 기대려 했으나 그마저 여의치 않았다.
“이, 이놈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결과에 분노한 신창패존이 입으로 피를 뿜으며 주저앉았다.
“패존은 오늘부로 존재하지 않는다!”
주석하는 포효했다.
그 순간 주석하의 마지막 일검이 폭발했다. 흑검소의 검기가 다시 신창패존의 가슴을 갈랐다.
쿵!
신창패존이 쓰러졌다. 정파십존의 일인으로 현 무림 최강고수라 불리던 패존이 마침내 운명을 달리한 것이다. 그것도 강호의 무명이라 할 수 있는 주석하의 손에.
주석하는 머리가 핑 돌았다. 패존과의 내력 싸움으로 혼군의 내력은 사실상 바닥을 드러냈고, 악군의 내력도 암천살검을 펼치느라 소모가 극심했다. 다른 내력은 위험이 사라진 지금 단전으로 돌아갔다.
힘이 빠진 주석하는 몸을 세우기 힘들었다.
흑검소로 주석하는 간신히 몸을 지탱했다. 힘든 싸움이었다. 혼군의 무공을 조금 더 자유롭게 쓸 수 있었다면, 암군의 살검이 조금 더 완벽했더라면 이보다 쉽게 상대를 제압했을 것이다.
“허허허!”
주석하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무슨 욕심인가. 무려 정파십존을 죽였는데. 지금 그의 나이에 이 결과를 완벽하지 못했다고 자책한다면 너무 큰 자만이 아닌가.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많은 만큼 그가 성장할 여지도 충분히 남아 있다.
비록 오늘은 무공이 어설플지라도 내일은 더 완벽해질 것이니.
긴장했던 맥이 탁 풀렸다.
너무 무리했나? 동료들이 위험하다는 생각에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들었고 패존이라면 자칫 패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를 이렇게 몰아쳤다. 이제 끝을 봤다는 생각에 피곤이 쏟아졌다.
그는 옆을 돌아봤다.
녹윤영과 유비연이 그를 부축하려고 달려왔다. 그 뒤로 혈혼도객이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는 거다.
온몸에서 힘이 쭉 빠지고 눈이 감겼다. 주석하의 몸이 아래로 무너졌다.
***
유비연이 먼저 넘어지는 주석하의 몸을 받쳤다.
“주 공자!”
내공이 사라졌어도 한 사람을 붙잡을 힘은 있었다. 그녀의 품에서 주석하는 마치 정신을 잃은 듯 흐느적거렸다.
산공독에 중독된 그들을 위해, 설사 내공을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해도 그들이 패존을 상대할 수 없었겠지만, 주석하가 홀로 신창패존을 막았다. 처음 싸움을 시작할 때만 해도 유비연은 주석하의 생존을 염려했다.
주석하의 무공을 여러 차례 봤고 무공이 대단히 높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상대는 무려 정파십존이다. 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놀랍게도 그게 뒤집혔다. 문제는 왜 뒤집혔는지 모른다는 거다. 그동안 그녀도 주석하를 쫓아 함께 다녔다. 그런데도 언제 그가 이토록 강해졌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지고 있었다. 상상하기 힘들 만큼 빨리.
그 결과 오늘은 마침내 무림의 정점이라는 정파십존을 꺾었다.
‘주 공자가 회귀자인가?’
순간적으로 만사지존과 사부의 당부가 떠올랐다. 회귀자를 찾아야 한다고. 다만 주석하가 강해지는 형식은 회귀자가 드러낼 방식과는 어딘지 달랐다.
그녀가 주석하를 붙잡고 고민에 잠겼을 때 누군가가 그녀의 품에서 주석하를 확 낚아챘다.
“놔!”
녹윤영이 적의 어린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이가 없어 유비연은 순순히 주석하를 넘겨줬다.
녹윤영이 주석하를 끌어안고 흐느꼈다.
“우리 때문에…… 우리 때문에 너무 무리해서…….”
“시간이 지나면 깰걸?”
산통 깨지 말라고 녹윤영이 그녀를 째려보고는 다시 주석하를 감싸 안았다.
녹윤영의 품에서 잠이든 주석하가 편해 보여 유비연은 걱정을 덜었다.
유비연은 주변을 둘러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주막이 파손되어 오늘 밤에 잘 곳이 사라졌다. 꼼짝없이 길바닥에서 야영해야 할 판이다.
주인장을 보니 완전히 얼이 빠져 있었다. 장사가 망했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주인장 때문에 산공독에 중독되었다는 생각이 들자 연민은 사라졌다.
“이슬을 피할 바위라도…….”
깨진 더미를 피해 걸음을 내딛던 유비연은 기이한 압박감에 걸음을 멈추었다.
주막을 넘어 산길 저 먼 곳에서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내공이 느끼는 감각이 아니었다. 무의식적인 오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 그 정체가 확인됐다. 가사를 걸친 스님이었다.
한 손에 선장을 들고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스님을 본 순간 유비연은 보통 인물이 아님을 직감했다. 짐작이 어려울 만큼 나이가 많은 이 스님은 분명 무림인이었다. 그것도 은연중에 풍기는 기운으로 보아 절대 평범하지 않았다.
“아미타불.”
도착한 스님이 합장하며 나지막이 불호를 외웠다. 선장을 쥐지 않은 다른 손에는 백팔염주가 잡혀 있었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유비연은 다급하게 스님의 앞을 막아섰다.
“소림에서 오셨습니까?”
정작 스님은 대답하지 않고 바닥에 쓰러진 신창패존과 녹윤영의 품에 안긴 주석하를 번갈아 쳐다봤다.
“아미타불, 업보로다…….”
“누구십니까?”
유비연이 다시 물었다. 이번에는 그녀의 목소리가 약간 높아졌다.
“아미타불, 지금 시주께서 안고 있는 자가 주석하란 중생이오?”
갑자기 지목받은 녹윤영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런데요?”
“그자가 여기 신창패존을 죽인 게 확실하오?”
“신창패존이 먼저 덤볐어요.”
“아아! 소승이 한발 늦었습니다. 아미타불.”
스님이 연신 불호를 외며 염주를 돌렸다.
스님은 외부로 전혀 기를 흘리지 않았으나 유비연은 숨이 막힐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 강호에서 이런 위압감을 주는 스님이라면 그 수는 많지 않다. 소림의 방장이거나 아니면 장로급이거나. 그렇지 않다면 소림의 전대 장로이자 소림 신승으로 불리는…….
유비연은 눈을 번쩍 떴다.
“반야불존이시군요.”
“여시주의 식견이 참으로 대단하외다.”
정파십존 가운데에서도 지고무상의 지위를 가진 유일한 사람을 꼽으라면 바로 반야불존(般若佛尊)이다. 소림이라는 배경도 배경이지만 그의 무공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사실상 현 정파의 기둥이었다.
경계심을 가졌던 유비연은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래도 소림의 고승 아닌가. 신창패존처럼 경우가 없지는 않을 테니까.
“그 시주를 소승에게 넘겨주시겠습니까?”
“네?”
놀란 유비연과 달리 녹윤영은 주석하를 더욱 끌어안으며 경계심을 끌어올렸다.
“안돼요.”
불존의 주름진 얼굴에 은은한 노기가 서렸다. 눈처럼 하얀 백미와 길게 늘어진 수염이 작은 진동을 일으켰다.
심상치 않은 사태에 유비연이 정중하게 물었다.
“무엇 때문에 그러십니까?”
“그는 존재하지 말아야 할 자요. 그의 존재는 강호에 이롭지 않습니다. 아미타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여시주께서는 알 것 없습니다. 이는 부처님의 뜻이니.”
알듯 모를 듯 선문답에 유비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평소 불존의 위명을 많이 들었습니다. 지금처럼 후배를 핍박하는 분은 아니라 들었습니다.”
“핍박이 아닙니다. 시주들도 천리에 순응하시란 뜻이지요.”
녹윤영이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절대 안 돼요. 패존은 주 공자에게서 뭔가를 알아내려고 했어요. 당신도 그런가요?”
“아미타불, 출가자는 물욕이 없습니다. 소저는 누구십니까?”
“전 혼군의 손녀인 흑접이에요.”
“전 검존의 제자인 설매검화입니다.”
“아미타불, 혼군과 검존이라…… 특이한 조합이로다…….”
불존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불호를 외웠다. 두 사람의 신분이 남달라 고민에 잠긴 것처럼 보였다.
“대체 그를 데려가서 어쩌시려는 거지요? 죽일 건가요?”
“불자는 살생하지 않습니다. 아미타불.”
고개를 갸웃거리는 유비연과 달리 녹윤영은 강하게 반발했다.
“거짓말하지 마! 존재하지 말아야 할 자라며? 주 공자는 강호에 해를 끼친 적이 없어!”
불존의 인자한 얼굴이 급격히 굳었다.
그가 손을 허공에 젓자 주석하의 몸이 둥실 떠올랐다. 녹윤영이 잡으려 했으나 내력이 없는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설사 내력이 있다고 해도 불존을 상대로는 어떤 방해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녹윤영과 유비연이 어찌할 틈도 없이 주석하의 몸이 불존의 앞에 떨어졌다. 주석하는 잠에 빠져 있었다. 과다한 내력 소모가 만들어낸 몸 상태였다.
불존은 유비연에게 먼저 언질을 줬다.
“소승에게 이 일을 부탁한 사람은 만사지존과 자하검존입니다.”
“사부님이요?”
“그를 제거하거나 무공을 폐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미타불.”
“그럴 리가…….”
유비연이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불존이 주석하의 맥문을 잡았다.
불존이 눈을 감고 주석하의 몸 내부를 관조하기 시작했다. 현재 주석하의 몸에는 혼군과 악군의 기운이 맹렬하게 일주천 하며 내공을 회복하고 있었다. 반면 다른 세 기운은 단전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이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