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패존과 불존 (3)
불존은 말로 설명하기 힘든 기이한 현상에 연신 불호만 외웠다.
사태를 주시하며 발을 구르던 유비연이 다급하게 물었다.
“주 소협에게 무슨 일이 있나요? 그의 목숨이…… 위험한가요?”
불존에게 잡혔으니 위험하긴 하다. 더구나 불존은 주석하 제거 의사를 숨기지 않았다. 다만 유비연의 염려는 다른 부분이다. 신창패존과 싸운 후 주석하가 맥없이 쓰러졌기 때문이다.
“그렇진 않습니다. 아미타불.”
불존은 흥미로운 시선으로 주석하를 찬찬히 관찰했다. 눈을 감은 준수한 얼굴이 반듯했다. 제갈휘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그는 이 청년이 악하다고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영준하고 정기가 흐르는 이 인상이 어떻게 강호를 어지럽히는 악한이란 말인가.
차라리 여인을 후리는 호색한이라면 또 모를까. 예상외로 눈을 감은 주석하의 표정이 편안했다.
“과연 패존을 누를 공력이로다. 아미타불.”
불존은 주석하의 혈맥을 맹렬하게 휘도는 혼군과 악군의 기운을 가늠했다. 그 각각이 패존에 버금가는 엄청난 양이었다. 한 사람에게 서로 다른 성질의 기운이 존재할 수 없다. 더구나 이 자의 단전에는 의문의 다른 기운마저 잠자고 있다.
불존의 이맛살이 찌푸려지며 주름살이 깊게 팼다.
이 전대미문의 괴사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는 주석하가 두려워졌다. 몸속의 엄청난 기운을 모두 자유롭게 운용한다면 이자는 고금제일인이 될 것이다. 불가능이라 생각하지만 어쩌면 이루어질지도. 그런데 제갈휘는 이자를 악인으로 단정했다. 정파에 해가 되기에 살려두어서는 안 된다고.
불자는 살인하면 안 된다. 이는 무림인인 불존에게도 적용된다. 물론 무림에 몸을 담고 있다 보니 피치 못해 살인한 적은 있다. 하지만 지금처럼 전혀 반항할 수 없는 이를 대상으로 살수를 쓸 수는 없다.
그렇게 핑계 대고 있지만 정작 불존이 머뭇거리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는 구도자이고 그렇다 보니 내공에 심취했다. 그가 쌓은 내공은 당대 제일이다. 내공의 깊이뿐만 아니라 연구 분야로도 내공을 깊이 다뤘다.
지금 눈앞에 있는 주석하는 훌륭한 연구 대상이었다. 흑도인이 아니라면 곁에 두고 관찰해보고 싶었다.
“인연이…… 아닌가 보구나. 아미타불.”
불존은 고개를 저었다. 그도 주석하가 선량한 내면을 가졌음을 눈치챘다. 이자는 강호의 위험인물이 아니다. 제갈휘가 그렇게 단정한 이유는 사파인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때문이겠지. 그도 오랜 경험으로 정파와 사파의 명분만의 다툼을 모를 리 없다.
그런 추잡한 싸움 때문에 꽃다운 젊은이를 죽이는 게 가당한 일인가. 염주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그도 정파에 속해있기에 군사인 제갈휘의 부탁을 저버리긴 어려웠다. 번뇌에 빠진 불존이 염주를 돌리면서 연신 불호를 외웠다.
유비연은 불존의 내심을 헤아리기 어려웠다. 지금 그가 주석하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녀의 옆에서 녹윤영이 긴장된 표정으로 불존을 주시했고 그 옆에서 혈혼도객이 도를 움켜잡았다.
“어쩔 수 없구나.”
불존이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맥문을 잡은 손으로 진기를 불어넣었다. 살생을 범할 수는 없다. 다만 이자가 계속 날뛰도록 내버려 둘 수도 없다.
젊은이의 단전을 폐하는 것은 너무 가혹하니 가용한 수단은 하나였다. 바로 내공을 쓰지 못하도록 단전에 금제를 가하는 것이다. 이 금제는 그보다 더 심후한 내력을 지닌 사람이라야 풀 수 있을 테니 현 강호에서 이 금제를 제거할 자는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결심을 굳힌 불존은 안면을 굳히며 주석하의 내력을 제압해 들어갔다.
유비연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눈치챘다.
“안돼요!”
그녀는 주석하의 몸을 붙잡으며 불존을 독하게 노려보았다.
“아미타불, 시주의 스승이 바란 일입니다.”
“그래도 절대 안 됩니다!”
“스승의 당부를 어길 생각입니까?”
“아무 잘못도 없는 주 공자를 죽일 수는 없어요!”
“살생이 아닙니다.”
“그에게는 죽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유비연은 주석하를 보호하듯 감싸며 불존을 향해 호소했다.
불존이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업보로구나. 이 젊은이의 관상과 혼군의 손녀라는 여인과 검존의 제자라는 여인의 태도를 보면 이 젊은이가 어떤 심성을 지녔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자를 제거해야 한다는 제갈휘의 걱정이 어쩌면 막연한 우려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더는 망설일 수 없었다. 살려두기에는 불확실성이 너무 크다. 주석하의 몸 상태가 급속히 호전되고 있어서 이 기회는 앞으로 다시 오지 않을 가능성이 크니까.
고오오오-
불존의 무한한 내공이 주석하에게 밀려가며 금제를 가하기 시작했다. 날뛰기 시작하는 맑은 기운과 음험한 기운을 제압해서 단전으로 돌려보냈다. 이 두 기운은 패존과의 결투에서 상당 부분 소모되었기에 제압이 어렵지 않았다. 적어도 불존의 엄청난 내력이라면.
불존은 조심스럽게 주석하의 단전을 자신의 기운으로 봉쇄하기 시작했다. 이 봉쇄가 완성되면 단전의 내공은 밖으로 나올 수 없고 주석하는 내공을 사용하지 못하는 몸이 된다.
단전이 깨진 것은 아니지만 비슷한 효과를 얻게 된다. 훗날 주석하가 악인이 아니란 판단이 선다면 불존 자신이 다시 풀어줄 것이다. 금제일 뿐이기에 이는 그를 해치는 게 아니라고 불존은 자신을 합리화했다.
‘응?’
단전을 봉쇄하려 하자 이상한 조짐이 일었다. 지금까지 잠자고 있던 알 수 없는 기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것을 본능의 저항으로 간주한 불존은 더욱 내력을 끌어올려 단전을 봉쇄하려 했다.
콰앙-
주석하의 단전 어림에서 작은 충격이 발생했다. 단전에서 잠자던 세 기운과 불존의 내력이 충돌했다. 이 충격파가 단전에서 잠자던 내력을 완벽하게 일깨웠다. 세 기운이 동시에 활성화되면서 이미 제압해 두었던 두 기운마저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아미타불! 어째 이런 일이!”
들불처럼 피어오르는 내력은 봉쇄하려던 불존의 내력을 순식간에 억눌렀다. 불존의 내공이 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다지만 주석하의 몸에 담긴 모든 내력을 제압할 만큼 엄청난 양은 아니었다.
한번 밀린 불존의 내력은 다시 상대를 제압할 수 없었다. 위험을 느낀 주석하의 내력이 본능적으로 불존의 내력을 체외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주석하의 신체가 격렬한 반응을 일으켰다.
“크윽!”
불존은 충격을 감수하면서 주석하의 내력을 제압하고자 온 힘을 다했다. 그의 몸이 경련을 일으켰고 주석하의 몸 또한 발작하듯 흐느적거렸다.
“불존?”
유비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일그러진 불존의 표정으로 보아 상황이 잘못 흐르고 있었다. 뭔가 문제가 발생한 것이 확실했다. 지금이라도 유비연은 주석하를 돕고 싶었으나 내공을 쓸 수 없는 그녀는 속수무책이었다.
“으으으!”
주석하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불존은 모든 내공을 쏟아부으며 다시 금제를 시도했다. 그의 얼굴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마가! 마가 끼는 도다. 아미타불!”
불존은 불호를 읊으며 주석하의 내력에 대항했다. 주석하의 몸속에서 거대한 두 내력이 서로 힘을 겨루면서 혈맥이 부풀어 올랐다. 자칫 내공 금제가 아니라 혈맥이 터져 그의 몸이 부서질 가능성마저 생겼다.
“안돼요!”
주석하의 상태를 본 유비연이 기겁해서 외쳤다.
순간 불존은 내력을 제어하기 힘들어졌다. 상대의 힘은 너무 거대했다. 지금까지 내공에서 밀려본 적이 없던 그였기에 당황스러운 이 현상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콰앙-
혈맥 내부에서 거대한 충격파가 일면서 불존의 내력이 속절없이 밀리기 시작했다.
“크윽!”
불존은 입으로 한 사발의 피를 토했다. 내상의 징후마저 일기 시작하자 불존은 황급히 맥문을 잡았던 손을 거뒀다.
다급히 불존은 운기조식에 들어갔고, 흐느적대던 주석하의 육신도 곧바로 안정됐다. 다만 주석하의 몸 내부는 여전히 다섯 기운이 날뛰며 격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유비연은 지금 불존이나 주석하를 건드리면 위험하다는 사실만은 인지했다. 그녀는 주석하와 불존 사이를 가로막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다시 불존이 그런 일을 자행한다면 온몸으로 주석하를 보호할 생각이었다.
부풀었던 주석하의 혈맥이 점차 정상으로 돌아갔다. 내부에서 날뛰던 진기도 다시 단전으로 흘러가며 평온을 되찾았다.
잠시 후 불존이 눈을 떴다. 그는 심란한 눈빛으로 주석하와 유비연을 바라봤다.
금제하지 못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런데 실패했다. 그 말은 저 젊은이의 체내에 잠재한 내력이 그의 내공을 넘어선다는 것을 암시했다. 적어도 아직은 아니더라도 머지않은 미래에 저 젊은이는 괴물이 될 것이다. 최소한 내공 괴물이.
‘죽여야 하나?’
아무리 살생을 회피한다지만 만인의 생명을 위해 살인마 한둘쯤 죽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부처님께서도 그런 살생은 허락해주실 테니.
금제할 수 없으니 죽여야 한다.
불존은 옆에 내려둔 선장을 손에 쥐었다. 이 선장으로 아직 잠에서 깨지 못한 저 젊은이의 심장이나 단전, 머리를 내려치면 이 모든 업보가 끝날 것이다. 잠시의 시간이면 충분하다. 아직 기회는 있다지만 이 기회는 잠시 후면 사라진다. 어쩌면 영원히.
“아미타불.”
불호를 외우며 심신을 갈무리했다. 처음 이곳으로 올 때 결심했던 것처럼 주저 없이 실행해야 한다. 그런데…….
녀석의 평온한 얼굴을 보니 차마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를 보호하는 유비연의 눈빛과 불안한 듯 바라보는 녹윤영의 표정은 불존의 자비로움을 흔들고 있었다. 저 둘은 분명히 정파와 사파로 이념이 다를 진데 어떻게 같은 사람을 보호하려 한단 말인가.
기성 정파인이나 사파인이라면 절대 보일 수 없는 행동에 감명 받은 불존은 살심이 가라앉았다.
불존은 슬그머니 선장을 손에서 놓았다. 그리고 다시 운기조식에 몰입했다.
이것도 주석하의 운명이려니. 옆에 좋은 사람을 두고 그들의 보호를 받으니 그를 해칠 수 없구나. 군사인 제갈휘가 그를 제거하려 하지만 그는 아직 죽을 운명이 아닌가 보다.
불존은 천천히 염주를 돌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불자에겐 자비가 생명이고 다행히 그는 이를 어기지 않았다.
***
주석하는 잠에서 깼다.
그는 잠이 든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몰랐다. 패존을 죽인 후 극심한 피로에 잠시 정신을 잃었을 뿐이다.
눈을 뜨자마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안타깝게도 주막은 완전히 박살이 나 있었다. 오늘 잠잘 곳이 사라져서 아쉬운데…….
뿌옇게 밝아오는 하늘을 보니 그런 마음마저 사그라들었다.
문득 중독되었던 동료가 생각나서 주변을 휙휙 둘러봤다. 한쪽에 유비연과 녹윤영에 혈혼도객까지 나란히 앉아 눈을 감고 있는 게 보였다. 대충 무사한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정작 그를 당황하게 한 현실은…….
“아미타불, 일어났나?”
나이를 알아보기 힘들 만큼 노쇠해 보이는 스님이었다.
“누구십니까?”
“아미타불, 지나가던 과객일세.”
그 말을 믿기 어려웠으나 스님이 쥔 선장을 보고 주석하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범상치 않은 느낌이 팍 들었다.
“자네의 몸에는 엄청난 진기가 잠재되어 있더군.”
정곡을 찔린 주석하는 스님을 경계했다. 대답하기도 하지 않기도 모호한 상황이었다. 그는 긍정의 의미로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내공을 익혔는지 물어보는 것은 실례겠지. 궁금하지만 참도록 하겠네. 아미타불.”
안 물어봤으면 더 좋았을 것 같은데……. 내심 투덜거리던 주석하는 이 스님이 자신의 몸 내부를 살폈음을 직감했다. 갑자기 머리가 쭈뼛거리며 공포가 몰려왔다. 정체 모를 이 스님에게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모골이 송연했다.
“아미타불, 자네의 관상을 보니…… 존재하지 말아야 할 자이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