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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검천하-96화 (96/273)

96화 패존과 불존 (4)

주석하는 충격을 받았다. 이 스님은 그가 회귀자임을 알고 있는 건가?

숨겨야 할지 아니면 더 물어봐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어 주석하는 입을 열 수 없었다. 스님의 존재감이 묵직하게 그를 억눌렀다.

“천리를 거스른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 모르겠네.”

불존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내 뜻이 아니라고요.’

주석하는 내심 항의했다. 시간을 되돌리는 무한회귀공은 역천의 무공이다. 천리를 어긴 인과응보가 어떤 식으로 나타날지 아는 바가 없다. 사실 그의 의지도 아니었고 알더라도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없다.

“소승은 고민했네. 천리에 순응해야 할지…….”

주석하는 싸늘한 공포를 느꼈다. 천리에 순응한다는 말은 그를 제거하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아직 그가 살아 있으니 어떤 식으로든 그에게 해를 가하지 못했다는 의미다.

주석하는 가슴을 펴고 당당해지기로 했다. 비록 눈앞의 고승이 범상치 않아 보이지만 그렇다고 위축될 필요는 없었다. 더구나 상대는 허락 없이 그의 몸 내부를 건드렸으니.

“그 말씀은 시도했는데 실패했다는 뜻으로 들립니다만?”

“허허, 그렇네. 아미타불.”

“아직 제가 죽을 때가 아니었던 모양이네요.”

주석하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아미타불, 소승도 몰랐었네. 그런데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이게 보통 일이 아니군. 이처럼 천리를 거스르는 기사(奇事)는…… 배교가 아니면 있을 수 없지.”주석하는 무한회귀공이 배교의 사술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이 노승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배교의 신물이 강호에 모습을 드러낸 게 지금부터 오십 년 전이네. 그런데…… 믿을 수 없게도 그 실체가 나타났군. 자네가…… 아미타불.”

“무슨 말씀이신지?”

“물론 자네도 모를 수 있어. 다만…… 자네에게 하나 부탁하고 싶네. 자네는 중심을 잡아야 하네. 알겠는가?”

“정파, 사파의 중심 말입니까?”

주석하는 전생에도 현생에도 정파와 사파의 싸움을 지겹게 봐왔다. 그가 생각할 수 있는 중심은 그런 것이었다. 사실 제갈휘가 그를 경계하는 이유도, 뇌군이 그를 끌어들이려는 이유도 정사의 대립 때문이다.

정작 그는 정사를 그리 따지지 않았다. 화존의 무공을 익힌 것처럼 정파의 무공, 사파의 무공을 가리지 않았다. 양 진영에 특별한 선입견도 없다.

불존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네.”

“그럼?”

“자신의 중심이지. 마음의 중심이라 해도 되고 뚜렷한 주관이라 해도 되고…….”

예상과 다른 대답에 주석하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고승과의 대화는 선문답과 다르지 않다. 대화할수록 더 오리무중에 빠졌다.

그의 의문을 불존이 다시 풀었다.

“자네가 천리를 거스른 것은 자네의 뜻이 아니라 다른 어떤 존재 때문이라 보네. 이를 기획한 자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그자의 의도에 휘말려 자신을 놓치는 화를 입지 않기를 바라네. 아미타불.”뭔가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그의 기억에 의하면 자신이 회귀한 이유는 뇌군 때문이다. 무한회귀공을 익힌 뇌군이 그를 과거로 돌려보냈다. 지금 이 고승은 뇌군을 조심하라는 뜻인가? 아니면 그보다 더 큰 음모에 대비하라는 뜻인가.

어쨌든 이번 생은 남에게 휘둘리지 않고 운명을 스스로 결정지을 생각이기에 주석하는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누가 뭐라 해도 제 목표를 잃지 않을 만큼 중심을 잡고 있으니까요.”

주석하의 장담에 불존이 허허롭게 웃었다.

“그래, 자네의 목표가 뭔가?”

“저요? 백화루의 주인이 되는 겁니다.”

“흐음? 백화루?”

“여자 나오는 객잔이 있습니다. 거기 여자들 수가 무려 백인데 얼마나 예쁜지…….”

“어허허……, 아미타불.”

불존이 못 들을 것을 들었다는 듯 눈을 감고 염주를 돌렸다. 무림과 정파의 미래를 앞세워 열변을 토하던 제갈휘에 비하면 이 청년은 정말 소박한 목표를 가졌다. 그런데 소박한 게 맞긴 한 건가?

“그래, 그런 목표면 된 거지. 아미타불.”

불존이 선장을 들고 몸을 돌렸다.

술이든 여자든 스님과는 상극이 아니었나? 목표에 동의하는 불존의 태도에 어이없어진 주석하는 떠나는 그를 향해 다급하게 소리쳤다.

“천리를 거스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제가 죽어야 하나요?”

한 발짝 걸음을 옮기던 불존이 멈칫했다. 그는 어깨너머로 주석하를 바라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배교의 신물을 없애게.”

주석하가 멍해 있는 사이 불존이 아침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산속에서의 아침은 고요했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산길을 희뿌연 안개가 잔잔하게 덮고 있었다. 세상 만물이 깨어나는 천지는 평화로웠다.

길 저편으로 불존이 사라졌다. 짧은 만남이었으나 주석하에게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잠시 불존이 사라진 곳을 하염없이 쳐다보다가 주석하는 동료를 살폈다.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일행들이 쭉 주저앉아 있었다.

그는 다시 불존이 했던 말을 되새겼다.

불존의 말은 두 가지 뜻을 담고 있었다. 하나는 마음의 중심을 잡으라는 것. 천리를 거스르게 한 자가 뇌군인지 아니면 다른 인물인지 모르나 그자의 의도에 휘말리지 않고 자신의 삶을 살라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다른 하나는 배교의 신물을 없애야 한다는 것. 배교의 신물이 무한회귀공인지 아니면 만리안석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이 더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를 없애야 회귀자의 업보를 마무리할 수 있으리란 뜻이었다.

“하아, 어렵구나.”

주석하는 한숨을 내쉬며 품속을 뒤적였다. 배교의 신물인 만리안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만리안석의 상태는 어떻게 변했을까. 그날 우설금의 살인 장면을 본 후 만리안석이 조금 이상해졌는데…….

슬쩍 동료의 눈치를 본 후 품에서 나무상자를 꺼냈다.

“이걸 없애란 건 아니겠지.”

따지고 보면 신창패존이 그를 공격한 이유도 만리안석 때문이니 정이 뚝 떨어지긴 했다.

무심코 만리안석을 꺼내던 주석하는 눈을 의심했다.

그날 투명하게 변했던 만리안석에 어스름한 푸른빛이 맴돌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그제야 주석하는 처음 봤을 때보다 얼마 전 만리안석을 꺼냈을 때 파란빛이 더 진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놓아두면 저절로 파랗게 변하나 보네.”

왜인지는 모르지만, 만리안석이 조금 변했다. 적어도 보이는 색상이. 하지만 이 색상의 의미가 중요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스스로 주변의 기운을 흡수하는 건가?

“설마?”

주석하는 만리안석을 붙잡고 슬그머니 내력을 집어넣었다.

바로 반응이 왔다. 만리안석에서 빛이 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고향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하얗게 빛나는 만리안석의 중간에 주격의 모습이 나타났다. 아침 식사 중인가? 식탁에 앉은 주격과 그 옆에 있는 주소은, 그리고 장로인 신옹까지. 식탁에 놓인 먹을거리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얼핏 느껴지는 분위기는 좋아 보였다.

아마 지금 본 장면이 바로 현재 흑검문의 모습일 것이다.

밝게 빛나던 하얀빛이 천천히 사그라들고 구슬 중간에 보이던 가족의 얼굴이 점차 흐려졌다.

빛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만리안석은 투명하게 변해 있었다. 그 신비롭던 푸른빛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사용하면 푸른빛이 없어지고 놓아두면 다시 푸르게 바뀌나 보네.”

주석하는 만리안석의 기본 원리를 이해했다. 역시 한 번만 사용하는 물건이 아니었다.

그는 만리안석을 다시 상자에 넣었다.

평화로운 주격과 주소은의 모습을 보니 지금 자신이 이 야산에서 무엇을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단전의 내력을 사용하려고 흑도팔군을 만나려는 목적이라지만…… 굳이 지금 더 강한 고수가 될 필요가 있나? 고수가 될수록 무림의 일에 깊이 개입하게 되어 오히려 자유가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그의 삶의 목표는 무림 고수가 아니라 백화루주인데. 지금까지 번 돈이라고는 돌아갈 때 여비밖에 없으니 삶의 목표와 동떨어진 삶을 살았다는 기분이었다.

“나도 가족과 함께 따뜻한 밥을 먹고 싶다. 질긴 육포가 아니라…….”

주석하는 결심을 굳혔다. 지금 당장은 북해로 가지 말자. 평생 빙군을 만날 일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조급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이제는 제 한 몸 건사할 무공을 지녔으니 그들을 만나든 말든 무슨 상관인가.

방금 만난 고승도 중심을 잡으라고 했다. 그의 중심은 백화루주가 되는 것이고 이는 덕양에서 충분히 이룰 수 있다. 중원을 떠돌아다닐 이유가 없다.

목적지를 사천으로 수정한 주석하는 몸을 일으켰다.

“일어났네요? 몸은 괜찮아요?”

유비연의 목소리가 들여왔다.

마침 유비연을 비롯해서 일행이 잠에서 깨고 있었다.

“한참 푹 잔 기분인데…….”

주석하가 정상으로 보이자 동료들이 한시름 놓은 듯 웃음을 보였다.

“우리도 산공독이 풀렸네요.”

유비연은 운기를 시도해보고는 만족스러워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털던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불존은 어디 갔어요?”

“불존?”

“스님요. 혹시…… 나이 든 스님 못 봤어요? 선장을 든.”

“헉! 그분이 반야불존이었어요? 정파십존의?”

깜짝 놀란 주석하의 비명에 유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석하는 불존이 사라진 산길로 시선을 돌렸다. 범상치 않은 스님이라고 생각했지만, 무려 불존이었다니. 정파십존 내에서도 최강고수를 만났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불존의 당부가 심상치 않았다. 그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주석하는 이 밤에 자신이 죽을 위기를 몇 번이고 넘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직 죽을 운명은 아니었나 보네.’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는 동료를 재촉했다.

“잠 깼으면 움직일까요?”

“아직 졸린 데…….”

얼떨떨한 표정으로 혈혼도객이 마지못해 일어났다.

무너진 주막 더미에서 행낭을 찾아 둘러메고 그들은 고갯길에 섰다.

“북해로 가려면…….”

유비연이 갈림길에서 방향을 찾을 때 주석하가 자신 있게 한쪽을 가리켰다.

“저리로 갑시다.”

“네? 그곳은 사천 방향인데요? 북해가 아니라.”

“사천으로 갈 겁니다. 난 집으로 갈 거라고요.”

바뀐 목적지에 의문을 품었으나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북해보다는 사천이 훨씬 가깝고 여정도 안락할 테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북해는 너무 멀다. 춥고 고되기도 하고.

***

다그닥- 다그닥-

마차가 관도를 천천히 움직였다. 두 마리의 말이 이끄는 마차는 화려하지 않았으나 그 기세는 하늘을 찔렀다.

마차 안에는 만진장을 떠나 제갈세가로 돌아가는 제갈휘가 타고 있었다. 말을 모는 마부 두 사람은 제갈세가의 고수였다.

제갈휘는 마차에 몸을 기대고 회담 결과를 되새겼다. 예상과 달리 결과는 좋지 않았다. 가적성 죽음을 이용해서 정사의 다툼으로 몰아갈 계획이었다. 거기에 남궁세가 사건까지 벌어졌으니 재료는 풍부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실패했고 얻은 것이 없었다.

“이건…… 주석하 그놈 때문이야. 갑자기 그런 고수가 나타나다니. 하지만 그놈은 명을 재촉했어. 지금쯤 패존과 불존이…….”

제갈휘는 조금의 가책도 느끼지 않았다. 위험한 사파의 싹은 빨리 제거하는 것이 답이다. 내버려 두면 훗날 무림 공적으로 성장할 테니까. 이 일은 무림의 안녕을 위해 어쩔 수 없다.

주석하 제거가 이번 만진장 방문에서 유일하게 거둔 성과였다. 이 성과가 절대 작지 않음을 그도 안다.

그때 마차 밖에서 서신이 전해졌다.

“불존께서 보내셨습니다.”

제갈휘는 흐뭇한 미소를 머금으며 서신을 뜯었다.

빠드득-

그의 손에서 서신이 떨어졌다. 예상과 다르게 일이 어긋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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