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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검천하-97화 (97/273)

97화 흑검서생 (1)

제갈휘의 안색은 창백했다.

신창패존의 성격을 익히 아는 그는 만진장에서 돌아가는 주석하 일행을 패존이 가만두지 않으리라고 예상했었다.

그는 비마표국이 배교의 신물을 호송 중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신물을 노리는 사람 가운데 패존이 있다는 것까지. 그의 정보망은 무림 제일이었으니 이처럼 중요한 사실을 놓칠 리 없었다.

그런데도 만진장에서 뇌군을 추궁하지 않았던 이유는 신창패존이 해결하리란 기대감 때문이었다. 신물이 정말 사라졌든 아니든 관계없이 주석하도 혐의자였다. 자신이 주석하를 추궁하는 것보다 신창패존이 그 역할을 맡는 것이 훨씬 낫다.

“예상 밖의 대어였구나…….”

제갈휘는 작전을 적당히 세우지 않는다. 그가 치밀하지 않았다면 무림맹의 군사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만진장에서 접한 주석하의 무공은 예상을 뛰어넘었다. 단순히 혼군의 진전을 이었다고 생각했더니 난데없이 화존의 무공과 악군의 신물마저 등장했다. 신창패존만을 믿고 있기엔 불안했다.

그래서 반야불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비록 그는 살생을 벌이지 않겠지만 정파의 일이라면 두 손을 걷어붙인다. 그가 패존을 슬쩍 돕기만 해도 충분하다.

그의 전략은 완벽했다. 주석하가 빠져나갈 구멍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날아온 불존의 서신에는 놀라운 결과가 적혀 있었다.

정파십존의 일인인 신창패존이 주석하에게 죽었다!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놀라 자빠질 괴사였다. 정파십존이 누군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군림하던 자들이다. 그런 자가 이름도 없는 젊은이에게 패해 죽었다니.

지금까지 만사지존인 그의 예상을 이만큼이나 빗나간 일은 없었다.

“후우…….”

깊은숨을 들이키며 제갈휘는 고민했다.

정파십존과 흑도팔군은 나름대로 균형을 이뤘다. 전체 세력은 정파십존이 압도적으로 강했으나 무림에서 은거하거나 세상일에 관여하지 않는 정파십존이 있어서 엇비슷하게 대등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던 것이 정파에서 한 사람이 죽고 사파에서 한 사람이 혜성처럼 나타났으니 무게추가 기울었다. 정사대전을 일으켜 사파를 박멸하려 했더니 이젠 그 반대를 걱정해야 할 지경이다.

“뇌군! 그 자식에게 완전히 당했어.”

주석하와 뇌군의 사이가 가까워 보였었다. 이는 뇌군이 의도적으로 주석하를 키운다는 뜻이기도 하다.

빠드득-

제갈휘의 이빨에서 소리가 났다. 그러잖아도 요즘 이빨 상태가 별로인데…….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일견 복잡해 보이지만 큰 줄기는 단순하다. 주석하 정도의 고수라면 해결할 사람은 정해져 있다. 정파십존이나 흑도팔군 정도의 고수 둘을 붙여야 한다.

“십존을 동원하느냐 팔군을 동원하느냐 그게 문제로군…….”

제갈휘는 머릿속으로 무림의 정세와 각자의 성격을 치밀하게 고려했다. 주석하가 감히 예상치 못한 인물이라면 더 좋다.

“좋아, 이번에는 흑도팔군을 동원해주지. 같은 편이라고 믿는 사람에게 발목 잡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아직 어린놈이니 당연히 경계심도 없을 테고…….”전략은 세워졌다.

***

멀리 익숙한 전각이 보였다.

주석하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대체 얼마 만에 돌아온 건가. 무려 반년이 훌쩍 지났다.

흑검문은 그가 떠날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녹윤영이 잔뜩 기대감이 찬 표정으로 물었다.

“저긴가요?”

“네, 혼천교에 비하면 엄청 작지요.”

당연히 시골의 이름 없는 문파를 강호의 대문파인 혼천교와 비교할 수는 없다. 혼천교나 화산파는커녕 만진장보다도 규모가 작다.

유비연은 이미 예상한 표정이었으나 녹윤영은 달랐다.

그녀는 흑검문이 무척 아담하고 좋아 보였다. 목적지가 북해에서 흑검문으로 바뀌는 순간 그녀는 기쁨에 겨워 소리 지를 뻔했다.

처음에는 북해로 가는 고생을 덜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흑검문으로 가서 주석하의 부친을 만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콩콩 뛰었다. 어쩌면 인생을 결정지을 중대사를 이룰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긴장했고, 그때부터 녹윤영의 마음은 하늘을 날아다녔다.

당연히 무심한 주석하는 그녀의 속셈을 전혀 몰랐지만 세심한 유비연은 금방 눈치챘다. 그래서 유비연과 녹윤영은 이곳까지 오는 동안 심심찮게 툭탁거렸다.

정작 이를 본 주석하는 둘이서 사랑싸움한다고 오해하여 부러워했다.

흑검문의 정문을 지키고 있던 문지기가 제일 먼저 주석하 일행을 발견했다. 목을 뻣뻣하게 세우며 문지기의 위엄을 뿜어내려던 그는 다가오는 젊은 공자를 발견하고 입을 쩍 벌렸다.

소문주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안색이 밝고 옷차림마저 깨끗했다. 더구나 바로 뒤에 어떤 여인도 따라오고 있었다. 그 뒤의 시커먼 놈을 보면 소문주와 함께 떠난 혈혼도객이 확실하니 눈앞의 청년은 소문주가 분명한데……. 여자라니? 이는 있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예전에 며칠 나돌아다닌 소문주는 상거지가 따로 없었는데…….”

백호문과 다툼이 치열했던 그때 백호광객인지 소화자인지 처리한답시고 몰래 떠났던 소문주가 돌아온 날을 떠올렸다. 그때와 비교하면 완전히 다른 사람인 것 같다. 심지어 떠날 때보다 더 번쩍번쩍 빛났다.

어느새 주석하가 코앞까지 다가와 씨익 웃음을 터트렸다.

“잘 있었나?”

“허억! 소문주님!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문지기가 황급히 안으로 소식을 전하러 갔다.

주석하는 뒤를 돌아보며 녹윤영과 유비연을 안내했다.

“들어가시지요.”

녹윤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첫인상을 말했다.

“여긴 원래 보초가 한 명밖에 없어요?”

혼천교는 정문에서 내부까지 몇 차례 위사를 통과해야 한다.

“한 명도 없을 때도 많아요. 그나마 요즘은 세가 좀 커져서 하나라도 세워두는 거죠.”

흑검문의 처지나 규모에선 당연한 일이지만 녹윤영은 금방 이해하지 못했다.

도성 대갓집에서 살던 여인이 시골의 그럭저럭 사는 선비 집에 놀러 온 셈이니 그 문화충격이 없을 수 없다. 내심 마음에 둔 남자가 아니었다면 이런 외진 곳까지 방문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나마 남자가 마음에 드니 이곳도 괜찮아 보이긴 하지만…….

내심 한숨을 내쉬며 녹윤영은 유비연을 흘끔거렸다. 정작 유비연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 여우 같은 계집애.’

유비연에게 눈치를 주던 녹윤영은 목을 세우고 주석하를 따라 흑검문에 발을 내디뎠다.

영문을 알 수 없었던 유비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뒤에서 따라오는 혈혼도객에게 눈짓으로 물었다. 당연히 혈혼도객도 고개만 저었다.

전각 앞으로 다가가자 문주인 주격과 신옹 장로가 후다닥 튀어나왔다.

“석하야!”

마치 수십 년 만의 가족

상봉처럼 감동적인 장면이 펼쳐졌다. 주격이 주석하를 얼싸안았다. 정작 주석하는 무덤덤했고 뒤에 서 있던 녹윤영과 유비연은 어이없어 눈을 돌렸다.

혈혼도객은 민망해서 신옹에게만 대충 인사하고는 후다닥 자신의 거처로 사라졌다.

“무사했구나. 팔도 다리도 온전히 붙어 있는 걸 보니.”

“오다가 잘릴 뻔했지만 무사히 넘겼습니다. 운이 좋았죠.”

“어? 그래? 어떤 고얀 놈이! 내가 당장 제자들을 끌고 가서…….”

“괜찮습니다. 제가 이미 죽였거든요.”

“다음부턴 내게 맡겨라! 내가 싹 다 없애주마! 감히 우리 석하에게 대들다니!”

주석하는 신창패존과의 전투를 떠올리며 대충 입에 올렸고 분노한 주격은 그 상대가 무려 정파십존임을 알지 못하고 길길이 날뛰었다.

정작 녹윤영은 어리둥절했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근엄한 할아버지 혼군 밑에서 자랐다. 당연히 이런 분위기에 적응하기 힘들었다. 일파의 문주라면 적어도 묵직하고 도량 있는 풍모를 지녀야 하지 않은가. 그게 아니라면 주변을 압도하는 위압감이라든가.

그런데 주격의 첫인상은 인자한 시골 아버지였다.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여 버벅대는 그때 주격이 그제야 주석하의 뒤로 시선을 돌렸다.

“이분들은 뉘시냐?”

“아, 이분은 혼천교의 녹 소저이고 이분은 화산파의 유 소협입니다.”

주격이라고 혼천교와 화산파의 위명을 모를 리 없었다. 그는 깜짝 놀라 두 사람에게 포권을 취했다.

“흑검문까지 왕림해주셔서 감사하오!”

“아닙니다. 아버님……, 아, 아니 문주님! 환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녹윤영이 당황해서 인사했다.

유비연은 녹윤영의 태도에 혀를 찼다. 벌써 김칫국을 마시다니. 주석하가 그렇게 좋을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주격에게 인사했다.

‘음, 하긴 나쁘진 않지. 그것도 흑도에선…….’

결혼 적령기라 소녀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청년 기협이라면 대표적으로 중원사룡을 들 수 있었다. 그들을 자주 만나면서도 전혀 이성적인 끌림이 없었던 유비연이었기에 녹윤영의 마음에 공감하기 힘들었다.

물론 그녀도 자신이 왜 주석하를 따라 이곳까지 왔는지 자각이 전혀 없었다. 단지 사부와 만사지존이 내린 임무를 수행할 뿐이라고 변명하고 있지만.

“먼 길 오시느라 고생했으니 얼른 들어갑시다. 차를 대접하리다.”

주격이 두 사람을 안으로 끌어들이며 주석하의 등을 떠밀었다.

***

차를 마시면서 그간의 일을 대충 물어보던 주격이 일이 있다며 먼저 자리를 비웠다.

젊은 사람들 사이에 끼어 눈총받기 싫다는 뜻임을 알아챈 녹윤영은 부친에 대한 호감이 급상승했다. 정작 주석하는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와 상봉의 기쁨을 제대로 나누지 못해 아쉽다며 붙잡았다.

‘어휴, 눈치라고는 하나도 없네.’

녹윤영이 내심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주석하와 다니다 보니 그의 성격을 어느 정도 알게 됐다. 눈치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오죽했으면 그렇게 오래 붙어 있어도 유비연이 남장 여인이란 사실을 아직도 모를까.

그에게 눈치를 기대하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는 정도는 안다. 그래도 청춘 남녀라면, 그것도 자신처럼 예쁜 여자가 집을 방문했다면 이런 대청이 아니라 아늑한 본인의 방으로 안내해야 하는 것 아닌가.

법도를 굳이 따진다면 할 말 없지만 무림인이 그런 자질구레한 예절에 얽매이는 것도 아니고. 꼭 방 안에서 뭔가 해보겠다는 생각은 아니지만.

시큰둥해진 녹윤영은 옆에 앉은 유비연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유비연은 대청의 각종 장식물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긴 고리타분한 화산파에서 장식이라곤 전혀 없는, 도 닦는 생활을 했을 테니.’

유비연의 내심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저렇게 티 나게 두리번거리다니. 저 관심이 주석하에게 쏠리면 더욱 골치 아프고.

정작 유비연은 무림 문파답지 않은, 아기자기한 실내 분위기에 당황하고 있었다. 흑검문이 흑도 문파라 험악한 문지기에 유혈이 낭자한 뒤숭숭한 분위기를 예상했는데 정작 이곳은 일반 가정집 분위기였다. 그것도 가족의 정이 넘치는.

두 사람이 딴생각에 잠겨 있을 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오라버니!”

주소은이 헐레벌떡 뛰어들어와 주석하에게 매달렸다.

“소은이 잘 있었니?”

“물론이지. 오빠는 잘 다녀왔어?”

둘이서 스스럼없이 부대끼는 장면을 보고 녹윤영과 유비연은 깜짝 놀랐다. 여동생이 있다고 말은 들었었는데 정작 두 남녀의 상봉 장면을 보니 남매가 아닌 연인 같아 보여서다.

다소 불편해진 마음에 녹윤영과 유비연이 묵묵히 차를 들이켜고 있으려니 그제야 주소은이 그녀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

두 사람을 발견한 주소은의 안색이 확 바뀌었다. 녹윤영을 찬찬히 뜯어보다가 미간을 확 찌푸린 후 유비연으로 시선을 옮기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미묘한 감정이 안면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 같더니 이번에는 주석하를 뚫어지라 쳐다봤다.

머쓱해진 주석하를 노려보던 주소은이 버럭 소리 질렀다.

“오빠! 혼인 상대를 데려온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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