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흑검서생 (2)
“응? 호, 혼인?”
깜짝 놀란 주석하가 얼른 정색했다.
“커윽!”
그보다 더 놀란 사람은 녹윤영과 유비연이었다. 두 사람은 차를 마시다가 그대로 뿜었다. 그나마 주석하 쪽으로 안 튄 게 다행이었다.
찜찜한 눈으로 주석하와 녹윤영을 열심히 쳐다보던 주소은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건 아닌데…… 근데 아니어도 안 되는데…….”
주소은이 대체 뭐라고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주석하는 눈만 뻐끔거렸다.
한참 고민하던 주소은이 녹윤영과 유비연을 험상궂게 쳐다보고는 주석하에게 손가락을 까닥였다. 나와보라는 거다.
갑자기 얌전한 고양이가 된 주석하가 죽을 상이 된 표정으로 주소은을 따라갔다.
그 모습에 녹윤영과 유비연이 얼이 빠진 듯 실소를 머금었다. 시누이는 무서운 법이다.
대청 밖으로 나온 주소은이 대뜸 물었다.
“오빠, 저 사람들 대체 누구야?”
“누구?”
“사나운 여자랑 귀엽게 생긴 남자.”
주석하는 두 사람의 신분을 설명하고 만난 과정을 얘기했다.
주소은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를 향해 도끼눈을 떴다.
“설마 오빠 무슨 일 있었던 건 아니지? 예를 들면 책임질 일이거나…….”
“커윽! 저, 절대 아니다. 강호 쏘다니는 게 그렇게 낭만적이지 않아. 매일 목숨의 위협을 받는데 그런 상황에서 낭만은 얼어 죽을…….”
“내 말이 그 말이야. 그런데 저 여자가 떡하니 부끄러운 줄 모르고 쫓아왔으니까. 설마…….”
“설마?”
“흐음, 오빠가 아니라 이거지? 그럼 저 두 사람이 서로 사귀나?”
주소은의 상상력이 엉뚱한 곳으로 튀었다.
주석하도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녹윤영과 유비연이 미묘한 사이란 기분이 들어서다.
“잘 모르겠는데?”
“흐음, 그러면 안 되는데…….”
이건 또 무슨 소리지? 무슨 생각인지 감을 잡지 못한 주석하는 주소은의 눈치를 살폈다. 어째 안색이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복잡한 모양새다.
예전에 비슷한 표정을 한 번 본 것 같긴 한데? 남궁천이 방문했을 때였나?
“흐음, 유연…… 아니 유 소협이 화산파 제자라고?”
“응, 그것도 정파십존에 속한 자하검존의 제자. 그것만으로도 강호에서는 한 수 접어주지.”
사실 기인들이 득실댄 만진장에서나 무명이었지 다른 곳에서는 자하검존 제자나 혼천교 소교주라면 제대로 대접받았다.
주소은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아! 또 정파네…….”
또 정파라니?
“오빠, 저 두 사람 언제까지 있을 건데?”
“글쎄? 며칠은 있지 않을까?”
“알았어. 오빠는 절대 녹 소저에게 잘 해주면 안 돼. 알지?”
“응? 뭘 알아?”
“하여튼 저 여자는 오빠랑 안 맞으니까. 저런 불여시한테 오빠를 뺏길 수는 없지. 그건 오빠 앞날을 망치는 거라고.”
아무래도 주소은이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듯했다.
주석하는 변명할 재간이 없어 알겠다고 대답했다. 문득 떠날 때 주소은이 부탁했던 일이 떠올랐다.
“근데…… 소은아, 너 남궁 소협 만나면 안부 전해달라고 하지 않았어?”
얼굴이 확 붉어진 주소은이 기대감이 만발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아, 남궁 소협? 만났어?”
“조만간 남궁가주랑 한번 방문하겠다더라.”
“허억! 남궁가주께서?”
주소은이 화들짝 놀라면서 갑자기 몸을 배배 꼬았다. 이 여자가 또 왜 이러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주석하를 주소은이 얼굴을 붉힌 채 등을 떠밀었다.
“알았어. 오빠, 고마워. 오빠는 얼른 들어가 봐.”
갑자기 등을 떠미는 이유를 모르겠다. 주석하는 힘에 밀려 대청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주소은의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고민이야. 남궁 소협과 유 소협…… 둘 다 너무 잘 생겨서 어쩌지…….”
***
친구랍시고 덕양까지 데려왔으니 집에만 틀어박혀 있을 수는 없었다.
먼 길을 오느라 피곤하단 이유로 집에서 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주석하는 점점 유비연과 녹윤영의 눈치를 봐야 했다. 아무래도 두 사람이 근처를 구경하고 싶은 듯했다.
그 불을 지른 사람은 정작 주소은이었다. 친구를 데려왔으면 멋들어진 다관에도 데려가야 한다나.
주소은은 평소 흑검문에 틀어박혀 거의 밖을 다니지 않았다. 그래서 외부 사람들은 흑검문주에게 딸이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였다.
그랬던 주소은이 녹윤영과 유비연을 데리고 저잣거리 구경을 나가자고 우겼다.
주석하는 떠밀리다시피 하여 그들을 이끌고 덕양 중심가에 나왔다.
“하아, 뭔가 꼬인 기분인데?”
주석하는 옆에 있는 녹윤영을 힐끔 바라보고 멀찌감치 뒤에서 따라오는 유비연과 주소은을 살폈다.
“꼬이다뇨?”
그 소리를 들었는지 녹윤영의 눈썹이 쓱 올라갔다.
“아, 아닙니다.”
급하게 손을 저으며 주석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유비연 옆에 착 달라붙다시피 하여 열심히 재잘거리는 주소은이 신기했다. 저 녀석이 저렇게 인사성이 밝았던가? 어째 남궁천이 방문했을 때보다 더 좋아하는 것 같은데?
화산파라면 무림에서 알아주는 정파이고 자하검존의 제자라면 앞날이 창창하니 오빠로서 굳이 말릴 생각은 없지만……. 흑검문이 흑도 문파란 것과 자하검존과 자신의 악연을 생각하면 한숨이 쏟아졌다.
그래도 이곳 덕양의 시시한 흑도 문파 녀석들에 비하면 월등하니까 말릴 생각은 없다.
“여긴 뭐가 유명해요?”
“유명요? 이 좁은 동네에 유명할 게…….”
“그래도 주 공자가 자주 들리는 곳이 있지 않아요?”
“자주 들리는 곳이라…….”
그가 자주 들리는 곳이라? 주변을 휙휙 둘러보던 주석하의 눈에 백화루가 눈에 띄었다. 저기에서 흑도 소공자회 모임을 하면서 자주 얻어터진 기억은 있지만.
현재 백화루의 뒤를 봐주며 관리하는 곳이 바로 흑검문이다. 그 말은 백화루로 가면 나름대로 귀빈 대접을 받으며 목을 뻣뻣하게 세울 수 있다는 뜻이다. 녹윤영과 유비연을 데리고 가기에 딱 맞는 장소란 감이 왔다.
‘이 기회에 내가 덕양에서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지 보여줄까.’
저절로 어깨가 벌어지고 목에 힘이 들어갔다.
“딱 생각나는 곳이 있네요. 오늘 제가 요리부터 술까지 거하게 대접하지요.”
“그래요?”
녹윤영의 눈동자에 빛이 반짝였다.
주석하는 뒤따라온 주소은과 유비연에게 백화루를 가리켰다.
“소은아, 백화루 이 층에서 맛난 것 먹을 건데 어때?”
백화루가 흑검문 관할임을 아는 주소은도 반대하지 않았다. 다만 주소은은 유비연의 소매를 붙잡고 저쪽 노점상으로 끌었다.
“오라버니! 우리는 저기에 들렀다가 갈게요.”
주석하가 대답하기도 전에 주소은에 끌린 유비연이 사라졌다.
그 모습에 녹윤영이 마구 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어요?”
“저 두 사람, 잘 어울리는 것 같지 않아요?”
상황을 눈치챈 녹윤영의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피었다. 그녀가 왜 웃는지 전혀 모르는 주석하는 안면을 콱 일그러트리고는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그래도 제 누이동생을 그냥 줄 수는 없지요.”
“킥킥킥.”
녹윤영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자지러졌다.
주석하는 더욱 인상을 쓰면서 백화루로 성큼 걸어 들어갔다.
***
백화루 앞에서 주소은은 유비연의 소매를 잡고 장신구를 파는 노점상에 들렀다.
저잣거리에 정말 오랜만에 나온 주소은은 신이 나서 노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더구나 옆에 잘생긴 유비연마저 있으니 그녀의 기분은 날아갈 듯했다.
다만 오빠와 녹윤영 두 사람만 먼저 들여보낸 것이 마음에 걸렸다. 녹윤영에게서 주석하를 보호해야 하는데 유비연과 단둘이 있는 시간을 놓치기도 싫었다. 어떻게 잘 꾀면 유비연이 장신구를 선물해줄지도…….
주소은은 유비연의 눈치를 보며 노점에 걸린 귀걸이와 목걸이를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이렇게 물건이 마음에 드는 눈치를 보이면 웬만한 남자라면 눈치껏 사줘야 하는 것 아닌가?
정작 유비연은 꿈쩍도 하지 않고 홀로 다른 장신구를 만지작거렸다.
‘음, 이 사람도 장신구를 좋아하나?’
주소은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계속 마음에 드는 귀걸이를 잡았다가 높았다가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유비연의 눈치를 보기를 몇 번, 주소은은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이 사람도 오라버니 못지않게 눈치가 없네.’
귀걸이 선물을 포기하고 떠나려는 찰나 한 남자가 그녀의 손을 확 붙잡았다.
“악, 누, 누구세요?”
놀란 주소은이 손을 빼려고 발버둥 치며 상대를 쳐다봤다.
비단옷을 차려입은 청년이었다. 겉모습으로 보아 꽤 부귀하고 권세 있는 집안처럼 보이긴 하는데…… 덕양 같은 시골에서는 권세랄 것도 없고 재산이 있어 봐야 별 것 아니니 대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청년이 껄껄 웃으며 주소은을 품에 안듯 잡아당겼다. 기겁한 주소은이 끌려가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다.
“나? 이곳 덕양의 터줏대감이지. 아가씨는 뉘시오?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우리 통성명이나 합시다.”
주소은이 황당한 표정으로 뿌리치려 했으나 청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주소은의 비명에 그제야 사태를 눈치챈 유비연이 급히 주소은의 다른 쪽 팔을 붙잡았다.
“네놈은 누구냐?”
유비연의 곱상한 얼굴에 청년이 피식 웃으며 껄껄 웃었다.
“기생오라비 같은 녀석은 또 뭐야? 한주먹거리도 안 될 녀석이!”
유비연은 눈을 부릅뜨고 상대를 노려봤다. 그녀가 강호를 주유하면서 이런 불한당을 한두 번 처리한 게 아니다. 마침 덕양에 와서 심심하던 차에 이런 파락호 자식이 걸렸으니 오랜만에 손 좀 풀게 생겼다.
“얼른 아가씨를 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네놈을…….”
“오호? 제법 세게 나오시는데? 척 보니 강호를 떠돌아다니면서 협사 흉내를 내는 자식인가 본데 너 오늘 잘못 걸렸어! 여기 덕양은 흑도가 꽉 잡고 있거든. 여긴 정파 놈들이 찍소리도 못하는 동네라고!”대충 주석하에게 흑검문이 덕양을 꽉 잡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다. 그런데 흑검문주의 딸을 괴롭히는 저자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유비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역시 흑도가 설치는 세상은 믿을 게 못 된다. 그동안 정파의 더러운 짓거리에 마음이 불편했지만 흑도가 날뛰는 세상을 보니 그래도 정파가 낫다고 생각했다.
“네놈! 누구지?”
“나? 청살파의 이인자인 이홍 나리시다! 이곳 덕양을 꽉 쥔 흑도 소공자회의 이인자이기도 하고. 우리 소공자회의 일인자가 누군지 아……. 컥!”
순간 날아온 주먹질에 이홍의 턱이 한쪽으로 휙 돌아갔다. 유비연의 일 권이 이홍의 턱에 꽂힌 것이다.
커다란 충격에 어쩔 수 없이 주소은의 손을 놓은 이홍이 몇 걸음 물러나며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아무리 봐도 곱상하게 생긴 사내 녀석은 별 볼 일 없어 보였다. 순전히 방심하다 한 대 맞았다고 생각한 이홍이 재빨리 허리에 찬 검을 뽑았다.
“이 자식이! 봐 주니까 제멋대로 까불어?”
검을 본 주소은이 기겁해서 유비연 뒤로 숨었다. 물론 주소은은 무공을 제대로 익히지 않아 겁이 많긴 하지만 그래도 무가의 자식이라 검을 보고 겁낼 수준은 아니었다. 단지 유비연의 보호 본능을 자극하고 싶어서 떠는 척했다.
적어도 덕양에서는 손꼽히는 실력자인 이홍은 비릿한 미소를 띠며 유비연을 위협했다.
“흐흐, 오늘 너희들에게 교훈을 내려주마! 네놈은 찢어 죽이고 저년은 오늘 주루에서 시중을 들게 해야겠다.”
이홍의 검이 곧장 유비연을 향해 날아갔다.
당연히 강호에서 설매검화로 이름을 날리는 유비연이 이런 하류 잡배를 두려워할 리 없었다. 검이 없어도 맨손으로 처리할 충분한 능력자였다.
뻐벅!
유비연이 순식간에 상황을 정리했다.
이홍은 검을 뺏기고 저쪽에 나뒹굴었다.
“으으! 두고 보자! 감히 덕양에서 나를 때리다니!”
이홍이 이를 갈면서 허겁지겁 도망쳤다.
이 장면을 모두 목격한 주소은의 눈에 사랑이 가득 담겼다. 눈앞의 잘생긴 남자야말로 이야기 속에 나오는, 절세 무공을 지닌 영웅이었다.
‘심지어…… 나를 구해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