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흑검서생 (3)
과연 백화루는 주석하를 잊지 않았다.
그를 본 백화루 총관은 연신 허리를 굽히며 최고급 별채로 안내했다. 그가 지나는 길목에 서 있던 종업원들이 모두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당연히 주석하의 목이 뻣뻣해졌다.
‘크크, 그래, 이 맛이지.’
남들이 알면 좀스럽다고 욕할지 모르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대우받으며 사는 게 나쁜 일은 아니니. 그는 옆에서 따라오는 녹윤영의 표정을 살폈다.
혼천교 소교주라 이미 대접받는 일에 익숙한 녹윤영은 무덤덤해 보였다. 주석하는 살짝 실망했으나 연신 헛기침을 하면서 종업원 좀 보라고 눈치를 줬다.
아늑한 별채에 앉아 물레방아 도는 화원을 구경하며 주석하는 넌지시 물었다.
“녹 소저, 무엇을 드실래요? 오늘 팍팍 쏠 테니까 마음 놓고…….”
“이 동네 일품요리요.”
“하하, 일품이 워낙 많아서…… 두 사람이 더 있으니 많이 시켜야겠죠?”
주석하는 종업원에게 그를 찾는 두 남녀가 오면 바로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곧 주소은과 유비연이 등장했다.
주소은의 안색이 살짝 흥분해 있어 주석하는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찐한 연애 행각을?’
그렇다고 남녀의 은밀한 일을 물어볼 수도 없어 전전긍긍하던 차에 유비연이 먼저 말을 꺼냈다.
“주 공자, 이 동네에 흑도 소공자회라고 있나 보죠?”
“아! 음……, 있지요.”
그게 갑자기 왜 나오는지 의문이었으나 주석하는 적당히 대답했다. 그때 해체한다고 했는데 실제로 해체했는지 그도 관심이 없었다.
“거기 일인자가 누군가요?”
유비연은 이홍이 자랑스럽게 입에 올렸던 소공자회 일인자가 누군지 궁금했다. 그자야말로 파락호가 아녀자를 희롱하도록 내버려 둔 장본인 아닌가. 원래 나쁜 놈을 소탕하려면 윗대가리를 처리해야 한다.
“하하, 일인자요? 도건이 죽었으니…… 난가?”
유비연의 안색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녀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래도 주석하가 나쁜 사람은 아니라 생각했다. 명아를 도운 것을 보면 오히려 좋은 사람이다. 지금까지 동행하며 보았던 그의 성격도 절대 악한이 아니었다.
그런데 나쁜 짓을 일삼는 동네 불량배의 수장이라니. 아무래도 사람을 잘못 본 모양이었다. 남들 앞에서 좋은 사람인 척하다가 뒤로는 깡패를 양성하는 위선자로 보였다.
기분이 상한 그녀는 차려진 요리를 깨작거리며 말문을 닫았다.
눈치가 빵점인 주석하는 백화루 자랑을 늘어놓았다.
“여기 백화루가…… 백 명의 꽃다운 여인이 있다고 해서 백화루거든요. 여기 미녀들이…… 흠, 정말 죽이죠. 그 미녀들이 따라주는 술을 마시면…… 캬아!”좌중의 분위기가 갑자기 싸늘해진 것도 모르고 주석하는 백화루를 떠벌였다.
“그래서 여기에서 기녀들이 따라주는 술을 많이 마셨나 보죠?”
“하하, 뭐 그렇다기보다…… 제 인생의 목표가 바로 백화루주가 되는 겁니다. 백화루를 쳐다보고만 있어도 배가 부르죠.”
“예? 인생의 목표요?”
유비연과 녹윤영은 주석하의 목표를 백 명의 여인을 거느리는 인생으로 들었다. 주석하의 인상이 점점 나빠졌다. 영웅호색이라더니. 물론 기루에서 술을 마실 수 있다. 그런데 무려 백 명? 영웅은 개뿔!
주석하보다 월등히 눈치가 빠른 주소은은 금방 분위기를 눈치챘다. 지금 오빠가 점수를 통째로 깎아 먹고 있다는 것도. 다만 녹윤영이 주석하에게 붙는 것이 싫었기에 그녀는 주석하를 내버려 두었다.
“그래서 제가 열심히 돈을 모으고 있습니다.”
유비연과 녹윤영은 백 명의 여자와 술을 마시려고 돈을 모은다는 소리로 들었다.
“얼마 모았는데요?”
“무려…….”
무심코 대답하려던 주석하는 차마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는 호주머니를 툭툭 치다 물을 들이켰다.
주석하의 호주머니 사정은 그녀들도 뻔히 일지 않던가. 녹윤영이 한숨을 내쉬었고 유비연은 아예 기대를 접었다.
그때 세 사람이 우르르 등장했다.
“주 공자님!”
백화루 총관과 아리따운 두 여인이었다.
영문을 모르는 주석하에게 총관이 허리를 굽혔다.
“멀리 가셨다더니 일찍 오셨네요. 오늘은 편히 쉬다 가십시오.”
“아하, 그래야죠.”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주석하 쪽으로 총관이 두 여인을 밀어 넣었다.
“너희들은 오늘 공자님을 잘 모셔야 한다. 알겠느냐?”
두 여인이 총관에게 인사하고는 주석하의 양쪽으로 자리 잡았다.
“공자님, 저, 명월이에요. 오늘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지금까지 이런 환대를 받아본 적이 없었던 주석하의 입이 쫙 벌어졌다. 과연 고수가 되니 사람들이 알아서 설설 기는구나.
정작 녹윤영과 유비연의 안면은 왕창 일그러졌다. 역시 이런 인물이었나? 집에 돌아오면 본색이 드러난다더니. 어쨌든 술과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는 남편감으로서는 최악이다.
이제는 주소은마저 얼굴을 찌푸릴 정도였다.
여인이 따라준 술잔을 받아들고 연신 웃음을 터트리는 주석하와 달리 다른 세 사람은 침울한 표정으로 요리만 열심히 먹었다.
주석하는 백화루에서 이처럼 대접을 받아본 게 처음이라 더욱 목이 뻣뻣해졌다.
‘나, 이렇게 대단한 남자라고!’
제각각 심경이 복잡할 때였다.
갑자기 밖이 소란해지며 몇 사람이 우르르 몰려왔다. 청살파 부하를 몰고 복수하러 온 이홍이었다.
이홍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방금 시비를 벌였던 주소은과 유비연을 발견했다. 한적한 별채에 떡하니 자리 잡았으니 두 사람을 찾기는 식은 죽 먹기였다.
“저기다! 저것들 잘 걸렸어! 여기가 내 본거지인 줄 어떻게 알고 제 발로 기어들어 와!”
이홍이 버럭 소리치며 적의를 드러냈다. 순식간에 청살파 부하들이 주석하의 탁자를 포위했다.
“네놈이 감히 나를 건드려!”
검을 들고 유비연을 가리키던 이홍은 맞은 편에 익숙한 인물이 눈에 띄자 멈칫했다. 덕양을 떠나 강호를 유람 중이라던 주석하가 열심히 배를 채우고 있었다.
순간 이홍은 당황했다. 주석하와 유비연의 관계를 몰라서다. 그런데 지금 탁자 주변 풍경을 슬쩍 보니 주석하 옆에만 여인들이 떼로 모여 있었다. 백화루의 기녀로 보이는 두 여자와 검은 옷을 입은 좀 사납게 보이는 한 여자까지.
그와 다툼을 벌였던 두 사람은 맞은 편에 앉았고 옆에 기녀도 부르지 않았다.
‘이건…… 석하가 갑이란 뜻이네. 저 둘은 을이고. 그렇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잖아?’
곧바로 탁자를 둘러앉은 사람들의 갑을관계를 파악한 이홍의 목소리가 더 올라갔다.
“지금까지 나를 건드리고 무사한 놈은 없었다! 당장 무릎을 꿇어라!”
이홍의 호통에 그제야 주석하는 누군가가 왔음을 알아차렸다. 항상 주루에서는 시비가 있기 마련이니 특별한 일은 아니지만 지금 눈을 부라리는 녀석은 많이 보던 놈이다.
“어? 너 이홍 아니냐?”
주석하가 피식 웃자 이홍은 더욱 기세를 올렸다.
“아! 이 자식들이 감히 나를 놀리잖아!”
“누가?”
“이 기생오라비 같은 놈하고 버릇없는 년하고.”
이홍의 손끝을 따라 주석하의 시선이 쓱 옮겨갔다. 그 손이 가리키는 지점에 주소은이 있었다.
주석하의 안면이 딱딱하게 굳었다.
“버릇없는 년?”
이홍이 의기양양하게 분노를 드러냈다.
“너희들 이제 다 죽었어! 이분이 바로 우리 소공자회 일인자…… 으악!”
벌떡 일어선 주석하가 이홍의 멱살을 콱 잡고는 화원으로 냅다 팽개쳤다. 불시의 기습에 이홍은 그대로 화원에 처박혔다.
영문도 모른 채 가까스로 상체를 일으키는 이홍을 향해 주석하가 버럭 고함을 퍼부었다.
“이 자식아! 감히 누구보고 년이래? 네놈이 감히 내 동생에게 욕을 해? 오늘 청살파 현판 뜯겨봐야 정신 차릴래?”
이홍이 놀라서 입을 쩍 벌렸다. 다시 보니 주석하와 여인의 얼굴이 어딘가 닮았다.
“허억! 도, 동생?”
이홍은 다급하게 화원 바닥에 엎드렸다.
이홍을 따라왔던 부하들은 이홍이 낭패를 당하자 주석하를 공격하려 했다가 이홍이 엎드리자 어찌할지 몰라 우왕좌왕했다.
“으허헉, 서, 석하야 모, 몰랐다.”
“평소 네놈 행실이 문제다!”
주석하의 손에서 젓가락 하나가 날아갔다.
푹!
“으악!”
젓가락은 정확히 이홍이 주저앉은 다리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통과해 땅에 박혔다. 기겁한 이홍은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 혼비백산한 부하들이 이홍에게 달려갔다.
주석하는 설설 기며 주소은의 눈치를 봤다.
“소은아, 저 자식 어떻게 처리할까?”
“어휴, 내버려 둬. 아무 일도 없었잖아.”
주소은은 오빠의 용맹을 보게 되어 나름 감회가 새로웠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덕양 중심가로 나가기만 하면 얻어터지고 돌아오던 오빠가 아니던가. 그런 오빠가 이제는 당당해졌으니 가슴이 뿌듯했다.
정작 유비연은 보는 시각이 좀 달랐다.
주석하가 소공자회의 일인자가 확실해지자 가슴이 차가워졌다. 저런 되먹지도 않은 녀석을 아래로 둔 윗사람이니 평소 행실이 어떨지 충분히 짐작됐다.
역시 흑도 인물은 어쩔 수 없는 건가.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는 법. 술을 마시면 본색이 드러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술을 마시기도 전에 저 모양이니…….
한때나마 품었던 좋은 감정마저 사라지는 듯했다.
***
눈과 얼음이 덮인 하얀 세상, 그 세상에 늠름한 은빛 궁전이 중심을 잡고 세워져 있었다.
바로 중원인들이 일컫는 북해빙궁이다.
이 북해빙궁의 주인은 흑도팔군에 속한 최강자, 빙군(氷君)이었다.
빙궁의 궁주, 빙군은 하얀 수염을 쓰다듬으며 단상의 옥좌에 앉아 느긋한 하루를 즐기고 있었다. 비록 이곳은 척박하고 추위 때문에 살기 어렵다지만 그렇기에 그만의 작은 왕국이었다.
빙궁에서 빙군은 왕으로 군림했으며 누구도 그에게 대항하지 못했다. 적어도 이 일대는 그의 소유물이었다. 땅이든, 가축이든, 사람이든.
지금도 그의 옆에는 하얀 피부의 미녀가 시중을 들고 있었다. 중원에 내놓아도 절대 꿀리지 않을 그런 미녀였다.
북해에서 모든 부를 다 이뤘다지만 어쩔 수 없는 갈망이 존재했다. 더 넓은 곳에서 더 강한 권력과 더 많은 부를 쌓아 올리고 싶은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이었다.
가끔 방문하는 중원은 항상 그를 유혹했다. 그는 가까스로 유혹을 참고 북해로 돌아오곤 했다. 그렇더라도 중원의 풍요로운 세상을 잊은 적은 없다. 중원 무림을 호령하는 최강의 권좌까지.
“궁주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그의 상념을 한 시녀가 깼다.
“손님이라…….”
먼 북해까지 올 사람이 누구란 말인가. 이는 수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 드문 일이었다.
빙군의 눈짓에 시녀가 물러나고 얼마 후 귀를 거슬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흐흐, 빙군! 오랜만이다.”
등장한 자는 시뻘건 머리카락을 가진 초로의 노인이었다. 머리카락이 너무 붉어 피부마저 붉게 보였다. 체구는 작고 빼빼 말랐다.
이 자가 누구인가? 무림인들이 경원시하는 염군(炎君) 아닌가. 대막에서 극양신공을 익혔다는 흑도팔군의 일인이다.
극음신공을 익힌 빙군과 상극인 무공을 익힌 자다. 두 사람은 무공이 반대인 만큼 사이도 좋지 않았다. 그런 염군이 이 먼 곳까지 찾아왔다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해가 서쪽에서 뜨겠군.”
굳이 만나고 싶지 않은 손님이어도 먼 길을 왔으니 쫓아낼 수는 없다. 어쩔 수 없이 빙군은 자리를 권하고 차를 준비하라 일렀다.
“흐흐, 내가 왔으니 환영 만찬을 열어야 하지 않나?”
“헛소리 말고…… 온 목적이나 말해.”
곱지 않은 빙군의 다그침에 머쓱한 미소를 거두고 염군이 품에서 서신을 꺼냈다.
“너도 이거…… 받았겠지?”
빙군이 시선을 고정하고 안면을 굳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