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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검천하-100화 (100/273)

100화 흑검서생 (4)

어찌 모를까. 염군이 내민 서신은 일전에 그도 받았던 뇌군의 서신이었다. 그 서신에는 최근 벌어진 중원의 놀라운 기사(奇事)가 적혀 있었다.

빙군은 머릿속에서 서신의 내용을 떠올렸다.

기억한다. 그 내용이 무엇인지. 당시에 그는 중요한 내용이 아니라고 머릿속에서 바로 삭제했었다.

그와 똑같은 기운을 품은 청년이 있다고 했던가. 그 청년이 오래지 않아 방문할 거라고. 그 청년을 믿고 잘 대해주라고. 그 청년은 흑도 무림에서 대단히 중요한 존재라나. 그것이 전부였다.

빙군은 똑같은 기운이란 말을 믿지 않았다.

자신은 이곳 북해에서 한빙지기를 흡수하여 내공을 완성했다. 이곳 북해에서 내공 수련을 하지 않았다면 절대 이룰 수 없는 경지다. 그걸 북해가 아닌 중원에서 해낸 청년이 있다니 당연히 믿을 수 없었다.

비록 뇌군의 장담이라 무시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온전히 받아들일 필요도 없다. 어차피 뇌군과 그는 경쟁 상대이자 우호적인 동료다. 보기 싫은 놈이지만 정파에 대항하여 사파끼리 연합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

이 먼 곳까지 그 청년이 찾아온다면 좋은 일이다. 당연히 그는 그 청년이 오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만일 오면…… 손님으로 대접해주면 된다. 손님이 귀한 북해니까.

“자네도 받았나? 자네와 같은 기운을 가진 청년?”

“그렇지. 뜨거운 기운이 펄펄 넘친다더군.”

염군이 비웃음을 터트렸다. 염군이 익힌 양강지력은 건조한 사막에서 익힐 수 있는 극양의 내력이다. 중원에서는 익히기 쉽지 않다. 그렇기에 염군도 뇌군의 서신을 믿지 않았다.

“뇌군이 사기 쳤군.”

“흐흐,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 그놈이 간이 부어서.”

“사기를 쳐도 적당한 걸 쳐야지.”

빙군이 비웃음을 터트렸다.

정작 염군은 웃지 않았다. 염군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그래서 내가 정보를 좀 알아봤다네.”

뇌군의 음험함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염군은 조직망을 가동해서 확인했다. 그리고 놀라운 정보를 캐냈다.

“패존이 죽었어.”

“뭐? 패존이?”

정파십존의 일인인 패존의 죽음은 충분히 놀라운 소식이다.

“병에 걸렸나?”

“한 젊은이가 죽였다더군. 그 젊은이가 혼군의 진전을 이었다나…….”

“혼군이 제자를 뒀어?”

“아니. 그 직후에 익명의 서신을 받았는데…….”

“혼군과 악군의 진전을 이은 자가 조만간 흑도를 일통할 거라고…….”

“미친놈.”

빙군이 분노를 터트렸다. 비록 흑도팔군에 속해있으나 다른 팔군에 비해 자신이 더 우위에 있다고 자부하던 빙군이었다. 물론 이런 견해는 염군도 마찬가지였다. 염군은 자신이 흑도 최강이라고 평가했으니까.

염군이 수집한 정보를 모두 꺼내놓았다. 빙군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

“자네…….”

“흐흐, 자네도 드디어 생각했나 보군.”

“그자가 우리와 같은 기운을 몸에 지니고 있을 리 없지 않은가?”

“그렇겠지. 하지만 혼군과 악군의 내력을 품고 있음은 증명이 됐네. 알다시피 혼군과 악군은 서로 극성이니 설사 그자가 자네와 나의 기운을 더 갖고 있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지.”빙군은 점점 사악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자신과 같은 기운을 지닌 자라……. 진실이라면 그자는 엄청난 가치가 있다. 제자로 받아들여도 좋고 그게 아니라면…….

지금 빙군의 단전에는 이 갑자를 넘어 삼 갑자에 육박하는 엄청난 내력이 담겨 있다. 이만한 내공을 모으기 위해 추운 곳에서 각고의 노력을 했다. 그런데 어쩌면 그만한 내공을 또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내공의 두 배라……. 가히 상상하기 어려운 무공 수준이 아닌가. 그런 경지에 이른다면 그는 흑도 최고를 넘어 명실상부 무림 최강이 된다. 그런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

“거짓말이라도 상관없지. 잠재적인 싹을 자르는 거니까. 흐흐, 어떠냐? 나와 연합하는 것이?”

염군은 비릿한 미소를 머금고 빙군을 노려봤다.

이미 그 답을 염군은 알고 있었다. 빙군은 수락할 수밖에 없다. 본인이 하기 싫어도 염군이 강자가 되는 것을 눈 뜨고 보지 않을 테니까.

***

백화루에 다녀온 후 녹윤영과 유비연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당연히 주석하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누이동생을 희롱하려던 이홍 녀석을 혼냈으니 그는 할 일을 제대로 했다. 심지어 주소은마저 그 일에 대해 다시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그런데 녹윤영과 유비연은 뭔가 그에게 불만인 것처럼 보였다.

며칠이 더 지나고 녹윤영과 유비연이 떠날 시간이 됐다. 언제까지 흑검문에 계속 머무를 명분이 없었다.

흑검문에서 주석하의 가족을 확 잡아보겠다는 야심을 품었던 녹윤영은 백화루 때문에 한풀 기가 꺾이고 열의도 예전만 못했다. 일단 혼천교로 돌아간 후 다시 고민해 보겠다는 생각을 했다.

주석하를 감시할 생각이었던 유비연도 막상 주석하가 흑검문에 틀어박혀 빈둥거리자 흥미를 잃었다. 주석하에게는 검존과 제갈휘가 예상했던 회귀자의 특징이 전혀 없었다. 더구나 지금의 주석하는 굳이 옆에 붙어 감시할 필요성마저 없었다.

주석하에 대한 인상은 특별히 달라질 게 없었다. 흑검문은 평화로운 일반 가정이었고 덕양 중심가에선 전형적인 흑도 소공자처럼 보였으니까.

정파십존이 그녀가 생각했던 의인이 아니었던 것처럼 주석하도 반듯한 공자가 아니었다.

서로 눈치 보던 녹윤영과 유비연이 암묵적인 합의를 마치고 떠나게 된 날 주석하는 사천성의 중심, 성도까지 그들을 배웅했다.

“이곳은 정말 북적거리는데요?”

녹윤영은 덕양과는 판이한 분위기에 연신 감탄했다. 유비연도 오랜만의 떠들썩한 분위기에 녹아들었다.

반면 주소은은 곧 헤어질 유비연 때문에 침울했고 주석하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여기엔 분위기 좋은 찻집이 있지요.”

성도의 명물을 간신히 기억한 주석하가 그들을 근사한 다루로 안내했다. 어쨌든 오늘은 지난 백화루 방문 때 잃어버린 점수를 되찾을 기회여서 그도 심혈을 기울여 목적지를 선정했다. 이곳에서는 절대로 그때처럼 기녀를 부르는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울창한 대나무 숲에 아담하게 꾸며진 고즈넉한 야외 찻집에서 네 사람이 둘러앉았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리는 이곳은 정말 평화로웠다.

찻집의 탁자는 대나무 울타리로 분리되어 있어 적절하게 사적인 공간이 만들어졌다.

“사람들이 많군요.”

“이 찻집이 명물이거든요.”

녹윤영의 감탄에 추임새를 넣으며 주석하는 부근을 쓱 훑어봤다. 대나무 울타리 건너편으로 이쪽과 비슷한 탁자가 서너 곳 보이고 그곳에도 젊은 남녀들이 우글거렸다. 일부는 여럿이 떼 지어 놀고 있었고, 일부는 남녀 단둘이 은밀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분위기 좋죠?”

그의 물음에 유비연과 주소은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확실히 청춘남녀에게는 그 백화루에 비해 훨씬 분위기가 좋았다.

오늘은 확실하게 점수를 땄다. 덕분에 주석하는 심각히 고민할 뻔했다. 삶의 목표를 백화루주가 아닌 여기 찻집 주인으로 바꿔야 하는 게 아닌가 하고.

‘아냐, 찻집은 돈을 벌기 힘들지.’

금방 머릿속에서 잡생각을 털어냈다. 최고급 차를 시켜놓고 분위기를 팍팍 내고 있으려니 옆 탁자의 대화 소리가 두런두런 들려왔다.

“흑검서생이라고 들어봤어요?”

“흑검서생? 그게 뭔데요?”

“요즘 강호에서 뜨거운 인물입니다. 신성처럼 나타났고요.”

왠지 관심을 끄는 강호 소식이 들렸다. 흑검문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주석하는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그가 눈짓으로 물어보니 유비연과 녹윤영도 고개를 저었다. 함께 다녔으니 모르는 것이 당연할지도.

“흑검? 왠지 무시무시한 기분인데?”

“아하하, 흑검? 덕양에 흑검문이라고 있잖아요?”

“흑검문요?”

“별 볼 일 없는 작은 문파 있어요.”

흑검문이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주석하와 주소은의 인상이 팍 일그러졌다.

목소리로 보아 모두 네 사람 같았다. 남녀가 섞여 있고.

주석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방금 흑검문을 비웃은 여자의 목소리가 의외로 익숙했다. 그는 슬그머니 목을 쭉 빼서 울타리 건너편 사람들을 쓱 훑었다.

“헉!”

기겁한 주석하가 재빨리 몸을 움츠렸다.

“오빠, 아는 사람이야?”

흑검문 소리가 나오니 주소은도 관심을 집중했다.

녹윤영과 유비연의 시선도 주석하에게 쏠렸다. 특히 방금 목소리를 낸 여자를 확인하고 주석하가 기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백화루에서 주석하가 기녀들과 노는 장면을 보았기에 곧바로 미간을 찌푸렸다. 동네에서 모르는 여자가 없으니 역시 이 사람은 여자를 밝히는 한량이었나.

주석하가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데?”

당연하게도 주소은이 잡고 늘어졌다. 소중한 오라버니에게 이상한 여자들이 꼬이는 것 같아서다. 외모로 보나 무공으로 보나 여자들이 오라버니를 노리고 꼬리 치는 게 분명했다. 눈앞의 녹윤영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적어도 주석하 바라기인 주소은이 보기에는 그러했다.

“그…… 곤륜파 사람.”

옆 탁자의 여자는 곤륜파의 설약이었다. 허윤의 사매로 예전에 백호문과 실랑이를 벌일 때 만났던 여자다. 게다가 지금 허윤도 옆 탁자에서 보였다.

곤륜파란 말에 유비연은 반색했고 녹윤영은 비웃음을 지었다. 정사가 분명하게 갈리는 순간이다.

“흑검서생은 흑검을 사용하지 않아요. 실제로는 검이 아니고 퉁소래요. 무려 그 흑검이 악군의 신물이라네요.”

“악군이라…… 대단한 자가 나타났군요.”

“더 놀라운 건 그 흑검서생이 신창패존을 살해했나 봐요.”

“네? 패존을?”

“그게 가능한가요? 정파십존을?”

“속임수를 써서 해치운 거겠죠. 지금 강호가 그 사건 때문에 난리랍니다.”

복잡한 대화를 들은 주석하 일행의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무려 정파십존에 속한 자가 죽었으니 별별 소문이 나리라고 예상했었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 접하니 당사자인 주석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부담스러웠다.

영문을 모르는 주소은은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계속해서 대화가 들려왔다.

“그 흑검서생이 자하검존과도 일 검을 겨뤘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대체 누구기에…… 살인마 악군의 제자인가요?”

“소문엔 혼군의 진전을 이었데요. 악군이 아니라.”

“하아, 복잡해. 그런데 당 소협께선 어떻게 그리 잘 아시나요?”

주석하는 자신이 흑검서생이란 별호로 불린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이들의 대화를 들어보면 그는 잔인무도한 흑도 인물이었다. 흑검소를 들고 다니는 무자비한 흑의 청년. 혼군의 제자이며 정파 고수를 찾아다니며 시비를 거는 인물이다.

그 평가를 들은 유비연이 한숨을 토해냈다. 역시 소문은 믿을 게 못 된다. 그녀가 직접 경험한 사건이었기에 진상을 안다. 지금 언급되는 사건에서 주석하는 실제로 잔혹하거나 무례하지 않았었다.

“실은…… 저희 문파 장로이신 독암쌍로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네? 어쩌다가 그분들이?”

건너편 탁자의 인물은 곤륜파의 허윤과 설약이었고, 함께 동석한 두 남자는 사천당문 가주의 아들이었다. 두 문파 모두 사천에서 이름 있는 정파이니 만난다고 하여 이상할 것도 없지만 듣고 있는 주석하는 자리가 불편해졌다.

“독암쌍로께서 얼마 전 청산방을 돕다가 변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목격자의 말에 따르면 흉수가 검은 옷을 입었다고 했어요. 그래서 저희는 그 흉수가 흑검서생이 아닌지 의심하고 있습니다.”그 말을 듣는 순간 주석하는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막았다.

유비연의 눈초리가 싸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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