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악연 (1)
살짝 독기가 오른 듯한 유비연의 눈총에 주석하는 움찔했다.
유비연이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저거…… 무슨 말이죠? 설마 당신이…… 독암쌍로를?”
“그, 그게…….”
허둥대며 손을 젓는 주석하의 태도에 유비연은 곧바로 사정을 알아챘다. 대체 언제 그녀의 눈을 벗어나 일을 저질렀는지 모르지만 주석하가 한 짓이 확실했다.
유비연은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최근 들어 알게 된 강호의 생리는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주석하를 만나기 전까지 그녀는 확실하게 정사를 구분했다. 사파는 상종 못 할 자들이며 세상을 어지럽히는 망나니이고 정파는 성인군자에 협사의 집단이라고.
그랬던 시각이 명아를 구하는 주석하를 보고 사파의 관점이 흔들렸고 신창패존과 사부의 행동에서 정파의 신념이 사라졌다. 게다가 그나마 반듯하다고 평가했던 주석하가 무슨 일 때문인지 모르지만 정파인 당문의 장로를 죽인 살인마라니. 모든 게 혼란의 도가니였다.
옆에서 다시 대화가 들려왔다.
“거참 큰일이에요. 갈수록 간악한 흑도 무리가 날뛰니…… 세상이 이리 어지러워서야. 덕양이라는 시골 동네 아시죠?”
“네, 압니다.”
“거기 흑검문에 주석하란 자가 있는데요, 그 사람을 보면 정말…….”
설약이 갑자기 주석하의 험담을 늘어놓았다. 곧바로 옆에 있던 허윤이 경고를 날렸다.
“사매, 함부로 남을 헐뜯으면 안 돼.”
“함부로? 제가 장담하는데 곤륜십이검수 사건도 그자가 뒤에 있는 게 확실해요. 그는 곤륜파의 원수라고요!”
“그건 증거가 없잖아? 그 사람이 그렇게 강한 자도 아니고.”
“강한 자가 아니라뇨? 그가 검우방주마저 해치웠는데!”
설약과 허윤의 말다툼이 시작됐고 옆에서 당문 두 사람이 거들었다.
당연히 주석하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물론 그가 저지른 일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곤륜십이검수 사건은 정말 그와 무관하다. 무엇보다 저 설약이란 여자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를 싫어했다. 당연히 그도 그녀가 꼴 보기 싫었다. 오는 정이 있어야 가는 정도 있는 법. 성인군자가 아닌 이상 어쩔 수 없다.
주석하의 안색이 어두워지고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침묵을 깬 사람은 주소은이었다. 친오빠의 험담을 계속 듣고 있을 그녀가 아니었다. 게다가 그녀는 무림의 생리도 잘 몰랐다.
남들이 말릴 틈도 없이 그녀는 대나무 울타리를 옆으로 돌아 험담이 들려온 탁자로 갔다.
“당신들 누군데 우리 오빠를 험담해요?”
한숨을 푹푹 내쉬다가 주소은의 목소리에 주석하는 깜짝 놀라 몸을 벌떡 일으켰다.
“당신은 누구죠?”
설약이 주소은을 노려보았다. 갑자기 끼어든 주소은이야말로 무례하고 황당한 여자였다.
주소은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설약을 비롯한 네 사람을 노려보며 당당하게 말했다.
“나? 흑검문에서 왔어요. 왜 흑검문을 비난해요?”
“하! 그럼 그렇지. 어쩐지 예의를 말아먹었더라니.”
설약이 비웃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주소은의 무공이 보잘것없음을 금방 눈치챘다. 사실 무공을 익혔어도 흑검문이라면 두려울 게 없었다.
허윤이 설약의 소매를 끌며 말렸고 맞은편의 사천당문 두 사람은 설약을 응원했다.
“설약 소저, 우리에게 맡기시지요.”
당문의 두 남자는 당호, 당욱으로 현 당가 가주의 셋째, 넷째 아들이었다. 이들 두 사람은 설약의 미모에 혹해 잘 보이려고 노력하던 중에 설약이 시비에 휘말리자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주소은을 겁낼 설약이 아니었기에 그녀는 직접 나서서 막말을 퍼부었다.
“오호, 흑검문 문하였어? 요즘 덕양에서 잘 나간다더니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지? 시골뜨기 주제에.”
“야! 너! 말 다 했어?”
주소은이 발끈하자 설약이 비웃으며 검을 집어 들었다.
“이년이! 죽고 싶냐?”
순식간에 설약의 검이 주소은의 목을 향했다.
그 순간 유비연이 번개처럼 튀어나갔다.
“멈춰요!”
주소은은 자신을 위해 목숨을 가리지 않는 유비연에게 감동하여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설약은 주소은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건너편 탁자에서 녹윤영과 주석하를 발견했다.
주석하를 본 그녀의 눈매가 표독스럽게 변했다. 그제야 설약은 주석하와 주소은이 닮았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흥, 남매가 쌍으로 버릇이 없군.”
유비연이 주소은을 끌어 뒤로 물리는 사이 녹윤영이 앞으로 나섰다.
“곤륜파면 다야?”
녹윤영은 세력이 만만찮은 혼천교이니 곤륜파라 해서 위축될 리 없었다.
“넌 또 뭐야?”
눈썹을 올리던 설약은 검은 옷에 미모가 돋보이는 녹윤영의 정체를 알아봤다.
“어? 흑접? 흑접이 여기 어떻게…….”
흑접이란 말에 당문 두 남자가 전의를 불태웠다. 흑검문과 흑접은 다르다. 흑검문은 이름 없는 문파이지만 흑접은 혼천교 소속이니 그들이 설약을 도와야 할 명분이 충분하다.
설약에게 호감이 있던 당호, 당욱은 마치 그녀를 호위하듯 양옆에 포진했다.
기세가 오른 설약이 녹윤영에게 비웃음을 던졌다.
“끼리끼리 논다더니. 같은 사파라고 몰려다니는 거 봐.”
유비연이 안면을 굳히며 조용히 타일렀다.
“소저께서 먼저 비난하셨으니 조용히 사과하고 끝내요.”
“흥! 넌 또 뭐야? 내가 왜? 틀린 말 했어? 저 자식이 버릇없는 건 세상 사람이 다 안다고!”
설약이 주석하를 손가락질하며 맹렬히 비난했다.
허윤은 사매를 말리지 못해 난감한 표정으로 주석하에게 눈짓했다. 미안하다는 의사 표시다.
“사과하지 않겠다 이거지?”
급기야 녹윤영도 연검을 뺐다.
성질 급한 두 여인은 곧바로 맞붙었다. 검을 부딪치자 주변의 대나무가 쑥쑥 잘려나갔다. 두 사람 모두 대단한 무공실력이라 그 기세가 사뭇 놀라웠다.
주석하는 이런 싸움을 바라지 않았다. 설약이 그를 비난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보니 무덤덤했다. 무엇보다 이 싸움에서 주소은이 다칠까 염려됐다.
설약과 녹윤영의 싸움이 거칠어지자 주석하는 결심을 굳히고 두 사람 사이에 뛰어들었다. 그는 녹윤영을 한쪽으로 밀고 설약의 검을 대신해서 받았다. 당연히 지금 빈손이었기에 맨손으로 설약의 검을 잡았다.
턱!
그에게는 별 것 아닌 행동이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경악할 만한 일이었다. 설약도 만만찮은 무공 수준인데 그 검을 맨손으로 잡았으니 엄청난 고수임을 암시했다.
“이익! 손 놔!”
치욕을 당했다고 느낀 설약이 검을 붙잡고 발버둥 쳤다. 그때 당문의 두 형제가 다급하게 뛰어들었다. 설약이 위험하다고 느끼자 두 사람을 앞뒤를 가리지 않았다.
상대는 흑도이고 충분히 위협적인 고수였다. 두 형제가 이런 위험인물을 상대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였다.
당호와 당욱은 주석하의 좌우에서 덤벼들면서 허공으로 손을 휘저었다. 하얀 분말이 주석하에게 눈처럼 쏟아졌다.
“독이다!”
놀란 유비연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녀는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당호, 당욱을 쳐다봤다. 지금은 생사를 걸고 싸우는 게 아닌 기껏 작은 시비일 뿐이다. 그런데 독을 사용하다니! 아무리 독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당문이라지만 당문은 정파가 아니던가. 정파가 이런 식으로 나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다시 정파에 회의가 드는 순간이었다.
정작 주석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독에 중독되지 않는다는 자신감이 있기에 그는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약간 피부가 따끔거린다고 느끼는 순간 단전에서 독군의 내력이 잠을 깨고 한바탕 혈맥을 순환했다. 동시에 따끔거리는 증상도 바로 사라졌다.
주석하가 꼼짝도 하지 않고 노려보자 당호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넌 중독됐어!”
당호는 가문의 비전절기를 의심치 않았다. 당욱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주석하의 앞에서 거들먹거리며 비웃음을 날렸다.
“요즘 덕양에서 이름 날린다는 고수가 네놈이냐? 감히 정파인 백호문과 검우방을 건드려? 하루가 지나기 전에 네놈은 핏물로 화할 것이다. 살고 싶으면 꿇어!”주소은은 얼이 빠졌고 녹윤영과 유비연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주석하의 반응을 살폈다.
유비연이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해약을 내놔!”
“흥! 해약? 모두 꿇어!”
당욱이 의기양양하게 주석하의 앞에서 가슴을 쭉 폈다.
퍽!
순간 주석하의 주먹이 녀석의 가슴을 강타했다.
당욱은 그대로 뒤로 날아가 대나무 울타리에 처박혔다.
“어? 주, 중독되지 않았나?”
당황한 당호가 황급히 뒤로 물러나며 주석하를 경계했다. 주석하는 싸늘한 표정으로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 순간 당호의 머릿속은 오직 하나였다. 이자는 위험인물이다. 당욱을 해친 자이고 경미한 독이 통하지 않는 사파인이다. 이자는 당문의 원수다.
차분하게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그는 재빨리 품속에 손을 넣었다가 주석하를 향해 홱 뿌렸다.
뿌연 분말이 주석하에게 쏟아졌다.
치이익-
앞서 뿌린 독과 비슷해 보였으나 실상은 완전히 달랐다. 놀랍게도 이 분말은 엄청 독해서 닿자마자 독연을 뿜었다. 분말이 떨어진 주석하의 옷에 구멍이 뚫리고 탁자는 시커멓게 변색했다.
으드득-
주석하가 주먹을 꾹 쥐었다. 지금 그의 몸 내부에선 다시 독군의 내력이 온몸을 휘젓고 있었다. 다행히 당호가 뿌린 독은 주석하를 어떻게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옷은 무사하지 못해 탈색되어 연기가 피어올랐다.
분노한 주석하는 가볍게 손을 저었다. 물론 독을 뿌린 것은 아니었다. 절정의 허공섭물이었다.
“어어!”
놀랄 일이 벌어졌다.
그의 손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당호의 몸이 붕 떠오르더니 대나무에 그대로 처박혔다. 그 순간 대나무가 부러지고 부러진 대나무 일부가 당호의 가슴을 꿰뚫었다.
“으악!”
사람들은 주석하의 무시무시한 신위에 얼이 빠졌다. 방금 그가 당호를 팽개치는 장면은 웬만한 고수라도 불가능한 가공할 무위였다. 정파십존이나 흑도팔군이라면 이런 무위가 가능하겠지만 허공섭물로 상대를 제압하는 방식은 비효율적이라 실전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다.
주석하를 아는 사람도 놀랐고 그를 제대로 모르던 허윤과 설약은 더욱 놀랐다. 눈앞의 주석하는 예전에 보았던 사람이 아니었다.
울타리에 처박혀 간신히 몸을 일으키던 당욱은 당호의 죽음에 사색이 된 채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했다. 저런 괴물을 상대로 싸움을 걸었다니. 독이 전혀 통하지 않는 저런 자가 있었다니.
멍한 상태로 당호를 바라보던 당욱은 자신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는 주석하와 눈이 마주쳤다.
“으으으! 괴, 괴물…….”
“인생에선 할 일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는 법이다.”
“으으으!”
“네놈은 독을 쓰지 말아야 했다. 썼으면 그 책임을 져라! 네놈 목숨은 소중하고 다른 목숨은 중요하지 않다더냐?”
주석하는 싸늘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욱은 주석하를 외면하며 도망쳤다. 남은 동료를 내버려 두고 대나무 숲으로 돌진했다.
주석하가 손을 젓자 대나무 조각이 빛살처럼 당욱에게 날아갔다.
푹!
“크악!”
정확히 가슴을 꿰뚫린 당욱이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순식간에 두 사람을 처리한 주석하는 천천히 옆을 돌아봤다. 벌벌 떨고 있는 설약과 허윤이 보였다.
“으으, 다, 당신…….”
설약은 겁에 질려 제대로 말을 내뱉지 못했고 허윤은 사매를 구하려고 재빨리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다.
“주, 주 공자!” 허윤은 결사적이었다. 그는 주석하의 심성을 알기에 어떻게든 분노를 누그러트리려 애썼다.
설약까지 해치우려던 주석하는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그가 봤던 허윤은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단지 사매인 설약이 재수 없었을 뿐.
“주 공자!”
뒤에서 유비연마저 그를 말렸다.
“앞으로 다시 보지 않도록 합시다.”
간신히 분노를 억누른 주석하는 허윤과 설약에게 경고한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쓰러진 두 사람과 허윤, 설약을 바라보던 녹윤영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주석하를 따라 후다닥 뛰어갔다.
유비연은 주소은을 부축하며 다독였다.
“괜찮아요?”
주소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연신 독에 물들어 시커멓게 변한 탁자를 두려운 표정으로 흘겨봤다. 자칫 죽을 뻔했다는 생각과 함께 옆에서 자신을 부축해주는 유비연이 새삼 고마웠다. 그녀는 유비연의 다정다감한 성격이 마음에 들었다. 다만 화산파라는 신분이 장벽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