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악연 (2)
주석하는 한숨을 내쉬며 찻집 앞에서 기다렸다.
요즘 이상하게도 자주 말썽이 일어난다. 저들과 함께 다니면 예기치 않은 일이 발생했다.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는데 자꾸 험한 모습만 보여주고 있다.
흑검서생이라……. 그딴 별호가 있든 없든 상관없지만 좋은 뜻으로 붙인 이름은 아닌 듯했다. 이제는 확실하게 흑도임을 강호에 알린 기분이다.
“여기 있었네요.”
녹윤영이 어느새 다가와 그를 조심스럽게 다독였다.
“신경 쓰지 말아요. 그 두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면, 아니 당신의 무공이 조금만 약했다면 죽은 사람은 당신이었을 테니까요.”
알고 있다. 강호는 약육강식의 정글이니. 다만 이번 생에는 그런 험난한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았는데. 한적한 덕양에서 유유자적 살고 싶었는데 어째 계속 발을 잘못 들이는 기분이다.
“만일 당문에서 뭐라고 트집 잡으면 혼천교를 내세워요. 그럼 당문에서도 함부로 어쩌지 못할 거예요.”
주석하는 녹윤영에게 빙그레 미소를 보냈다. 그래도 그를 응원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주소은을 부축한 유비연이 찻집을 나왔다.
“마지막에도 이런 모습을 보이게 되어 미안합니다.”
주석하가 유비연과 녹윤영에게 사과했다. 오늘은 두 사람이 떠나는 날이고 그들을 배웅한답시고 성도에 나왔다가 이 지경이 됐다.
“아뇨, 저들이 무례했던걸요.”
유비연은 방금 주석하의 무위에 놀라기도 했지만 당문의 치졸한 행동에 더 큰 분노를 느꼈다. 그렇다 보니 정파라고 당문을 옹호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이번에 돌아가면 정파와 사파의 기준을 새로 고민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유비연과 녹윤영은 목적지가 같은 화산이어서 동행해야 했다. 정과 사의 다른 길을 걷는 두 사람이기에 이질적이었으나 지금까지 두 사람이 보여준 모습을 보면 서로 도와가며 사이좋게 화산으로 돌아갈 것이다.
주석하는 주소은과 함께 두 사람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특별히 아쉬울 것은 없으나 어쩐지 옆구리가 빈 것 같아 허전했다. 혼군의 당부를 거절할 생각은 없기에 언젠가는 다시 혼천교를 들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화산파도 명아를 보러 오래지 않아 다시 방문하게 되겠지.
주석하는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옆에 선 주소은은 유비연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흐린 하늘에서 눈이 내렸다. 첫눈이다. 겨울이 오려나 보다.
**
수많은 산봉우리가 삐죽삐죽 솟은 험준한 산맥 한가운데 거대한 성이 자리했다.
바로 십만대산이라 불리는 중원의 오지. 고산준령의 중심에 마교의 터전이 자리 잡고 있었다.
중원 무림의 역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바로 마교다. 마교가 융성할 때 중원 무림은 숨을 죽였고 마교가 쇠락하면 중원은 번영을 구가했다.
마교 총단의 중심에는 황궁에서나 볼 수 있는 커다란 대전이 있고 그 대전의 단상에 황금빛 옥좌가 마련되어 있었다. 이 옥좌의 주인이 바로 마교의 교주인 천마였다.
대략 불혹 중반 정도 되었을까. 중년의 절정에 이른 건장한 체구의 남자가 옥좌에 앉은 채 세상을 오시하고 있었다. 바로 천마였다. 그의 머리카락은 나이답지 않게 윤기가 흘렀고 짙은 검미에 두툼한 입술, 각진 턱은 영웅의 풍모 그대로였다.
흡사 일국의 황제를 보는 듯한 중후함은 태산처럼 상대를 압도했다. 일국의 제후라 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기품을 발산하며 천마는 대전에 무릎을 꿇은 한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상입니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인물은 홍의를 입은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치렁치렁한 머리가 어깨너머로 등을 덮었다.
“일어나라.”
천마의 명이 떨어지자 여인이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바로 우설금이었다. 천마를 보좌하는 마교수호사령(魔敎守護四靈)의 일인, 단천마령(丹天魔靈)이 바로 그녀였다.
우설금은 천마가 지시한 임무를 수행하고 지금 마교로 막 복귀한 상태였다.
“그래, 임무를 잘 수행했구나. 비밀을 염탐한 일검신성을 죽이고 남궁세가에 잠입하여 정사의 대립을 유도했다지……. 만리안석을 찾지 못했으나 정사의 의심을 불러왔으니 그만하면 충분하고…….”흡족한 표정으로 우설금을 평가하던 천마가 다시 물었다.
“특별한 일이 있나?”
“조금 걸리는 인물이 있습니다.”
“누구지?”
“주석하라는…… 흑검문의 소문주입니다.”
“흑검문이라…….”
천마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눈을 빛냈다. 그의 눈빛은 심해처럼 깊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헤아리기 어려웠다.
우설금은 조용히 시선을 내리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일검신성을 추적하다가 우연히 만났습니다.”
“그를 죽였나?”
“아닙니다. 그자는 우리의 비밀을 전혀 모릅니다.”
“흐음, 그래?”
천마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우설금을 쓱 훑었다. 상대를 옥죄는 위압감에 우설금은 숨이 턱 막혔다.
“처음 그를 보았을 때는 특별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지금은 강호에서 무시하기 힘든 존재로 변신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는 혼군의 진전을 이어받았고 얼마 전에 신창패존을 죽였습니다.”
“호오, 그래? 운명이구나.”
“예?”
“아니다, 계속 말해보아라.”
우설금은 주석하의 신변을 상세히 보고했다. 그녀가 이처럼 한 인물을 중시한 경우는 이례적이었으나 천마는 별다른 언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의 무위는 흑도팔군에 근접한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그를 어떻게 할까요?”
천마의 안면에 기이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벌써 두각을 드러내다니……. 특별한 놈이로군.”
마치 주석하를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은 반응을 보였다.
“후기지수 가운데는 사실상 최강입니다.”
“네가 처리를 묻는 특별한 이유가 있겠지?”
“그가 양면성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기존 무림의 정사 구도를 깨트릴 수 있는 중요한 패이면서 한편으로는 정사대전을 유도하는 우리의 목적에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겠지. 그러리라 생각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 천마는 별다른 반응 없이 우설금을 찬찬히 살폈다.
“그래서 녀석을 죽이고 싶은가?”
우설금은 대답할 수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주석하는 그녀에게 죽일 수도 죽이지 않을 수도 없는 이상한 존재로 부상했다. 무엇 때문인지는 그녀도 알 수 없었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우설금의 태도에 천마는 대단히 흡족했다.
“지금 우리의 목적은 중원 무림의 약화다. 녀석이 정파십존 한 명을 죽였다니 우리에게는 이득일 터. 우리가 직접 나서는 것보다 더 좋은 일 아니냐?”
“그렇습니다.”
“우리는 계획대로 간다. 당분간 녀석에게 신경 쓸 필요 없다. 우리에게 해가 되지 않는 한. 다만 그를 잘 살펴보거라.”
천마가 주석하 제거를 반대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우설금은 평소와 다른 천마의 태도에 의혹을 품었으나 금방 머릿속에서 지웠다. 천마를 의심하는 것은 불경이고, 따지고 보면 주석하를 대하는 그녀의 태도 역시 의문투성이였으니까.
“물러가라. 겨울이 지난 후 다시 중원으로 나갈 일이 있을 테니.”
우설금은 공수를 한 채 깊숙이 허리를 굽혔다.
우설금이 사라진 후에도 천마는 무심한 시선을 대전에서 거두지 않았다. 그의 안색은 실로 복잡했다.
“주석하라…… 의외로 녀석이 큰 변수를 불러오는군.”
천천히 천마는 주먹을 꽉 쥐었다. 머릿속에서 수십 년에 걸친 오랜 세월이 조용히 흘러갔다.
주석하. 무한회귀공의 이능이 살려낸 역천자이자 회귀자가 아니던가. 천마는 무한회귀공을 익혔고 회귀를 주도했기에 지금부터 오 년 후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안다. 이제는 사 년 후인가. 미래의 그때 뇌군이 무한회귀공을 익히고 주석하를 오 년 전, 현재로 보냈다.
천마는 이것이 큰 변수가 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거대한 중원의 운명을 짊어지기에, 도도하게 흘러가는 중원의 역사를 바꾸기에 주석하라는 인물은 너무 보잘것없었으니까.
애초에 뇌군의 계획을 방해하지 않고 주석하를 살려놓은 이유도 바로 이런 점 때문이었다.
무한회귀공을 이용해서 고금제일을 넘어 영원히 중원 무림을 지배하려는 그의 야심에서 주석하는 아무런 변수도 일으킬 수 없는 존재였으니까. 아니 어쩌면 그의 야심을 지원해줄 조력자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마치 우설금처럼.
분명한 사실은 현재의 주석하는 그에게 실보다 득을 주는 인물이었다. 적어도 주석하의 움직임은 아직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천마는 흑도팔군이 갇힌 절벽 아래에 몰래 무한회귀공을 숨겼고 이를 뇌군이 찾아내어 익히도록 유도했다. 주석하 같은 변수를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주석하는 훌륭하게 그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흥미롭단 말이지…….”
천마의 입가에 음산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이미 여러 차례 세월을 반복해온 그에게 주석하는 흥미로운 장난감이었다.
**
눈이 많이 왔다.
다른 해에 비해 겨울은 춥고 길었다.
주석하는 흑검문에서 두문불출하며 무공을 익혔다. 비록 그는 최강의 내공을 얻었으나 무공은 이를 따르지 못했다. 게다가 그는 천재가 아니었다. 비록 남보다 익힘이 훨씬 빠르다고 하나 흑도팔군의 고절한 무공을 며칠 만에 숙달할 그런 천재는 아니었다.
그래서 흑검문에 처박혀 혼군의 무공을 새롭게 익히고 악군의 음공과 기의 운용도 다시 정진했다. 화존의 보법을 열심히 수련했고 남은 시간에는 암군이 전수한 검법과 뇌군이 남긴 진식까지 열심히 파고들었다.
하나하나가 지고무상한 절기임에도 주석하는 막힘이 없었다. 이제는 기의 운용도 완벽해졌고 초식 또한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졌다.
“악군이나 혼군과 싸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그가 지닌 내공은 악군이나 혼군의, 지금부터 사 년 후의 내공이니 절대 현재의 그들 대비 적다고 할 수 없었다. 이미 신창패존과 생사결을 벌인 경험이 있기에 주석하는 정파십존이나 흑도팔군의 수준을 대충 가늠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처럼 자신감을 내비쳤다.
다만 짐작 불가한 인물이 있긴 했다.
바로 우설금이다. 우설금의 무공은 만리안석을 쟁취할 때 조금 경험하긴 했다. 다만 그때 본 무공은 그녀의 일부였다. 그렇기에 지금도 여전히 우설금에게만은 장담할 수 없었다. 아마 마교라는 그녀의 배경이 전생을 떠올려서 그런 듯하지만.
“무한회귀공은 마교에 있는데…… 내가 회귀자가 된 이유는 뭘까?”
주석하가 품은 가장 큰 의문이었다. 이 의문의 답변을 뇌군 본인도 하지 못했다. 뇌군도 사 년 후 어떻게 자신이 무한회귀공을 익히게 되었을지 전혀 추측하지 못했으니까.
이 의문을 떠올릴 때마다 주석하는 어딘지 모르게 답답함을 느꼈다.
이럴 때는 백화루를 상상하면 된다. 삶의 최종 목표는 백화루주다. 세상의 걱정거리를 떠난 유유자적한 삶이다.
백화루가 그리워진 주석하는 오랜만에 덕양 중심가에 나갔다.
눈이 발목까지 덮인 길을 따라 한겨울의 정취를 만끽하며 백화루 앞에 섰다. 과연 백화루는 미래의 주인을 반기고 있었다.
“크크, 내가 왔다!”
마치 미친 사람처럼 주석하는 한바탕 소리를 지르고는 백화루로 들어갔다.
그를 알아본 점소이가 내부로 전갈을 보냈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어디로 모실까요?”
백화루 총관이 살갑게 물었다.
“그냥 이 층에서 술 한 잔하고 갈 거네.”
혼자서 굳이 별채를 차지할 생각은 없다. 사람들과 부대끼는 것도 삶의 재미니까.
주석하는 머리를 숙이는 총관을 뒤로하고 계단을 올랐다. 평소 그가 자주 앉는 창가 자리가 어느새 비어 있었다. 갑질이긴 한데 왠지 고개가 뻣뻣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