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103화 (103/273)

103화 빙군과 염군 (1)

창가에 앉아 저잣거리를 내려다봤다.

바쁘게 오가는 나그네, 물건 파느라 정신없는 노점상 주인, 호기심을 드러내며 뛰어다니는 아이, 물건을 두고 흥정하는 아낙네. 평화로운 일상은 지켜보는 자의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주석하는 이런 시간이 좋았다. 험난한 강호를 전전하기보다 이처럼 평화로운 일상을 바라보며 그들과 동화하는 이 시간이 정말 좋았다.

그가 백화루주가 되고자 하는 결심은 이런 부분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탁자 앞에 작은 술병과 안줏거리가 놓였다. 혼자이지만 시간을 보내기에 적적하지 않다. 주석하는 뿌듯한 기분을 만끽하며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려 했다.

“공자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네?”

얼떨결에 대답하며 앞을 바라보니 예쁘장한 여인이 서 있었다. 하늘하늘한 옷차림에 짙게 바른 화장, 나긋나긋한 미소……. 이곳 백화루에서 술을 따르는 여인이다. 여인의 얼굴이 익숙한 게 아마도 지난번 녹윤영과 유비연을 데리고 왔을 때 시중을 들었던 여인 같았다.

“또 오셨네요.”

여인이 환하게 웃으며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본능적으로 주석하는 여인에게서 조금 떨어졌다. 은근히 여인이 그에게 바짝 붙어왔다. 주석하는 다시 한 치가량 떨어지며 미소를 지었다. 더 다가오지 말라는 경고다.

“술 드릴게요. 오늘은 무슨 일로 오셨어요?”

여인이 술잔을 가득 채워 그의 앞에 놓았다.

“이름이?”

“전 명월이에요.”

기루에서 흔한 이름이다.

문득 백화루란 이름을 떠올린 주석하는 여인의 용모를 살피며 물었다.

“여기에 정말 백 명이나 있어요?”

“아, 백화(百花)요?”

술잔을 입에 대자 답이 돌아왔다.

“백은 과장이고요, 스무 명은 넘는 것 같아요. 정확한 수는 총관 나리 외에는 아무도 몰라요. 여인에…… 관심 많아요?”

관심은 무슨. 그가 여자에 관심이 많았다면 몇 명인지 모를 리 있나. 여기에 한두 번 온 것도 아니고. 아니, 그를 따라다녔던 녹윤영에게 벌써 찝쩍대며 수작을 걸고도 남았을 것이다. 녹윤영뿐인가. 우설금에게도……. 아니지, 우설금에게 찝쩍댔으면 이미 저세상에 가 있겠지.

별별 생각이 머릿속을 떠돌자 주석하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백이 안 되면 사기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명월을 살폈다. 분명히 평범한 미모는 아닌데 우설금에 비하면 그야말로 태양 앞의 반딧불 수준이다.

그를 노려보는 우설금의 얼굴이 그려지는 순간 주석하는 재빨리 자세를 바로 하고 눈앞에서 그녀를 지웠다.

‘하아, 난 앞으로 혼인하기는 걸렀어.’

여자를 볼 때마다 우설금의 아름다운 얼굴이 떠오르고 그 얼굴이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그때마다 경기를 일으킨다.

“무슨 생각 하세요?”

“아, 가격이 얼마인가 해서…….”

“호호, 제 가격요? 전 하룻밤 시중을 들지는 않는답니다.”

명월이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주석하는 내심 한숨을 쉬었다. 말이 엇나갔다. 그게 궁금한 게 아니었는데. 이 백화루를 사려면 대체 얼마가 필요한지 그게 궁금했던 건데.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자니 명월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물론 공자님이라면…….”

“컥!”

주석하는 마시던 술을 그대로 뿜었다.

**

주석하가 술을 마시는 이 층에 나이 지긋한 두 사람이 들어왔다.

인상마저 특이한 그들은 주변을 휙휙 둘러보다가 주석하의 한 칸 건너 탁자에 앉았다.

“흠, 여기가 괜찮군. 분위기도 좋고. 저기 덜떨어진 녀석이 조금 눈을 거슬리게 하네만.”

한 사람이 창가에 자리한 주석하를 턱으로 가리켰다.

다른 사람이 피식 웃으며 맞은편에 앉았다.

“젊을 땐 원래 저렇게 노는 법이지. 저러다 세월이 가고 나면 후회하는 법일세.”

적당히 맞장구를 치며 끼니를 때울 요리를 시켰다.

이 두 사람의 모습은 누가 봐도 특이했다. 두 사람의 나이는 대략 예순. 한 사람은 눈처럼 하얀 수염을 길렀고 피부도 수염처럼 새하얗다. 흡사 여인일지라도 그만큼 희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다 옷마저 흰색이라 전신을 하얗게 물들였다.

다른 한 사람은 머리카락이 붉었다. 게다가 피부마저 붉었다. 거기에다 적의를 입고 있으니 흡사 전신이 불에 타오르는 듯했다.

이들은 한 지역의 패자로 군림하며 강호를 호령하는 인물이다. 흑도팔군에 속한 빙군과 염군. 두 사람은 주석하를 찾아 이곳 덕양까지 왔다. 다만…… 지금 코앞에 보이는 덜떨어진 녀석이 주석하란 사실을 꿈에도 몰랐다.

“여기가 덕양이냐?”

음식을 내려놓는 점소이에게 빙군이 퉁명스럽게 확인했다.

“아시네요. 작은 동네지만 있을 건 다 있습니다. 특히 우리 백화루는 성도에서도 보기 힘든 절세미녀들이 쫘악…….”

“흐흐, 좋아, 좋아.”

빙군이 만족해서 수염을 어루만졌다.

“동네가 좁으니…… 녀석을 찾기 어렵지 않겠군.”

“그렇지. 숨어봐야 벼룩이지.”

점소이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떤 요리를 드시겠습니까?”

“흐흐, 난 닭으로 주게.”

“난 오리.”

두 사람은 생긴 것만큼이나 다른 종류를 주문했다.

그들은 주석하를 노리고 이곳 덕양까지 먼 길을 왔다.

그들을 움직인 것은 뇌군의 서신이었다. 그 서신에는 혼군과 악군의 전인이 그들을 찾아갈 거라고 했다. 향후 흑도를 일으킬 중요인물이니 의기투합하라는 그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들은 그 직후 익명의 다른 서신도 받았다. 그 서신에는 혼군과 악군의 전인이 흑도를 일통할 야심을 품고 있다고 했다.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그 서신은 교묘하게 그들의 자존심을 자극했고 잠자던 명예욕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염군이 조사한, 주석하가 얽힌 사건까지.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북해에서 이곳까지 남하하면서 무수히 많은 계획을 세웠다가 지웠다가 반복했다.

당연히 그들의 욕심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불타올랐다.

“바로 쳐들어갈 건가?”

빙군이 닭다리를 물어뜯으며 호기롭게 물었다.

“그건 하수들 짓이고…….”

나름 머리를 굴리는 염군은 오리 다리를 손으로 찢었다.

“겁이 나나?”

“그깟 애송이를 누가 겁내?”

두 사람이 덕양까지 먼 길을 마다하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천하제일이 될 기회를 포착했다는 느낌이었다. 뇌군의 의견처럼 그 청년이 그들과 동일한 기운을 품고 있다면…… 그 자식을 죽이고 그 기를 취하면 단숨에 그들은 두 배의 내공을 가지게 된다.

현재 그들의 내공만으로도 천하에 겨룰 자가 없는 판국에 그 두 배가 된다면? 앞으로 흑도팔군이건 정파십존이건 모두 발아래에 굴복시킬 수 있다. 명실상부 천하최강이 되는 것이다.

누가 이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지금 현재 그들에게 가장 큰 장애물은 주석하가 아니었다. 바로 맞은편에 앉은 상대방이었다. 주석하에게 내공을 빼앗는 것은 당연하다. 자신들의 무공을 고려하면 이는 필연이다. 다만 천하제일인은 두 사람이 될 수 없다. 반드시 자신이 되어야 하고 상대를 제거해야 한다.

비록 주석하를 해치우기 전까지는 협력하지만 그 직후에는 무조건 상대를 죽여야 한다.

빙군은 피식 웃으며 젓가락을 놀렸다.

염군 이 자식은 혼자만 머리를 쓴다고 자만하지만 세상에 똑똑한 사람이 혼자뿐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그 자만이 죽음으로 인도할 테니까.

‘내공만 취하고 나면 네 녀석도 끝이지.’

빙군은 음산한 미소를 짓는 염군에게 술을 권했다.

“자, 한잔하게.”

딴마음을 품고 손으로 오리고기를 뜯던 염군의 눈에 창가의 주석하가 다시 들어왔다. 나이든 노인이 따라주는 술을 받는 자신과 달리 저 청년은 어여쁜 여자가 술을 따르고 있었다.

“금수저인가 보군.”

염군은 갑자기 기분이 팍 나빠졌다. 자신은 흑수저다. 어릴 때부터 사막을 전전하며 고생이란 고생을 다 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개세신공을 익혀 흑도팔군까지 성장했다. 그 과정은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눈앞의 저 청년은……. 아니 빙군만 해도 북해빙궁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군주로 군림했던 자다. 고생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놈이다. 무공도 편하게 가문의 비전을 익혔으니 그와는 대조된다.

세상이 이렇게 불공평하다니!

갑자기 속에서 열불이 치솟았다.

“자, 이제부터 녀석을 낚을 계획을 짜보세.”

빙군이 느긋하게 턱짓으로 염군을 재촉했다. 떠날 때부터 계획을 세우는 임무는 염군의 몫이었다.

“끙.”

염군은 불만을 가까스로 죽이고 그동안 머릿속을 떠돌던 내용을 정리했다.

그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모두 다섯 명이나 되는 중년 남자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탁자 하나를 잡았다. 묘하게 그들의 차림새가 염군을 자극했다.

“당문오객인데?”

“사천당문?”

염군의 중얼거림에 빙군이 반문하며 슬쩍 몰려든 녀석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곳이 사천이니 사천당문 사람들이 눈에 띄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특히 당문오객(唐門五客)은 사천당문의 해결사로 이름 높은 자들이다. 그들은 당문이 길러낸 인재로 당문 전력의 핵심이었다. 예전에 곤륜파에 곤륜십이검수가 있었다면 당문에는 당문오객이 있다고 할 정도였다. 특히 이들은 용독술과 암기술에 특별한 재능을 보였다.

“흐음, 당문오객이 무슨 일이지?”

사천당문은 다른 문파에 비하면 활발히 활동하지 않았다. 무림맹에도 장로 두 사람과 그 아래 제자 한 사람만 파견할 정도로 외부에 관심이 없었다.

빙군과 염군은 관심을 끄려 했다. 지금 그들이 직면한 계획을 짜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으니까. 그런데 그쪽 탁자에서 소곤소곤 들려오는 대화 내용이 그들의 귀를 거슬리게 했다.

“그 자식은 최근에 덕양에서 잘 나가는 놈이야. 백호문, 검우방 사건을 보면…… 아니 셋째, 넷째 공자를 처리한 것만 봐도 보통 놈이 아니지. 굳이 우리가 맞붙어서 힘을 뺄 이유가 없어.”

“그렇지. 그냥 우물에 독을 풀자고. 제깟 놈들이 어쩌겠어?”

“어차피 실패해도 상관없잖아? 그땐 힘으로 누르면 되니까.”

“귀찮군. 그냥 발라버리자! 솔직히 일 년 전만 해도…… 사천에서 흑검문이 어디 붙었는지도 몰랐잖아?”

순간 빙군과 염군의 안색이 확 변했다.

흑검문? 어째 목표가 같은 것 같은데? 이 자식들도 그놈을 노리나? 그놈 내공을?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사천당문이 두렵진 않지만 괜히 사천당문과 엮이고 싶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독을 쓰는 놈을 가까이해서 좋을 게 없다.

“원수를 갚아야지. 확실하게.”

“우리가 언제 이렇게 물렁했어? 물론 위에서는 당분간 지켜보자고 하지만 그게 말이 되는 소린가? 당문의 자존심이 있지.”

빙군과 염군은 무슨 말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사천당문에서 흑검문을 노린다는 사실만은 짐작했다. 다 잡은 먹이를 넘겨줄 수는 없다. 적어도 당문에서 흑검문을 치기 전에 그들이 먼저 주석하를 잡아서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

“골치 아파졌군.”

빙군이 미간을 찌푸리자 염군이 손을 저었다.

“아니네. 오히려 기회가 될 수도 있어.”

빙군의 의문을 무시하고 염군은 당문오객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계속 듣고 있으려니 당문의 목적이 더 뚜렷해졌다. 이건 문파 간의 복수전이었다. 이를 이용하면 주석하를 그들의 뜻대로 쉽게 잡을 수 있다.

끼니를 채운 당문오객이 자리를 떠나고 그들이 먹다 남은 음식물이 쌓인 탁자만 횅하니 모습을 드러냈다.

빙군이 당문오객이 앉았던 탁자와 주석하 쪽을 연신 번갈아 쳐다보다가 점소이를 불렀다.

“너, 이리로 좀 와봐라.”

“왜 그러십니까? 어르신?”

점소이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이게 말이 되냐? 저놈들은 만두를 공짜로 주고 저쪽은 여자를 붙여주고, 우리는 왜 아무것도 안 주느냐?”

“예?”

황당한 표정의 점소이에게 빙군이 은근한 협박을 가했다.

“북해에서도 이런 식으로는 장사 안 해! 요즘 단무지 안 줬다가 문 닫은 가게 소문 못 들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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