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104화 (104/273)

104화 빙군과 염군 (2)

점소이는 할 말을 잃었다.

당문오객은 백화루의 주요 고객이다. 당문에서도 백화루를 자주 방문한다. 단골에게 잘 대접하는 것은 상술의 기본이다. 위에서 가끔 특별 지시를 내리기도 하고.

거기에 주석하는 이곳을 관할하는 흑검문 소문주다. 문제가 생기면 손을 빌려야 하는 방패막이다. 그러니 당연히 여자를 붙여 환심을 사야 한다.

그런데 눈앞의 이 두 늙은이는…….

“저분들은 저희 가게 단골이십니다.”

“네놈은 우리가 처음 왔다고 바가지를 씌우는 거냐?”

빙군이 점소이를 노려보며 질책했다. 무심결에 뻗은 빙군의 매서운 눈빛에 점소이가 기겁해서 고개를 숙였다.

상대가 무림인이라는 생각이 들자 점소이는 재빨리 꼬리를 내렸다.

“그, 그게 아니옵고…….”

“그럼 대체 뭐냐? 우리도 만두를 주든가 아니면 여자를 붙여주든가.”

“아, 알아보겠습니다.”

점소이가 고개를 숙인 후 후딱 아래로 내려갔다.

빙군이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이것들은 꼭 한소리 해야 정신 차린단 말이야.”

“너무 야단치지 말게. 우리의 사명을 생각해야지. 우리 정체가 알려져도 골치 아파. 벌써 문제를 일으키면 안 돼.”

겉보기에도 두 사람의 조합은 너무 특이해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않을 수 없건만 염군은 조용히 빙군을 달랬다.

생각할수록 염군의 말을 반박할 수 없기에 빙군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점잖은 척했다.

“방금 그 자식들을 이용해서 작전을 짜보자고. 어차피 패 죽일 수도 없잖아? 일단 그 녀석 호감을 얻은 다음에 기습해서 목표를 달성하자고.”

대충 작전을 머릿속에서 세운 염군이 설명을 시작했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점소이가 후다닥 올라왔다. 그는 매우 곤란한 표정으로 머뭇거리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어, 어르신……. 그, 그게 안 된답니다. 다음에 오시면 반드시 제가 책임지고…….”

“뭣이라?”

간신히 성질을 죽였던 빙군은 다시 노기가 치밀었다.

이곳에 다시 들릴 일이 있을까. 어쨌든 점소이의 대답은 당신들은 여기 뜨내기손님이니 공짜로 더 줄 수 없다는 선언이었다.

빙군의 분노를 접한 점소이는 말문이 막혔다. 자신의 수당을 떼어서라도 만두 한 접시를 공짜로 주고 싶지만 그렇게 하자니 집에 두고 온 애들이 눈에 밟혔다.

“저, 절대 어르신들을 무시해서 그런 것은 아, 아닙니다.”

“이것들이 보자보자 하니까!”

빙군의 분노가 폭발했다.

쾅!

빙군의 주먹이 탁자를 내리치자 견디지 못한 탁자가 우지끈 부러졌다.

염군은 한숨을 내쉬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남의 눈에 띄지 말자니까 결국…….

“으악!”

점소이가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평소라면 당연히 아래층으로 도망쳤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무려 이곳에는 백화루의 뒤를 봐주는, 덕양의 일인자가 있으니까.

점소이가 재빨리 주석하에게 뛰어가서 매달렸다.

“고, 공자님 살려주십시오!”

**

명월이 따라주는 술을 마시면서 주석하는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처음에는 거리를 구경하며 여유를 만끽하다가 어느 순간 주루 내부에 관심을 돌렸다. 아마도 당문오객이 들어왔을 때쯤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옷차림에서 주석하는 얼마 전 찻집에서 만났던 당문 자제 두 사람을 떠올렸다. 하지만 별생각이 없었다. 당문 사람이 이곳에 출몰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앞 탁자에 있는 두 노인을 발견했다.

겉보기에도 정말 이상한 조합이었다. 한 사람은 건장했고 한 사람은 왜소했다. 한 사람은 하얗고 한 사람은 붉었다. 한 사람은 차가운 분위기인데 한 사람은 뜨거운 분위기다. 거기다가 한 사람은 젓가락으로 닭을 먹고 다른 사람은 손으로 오리를 뜯었다.

그 흔치 않은 대조에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 와중에 그들의 행동 또한 범상치 않았다. 돈이 없는지 뭔가를 공짜로 달라고 우겼다. 급기야 겁에 질린 점소이가 주석하에게 달려왔다. 점소이가 상급자나 총관에게 달려가지 않고 그에게 왔다는 것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란 뜻이다. 하긴 탁자가 박살이 난 걸 보면…….

“하아, 오늘도 편하게 술 마시긴 글렀나…….”

주석하는 명월과 점소이에게 안심하라는 눈빛을 보내고는 목을 뻣뻣하게 세웠다.

그래도 밥값을 하게 되었으니 다행인가. 이런 일을 무탈하게 해결하면 오늘 술은 공짜가 되지 않겠는가.

벌떡 일어나서 두 노인에게 걸음을 옮기던 주석하는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기이한 느낌이 온몸을 휩쓸었다.

이들은 평범한 무림인이 아니었다. 고수 냄새가 났다.

주변을 휙 둘러보니 잘 단장된 백화루의 지붕과 기둥, 벽에 걸린 각종 장식물이 눈에 띄었다. 동시에 그날 맥없이 부서진 그 주막이 떠올랐다. 패존과 싸우다가 완전히 망가트린.

백화루에서 그런 일이 발생하면 이건 대참사다. 그의 책임은 백화루 관리일 뿐이니 당장 손해야 없다지만 훗날 이곳을 사겠다는 일념으로 가득한 그에게 이 전각이 무너지면 그야말로 재앙이었다.

‘무조건 고분고분하게. 성질 죽이고.’

주석하는 다짐을 거듭하며 부서진 탁자 앞에 섰다.

그를 노려보는 두 노인의 눈빛이 심상찮다. 그때야 주석하도 제대로 두 노인을 살필 수 있었다.

과연 우스꽝스러운 조합이긴 했다. 상반되지 않는 것이 없는 두 사람이다. 심지어 두 사람이 익힌 내공마저 달랐다. 한 사람은 극한의 무공이고 한 사람은 극양의 무공이다.

어딘지 두 사람의 기운이 편안하게 받아들여졌으나 주석하는 신경 쓰지 못했다.

“어르신, 불편한 점이 있으십니까?”

정중한 질문에 빙군이 화를 벌컥 냈다.

“이것들이 감히 나를…….”

그 순간 염군이 빙군의 손목을 잡았다. 염군이 눈빛으로 빙군을 열심히 달랬다.

‘우린 주목받으면 안 된다고. 계획대로 흑검문에 잠입하려면 남의 눈에 띌수록 불리해.’

빙군은 이 주루를 한바탕 엎어버리고 싶었으나 간절한 염군의 눈빛에 간신히 성질을 죽였다. 만두 한 접시, 술 한 병 공짜로 얻어먹는 게 중요하진 않다. 무려 무림 최강이 될 맛있는 내공이 근처에 있으니까. 자제해야 한다.

“크흠, 젊은이는 누군가?”

“전 이곳 관리를 맡은 사람입니다.”

빙군은 눈앞의 청년이 주루에서 행패를 부리는 자를 손봐주는 건달임을 금방 알아챘다. 흑도팔군인 그가 주루 일을 보는 하찮은 젊은이를 두들겨 패는 것은 일도 아니겠으나 염군의 눈치를 보자니…….

“크흠, 방금 점소이가 헛소리를 해서 말이야.”

“그렇습니까?”

주석하도 바로 눈치챘다. 점소이가 아니라 빙군의 말이 헛소리란 것을. 성질 같아서는 이 두 노인의 멱살을 확 잡고 밖에 버려버리고 싶었으나 노인의 무공을 보아하니 자칫 백화루에 피해가 갈 듯했다.

주석하도 내심 ‘아미타불’을 외치며 성질을 가라앉혔다. 아미타불? 그때 불존을 만났다가 전염된 게 분명했다.

“제가 두 어르신을 보니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이분을 보십시오. 얼마나 못 드셨으면…….”

주석하의 시선이 염군을 향했다. 체구가 거대하고 살이 찐 빙군과 달리 염군은 깡마르고 체구도 작다.

기가 막혀 말을 잇지 못하는 빙군을 향해 빙그레 미소 지은 주석하가 염군에게 물었다.

“오늘 처음 오신 것 같은데 마음 좋은 제가 한 턱 내지요. 만두를 드릴까요? 아니면 술을 드릴까요? 혹시 단무지가 부족하십니까?”

“그, 그야…… 수, 술이 필요하네.”

염군이 재빨리 빙군의 대답을 가로챘다. 어쨌든 염군이 소란을 원치 않으니 내심 만두를 원한 빙군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부서진 탁자를 쓱 훑은 주석하는 미간을 찌푸리며 정중하게 말했다.

“그럼 이쪽으로 오시지요. 거긴 탁자가 망가져서……. 제가 술을 대접해 드리리다.”

자신의 탁자로 안내하는 주석하에게 시비를 걸 수도 없어 빙군은 마지못해 일어났다. 염군은 수염도 없는 턱을 쓰다듬으며 빙그레 웃었다.

“과연 예의 바른 젊은이야.”

정작 주석하는 기분이 별로였으나 이것이 최선임을 알기에 정중하게 행동했다. 이런 고수들과 시비를 벌이지 않고 술 한 병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남는 장사다. 술값이야 백화루에 덮어씌우면 되고.

갑자기 옆에 이상한 노인 둘이 양쪽으로 앉자 명월의 안색이 잿빛으로 변했다. 명월이 주석하에게 끊임없이 구조 신호를 보냈으나 그런 눈치가 주석하에게 있을 리 없었다.

“명월아, 한잔 씩 따라드려라.”

“크흠, 과연 덕양에는 절색의 여인이 많구만.”

먼 길을 오느라 여자 구경이라고는 해보지도 못한 두 사람에게 명월의 풋풋한 향기는 큰 위안이 됐다. 게다가 술과 여인이 공짜라니.

빙군과 염군은 저절로 경계심이 풀렸다. 언제 난리를 부렸느냐는 듯 술을 즐겼다.

‘이만하면 됐나.’

주석하는 어려운 일을 해결했다고 위안하며 자리를 뜰 준비를 했다. 명월이 조금 불쌍해 보이긴 했으나 총관에게 일당을 조금 더 주라고 일러주면 충분하다.

술을 들이켠 염군이 넌지시 물었다.

“이보게 젊은이, 자네 참 친절하구먼.”

“하하, 제가 그런 이야기를 참 많이 듣습니다.”

“크험, 그래? 혹시 심부름 하나 해줄 수 있겠나?”

이것들이 동네 점소이로 착각하나? 순간 주먹이 콱 쥐어졌으나 주석하는 간신히 안면을 움직여 웃는 낯으로 바꿨다.

“물론입지요. 무엇입니까?”

“서신 하나 전해주게. 자네 이 동네 사람들 잘 알지?”

“하하, 제가 왕발 아닙니까?”

당연히 주석하는 서신을 전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어차피 다시 만날 사람도 아니고 지금 비위를 맞춰주는 것만 해도 속이 부글거릴 지경이다. 백화루주가 꿈이 아니었다면 당장 이 노인들을 혼쭐냈을 것이다.

점소이를 시켜 붓을 가져오게 한 염군이 빠른 속도로 서신 한 장을 썼다. 봉투에 서신을 봉해 넣은 그는 조그맣게 수신자를 썼다.

- 흑검문 소문주 친전.

“자, 이걸 전달해주게.”

“지금 당장 전달하겠습니다.”

주석하는 수신자를 보지도 않고 품속에 집어넣었다. 어차피 배달하지 않을 거라 수신자를 확인할 생각도 없었다. 떠날 건수가 생겼으니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다.

“과연 요즘 세대답지 않은 착한 젊은이군.”

염군이 그를 칭찬하며 빙군과 술잔을 교환했다.

주석하는 술을 한 병 더 주문한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떠나면서 그는 명월에게 눈짓했다.

‘두 사람 잘 모셔라. 안 그러면 여기 왕창 부서진다.’

‘공자님 살려주세요. 으아악.’

명월이 애처로운 눈길을 연신 보냈으나 주석하는 깔끔하게 무시하고 백화루를 떠났다.

**

흑검문으로 돌아온 주석하는 품속에 간직한 서신을 깡그리 잊어버렸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서신을 서탁 한쪽에 던졌다.

다음 날 그가 무공을 익히러 갔을 때 침소에 주소은이 찾아왔다. 빈방에 주석하가 없자 실망에 잠겼던 그녀는 방안을 치우다가 서탁에 놓인 서신을 발견했다.

- 흑검문 소문주 친전.

“이게 뭐지?”

꼼꼼하게 봉해진 서신을 들고 주소은은 의문을 품었다. 적어도 덕양 일대에서는 주석하가 서신을 교환할 일이 없다. 주석하가 문파의 일을 맡지 않았기에 모든 공식적인 서신은 주격이나 신옹에게 가야 한다.

그렇다면 이 서신은 주석하를 사모하는 여인에게서 온 사적인 편지일까?

주소은의 표정이 새침하게 변했다. 오빠 주석하를 아무 여인에게 장가보낼 수는 없다. 설사 황궁의 황녀라도 오빠에 비하면 부족하니까.

“아니면…… 설마 남궁세가에서 온 편지?”

일전에 주석하가 남궁세가에서 찾아올 거라고 했으니까. 그 구체적인 일정 통보일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주소은은 반드시 훔쳐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조심조심 서신 겉봉투를 뜯었다. 급하게 쓴, 알아먹기 힘든 글씨가 드러났다.

내용을 읽던 주소은의 입이 떡 벌어지고 눈동자는 더할 나위 없을 만큼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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