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빙군과 염군 (3)
대청에 주격과 신옹, 주소은이 마주 앉았다.
주격의 손에는 서신이 들려 있고 모두 심각한 표정으로 연신 서신만 뚫어지라 쳐다봤다.
- 오는 초하루에 흑검문에 독을 풀 것이다. 당문 제자를 죽인 복수다. 당문오객.
서신은 당문오객이 보낸 것으로 복수 때문에 흑검문에 독을 풀겠다는 내용이었다.
“으으, 이 사태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신옹이 세상이 망한 것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무려 당문이다. 흑검문과 비교할 수 없는 곳이다. 사천당문이라면 무림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흑검문이라면 아는 사람이 없다. 그만큼 양 문파는 모든 면에서 차이가 크다.
더욱 우려되는 점은 당문이 쓰는 독이다. 독에는 대처 방법이 없다. 이곳을 떠나지 않는 다음에는 문파 제자를 전부 살릴 방법이 없다고 봐야 한다.
“소문주께서 당문에 해코지를 했을까요?”
“문구로 봐선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신옹과 주격의 대화에 주소은은 안절부절못했다. 유비연을 바래다주던 날 자신 때문에 당문과 시비가 일었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창백해진 주소은의 표정에 주격이 다그쳤다.
“아는 게 있느냐?”
“그, 그게요…….”
주소은이 그날 일을 털어놓았다.
주격이 땅이 꺼지라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보통 일이 아니야. 우리가 사천당문을 무슨 수로 상대하나. 당문오객이라면 강호에 이름을 날리는 작자들 아닌가. 당문에 직접 찾아가서 어떻게든 협상을 해봐야겠네.”
“아아! 오빠가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고 혼자서 어떻게든 해결해보려고 숨기고 있었던 게 확실해요.”
주석하 바라기인 주소은이 눈물을 훔쳤다.
“그렇구나. 마음고생이 심했겠어.”
주격도 아들의 진심을 추측하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오빠의 고민을 두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한 주소은은 바로 주석하를 찾았다.
**
정작 서신 내용을 들은 주석하는 당황하지 않았다.
연무장에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던 그는 예상치 못한 서신에 미간을 조금 찡그렸을 뿐이다.
“오빠, 당문을 혼자서 해결하려고 열심히 수련하는구나?”
“그런 것 아냐.”
주소은의 착각이 기가 막혔지만, 딱히 들린 말은 아니다. 혼자서 해결할 생각이니까.
사천당문에서 쳐들어와서 위협을 가한다면 문도 전부를 보호하기 힘들지만 독을 푼다면 오히려 상대하기 쉽다는 게 주석하의 생각이었다. 독을 풀기 전에 상대를 죽이면 그뿐이다.
“도, 독인데?”
“그날 봤지? 당문의 독? 별거 아냐.”
“그래도 오빠가…….”
“난 독에 중독 안 돼. 그 자식들은 날 해칠 수 없거든. 내가 다 해결할게.”
어찌 된 일인지 모르지만 그날 주석하가 독에 중독되지 않는 모습을 봤던 그녀였다. 장담하는 주석하를 보니 어쩐지 마음이 든든해졌다.
“그럼 난 오빠만 믿을게.”
다행히 주소은이 순순히 수긍했다. 최근 들어 주석하가 뛰어들어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없었으니까.
주소은을 보낸 후 주석하는 분노로 주먹을 꽉 쥐었다.
감히 가족을, 아니 문파 전부를 건드리려 하다니. 생각해보면 당문과의 악연이 깊긴 했다. 독암쌍로와 가주의 셋째 넷째 자식을 죽였으니 당문이 분노하지 않으면 이상하다. 다만 그 모든 일은 당문이 자초한 것이다. 그가 먼저 시비를 건 적은 없다.
사실 시비를 가려봐야 어디에 쓸 건가. 강호에서는 힘이 바로 정의인 것을. 이것은 정파든 사파든 불문율의 법칙이었다.
“음, 그놈들도 당문이었나?”
주석하는 백화루에서 서신을 전했던 두 노인을 떠올렸다. 그들이 이 서신을 주었으니 아마도 당문 소속이 맞겠지? 다만 그들은 독을 풀겠다던 당문오객이 분명 아니었다. 소문에 따르면 당문오객은 훨씬 젊은 사람들로 구성되었으니까.
“그 자식들 보통이 아니던데…….”
그날 하얀 놈과 붉은 놈의 무공은 짐작건대 상당히 높았다. 덕양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고수였다. 모르긴 해도 예전에 만난 독암쌍로에 비해서도 한 수 위다. 그런 작자들이 우글거리는 당문이라면 많이 골치 아플 느낌이다.
“그래도 초하루라면 아직 시간적 여유는 있어.”
굳이 급하게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 게다가 독을 푼다면 어디에 풀지 눈에 빤히 보였다. 그때 악군의 거처에서도 독암쌍로가 독을 풀었다. 그들은 독을 식수에 풀었으니 같은 당문이라면 수법이 비슷할 것이다.
“그렇다면 독을 풀 우물이 뻔하지.”
흑검문에는 몇 개의 우물이 있다. 그 가운데 자주 사용하는 우물은 중심부에 있는 우물 하나다. 당분간 이 우물 사용을 금지하면 된다. 물론 다른 우물물도 사용하기 전에 독을 검사하고 써야 하고.
대처는 어렵지 않다지만 언제까지나 수세에 몰려 있을 수는 없다.
당문은 흑검문에 비하면 엄청나게 큰 곳이고 일전의 백호문과도 비교할 수 없다. 어떤 식으로 응징할지 고민스러운 대목이다.
“일단 그 두 놈부터…….”
그 두 놈의 정체가 불확실하지만 무공이 강한 이상 내버려 두면 분명히 화근이 될 자들이다. 그 자식들부터 없애야 한다.
주석하는 상황을 머릿속으로 그리면서 계획을 수립했다.
**
초하루가 되는 날 새벽, 주석하는 잠을 뒤척였다.
긴급대책을 수립해놓았다지만 막상 때가오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아, 당문 자식들…….”
역시 그냥 치고받고 싸우는 게 편하지, 독이나 암기 같은 암수는 골치 아프다. 왜 강호에서 당문을 적대시하지 말라고 하는지 알 것 같다.
창문을 열고 밖을 바라봤다.
찬바람이 휭 들이치는 가운데 달도 없는 어둠이 화원을 감싸고 있었다. 며칠 전에 내린 눈도 아직 녹지 않고 곳곳에 쌓여 있었다.
오늘 독을 푼다고 했으니 과연 언제쯤일까. 새벽인가? 아니면 밤인가?
아침까지 우물 부근에서 잠복할 계획이었는데 생각해보니 쓸데없는 행동 같기도 했다.
추운 겨울철 고생이 말이 아닌 데다 어쩌면 적이 노리는 게 바로 이런 불안감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주석하는 괜히 분노가 치밀었다.
“지금 그 두 놈이 독을 풀고 있으려나?”
어둠 속으로 멍하니 밖을 바라보던 주석하에게 문득 새로운 방법이 떠올랐다.
그렇다! 그에게는 만리안석이 있었다.
당문오객은 본 적이 없어서 누군지 몰라도 그날 서신을 보낸 그 두 노인의 얼굴은 기억한다. 그 자식들이 지금 어디에서 무슨 짓을 하는지 알아볼 방법이 있었다.
주석하는 재빨리 한쪽 구석에 던져둔 만리안석을 찾았다.
과연 만리안석은 영롱한 푸른빛을 발하고 있었다. 한동안 쓰지 않았더니 그 푸른빛이 무척 진해졌다. 그가 이해한 바가 옳다면 이 만리안석이 푸른빛을 발할 때는 그 신비한 능력을 이용할 수 있다.
만리안석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주석하는 내력을 조금씩 주입했다. 동시에 그날 보았던 그 두 노인을 떠올렸다. 다행스럽게도 두 사람의 외모는 무척 특이해서 절대 잊어버릴 수 없었다. 하얗고 붉은, 대조되는 두 사람을 어떻게 잊어버린단 말인가.
만리안석이 찬란한 빛을 내뿜고 그 중앙에 그 둘의 모습이 보였다. 만리안석의 가치가 확연하게 입증되는 순간이다.
두 노인이 숲속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 이 추운 날 밤에 대체 무엇을 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들은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숲속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그 주변이 이상하게도 눈에 익숙했다.
“이것들이…… 진짜 우물 옆에 있네.”
자신의 집인 데다 최근에 독을 푼다는 경고 때문에 수도 없이 살폈던 장소라 그가 모를 수 없었다. 흑검문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바로 그 우물 부근에 두 노인이 숨어 있었다.
만리안석으로 더 살필 필요도 없었다. 이것은 완전히 현장범 수준이니까. 우물에 독을 풀지 않는다면 굳이 추운 날 떨면서 저러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저들은 흑검문 사람이 아니니 흑검문에 왜 왔겠어.
“이 자식! 오늘 죽었어!”
주석하는 주먹을 불끈 쥐고 열린 창문을 통해 잽싸게 뛰쳐나갔다. 일단 독을 풀려는 저놈들부터 잡고 당문은 이를 빌미로 응징할 생각이다.
**
우물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빙군과 염군이 은신해 있었다.
숲이 우거지고 다니는 사람이 없어 몸을 숨기는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다만 가장 큰 문제는 추위였다.
곳곳에 얼음과 눈이 눈에 띌 만큼 추운 날씨였다. 물론 빙군에게 이런 날씨는 따뜻한 봄날이다. 추운 북해의 겨울에 비하면 이곳 겨울은 솔직히 여름이나 마찬가지다. 꼭 빙공을 익혀서가 아니라, 한빙지기에 단련된 몸이어서가 아니라 지금 날씨는 정말 따뜻했다. 적어도 빙군에게는.
반면 염군의 상황은 달랐다.
그는 대막에서 햇볕을 쬐며 살았던 자다. 추운 겨울에 적응이 되어 있지 않다. 대막이 남만 만큼 뜨겁지는 않다지만 북해에 비할 바는 아니다. 게다가 그는 선천적으로 추위를 싫어했다. 양강지공을 익혀서가 아니라 그는 추운 곳에서는 힘을 쓰기 힘들었다.
지금 눈밭을 뒹굴고 있으려니 오들오들 몸이 떨려 제정신이 아니었다.
“하, 씨불, 그, 그 자식은 왜 안 와? 도, 독을 푼다는 데 겁이 없어?”
추위 때문에 입이 제대로 놀려지지 않아 염군의 발음이 엉켰다. 염군 만큼은 아니지만 어쨌든 지금 상황이 달갑지 않아 빙군도 투덜댔다.
“미친놈이지.”
“독을 풀어 몽땅 죽어 나가봐야 정신을 차리려나?”
“게을러서 후회하는 놈 여럿 봤어.”
열심히 흑검문 소문주를 욕하던 빙군이 문득 깨달은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그놈이 제대로 서신을 전달한 게 맞겠지?”
“어? 그러게…….”
빙군과 염군은 생각지도 않은 문제에 부딪혔다. 북해빙궁이라면 빙군의 명령을 어길 사람이 없다. 한마디 하면 당연히 해결된다. 염군도 지금껏 자신의 명령을 어기는 자를 보지 못했다. 감히 어겼다가는 목이 달아나니까.
그래서 두 사람은 백화루의 그 젊은이가 당연히 서찰을 전달했으리라 여겼다. 정보를 받은 흑검문 소문주는 당문에서 독을 풀지 않도록 노심초사하며 우물을 지키고 있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주위는 너무 고요했다.
“그…… 시부럴 놈이!”
이건 서신 전달에서 착오가 발생한 때문이다. 뒤늦게 후회해봐야 무엇 하리. 그들은 재빨리 계획을 수정해야 했다.
원래의 계획이라면, 당문의 경고를 받고 사색이 된 소문주가 이곳에서 잠복해서 기다리다가 당문오객을 만나야 한다. 당연히 소문주가 당문오객을 이길 리 없으니 위기에 처할 것이다. 그때 두 사람이 나타나 당문오객을 죽이고 소문주를 구해준다.
두 사람은 흑검문의 은인이 되고 소문주의 신임을 얻은 후 소문주를 속이거나 기습해서 내공을 빼앗는다.
대충 이런 계획이었다. 그런데 첫 단추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그때 서신을 전달한 그놈이 원흉인 것 같았다. 그 자식이 서신을 엉뚱한 곳에 전했거나 아니면 그냥 버렸거나.
백화루에서 보았던 젊은이를 떠올리며 이를 갈고 있을 때 어둠 속에서 그림자가 접근했다.
두 사람은 재빨리 몸을 움츠리며 우물을 주시했다.
모두 다섯이었다. 그날 백화루에서 만두를 공짜로 먹던 바로 그놈들이었다.
“당문오객이군.”
“녀석들, 치사하게 진짜 우물에 독을 풀 생각인가 봐.”
염군과 빙군도 사악하기로 따지면 무림에서 이름을 날렸으나 그들은 당문을 비난했다. 그들의 상식에도 거대 문파인 당문이 소규모 문파를 이런 식으로 괴롭히면 옳지 않다. 물론 머릿속의 그 거대 문파에 북해빙궁은 해당하지 않는다.
당문오객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조심스럽게 우물 앞에 모였다. 낄낄거리며 뭔가를 준비하는 녀석들을 보고 있자니 빙군과 염군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저 물을 마시고 소문주가 죽으면 우린 어떻게 되는 거지?”
“어떻게 되긴. 닭 쫓던 개 되는 거지. 죽은 자의 내공을 무슨 수로 흡수하냐?”
염군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흑검문에 서신이 도착하지 않았다면 당연히 경계하지 않을 테니 흑검문도는 독이 든 물을 마시고 전부 몰살당할 것이다. 그들이 죽는다고 눈 깜짝할 두 사람이 아니지만 적어도 소문주가 죽으면 안 된다.
그 녀석 내공을 취하려고 멀리 대막과 북해에서 이곳까지 오는 수고를 감내하지 않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