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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검천하-107화 (107/273)

107화 당문 풍운 (1)

흑검문주 주격과 신옹은 당문의 공격 정보에 이만저만 고민이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당문의 독을 견딜 재간이 없었다. 잠을 잘 때도, 눈을 떴을 때도, 심지어 밥을 먹을 때도 독에 중독될까 고심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사천에서 당문과 등을 돌리고 문파를 유지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게다가 주석하 혼자서 노심초사 해결하려고 뛰어다니고 있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며칠 전전긍긍하던 두 사람은 초하루 날이 밝자마자 당문을 방문했다.

이 사실을 주소은이 주석하와 아침밥을 먹으면서 화제에 올렸다.

“아버지랑 신 장로가 당문을 찾아간다고 했는데?”

“젠장!”

예상치 못한 사태에 주석하는 얼이 빠졌다. 당문에 가려면 진작 가든지 벌써 우물에 독을 풀었는데 이제 가면 어쩌자는 건지. 게다가 새벽에 그 이상한 노인 둘이 당문오객을 때려잡았다고 했는데? 이 와중에 당문을 방문하면 더 큰 일 아닌가.

“잘 풀릴 거야.”

주소은은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그래도 지금까지 문파를 잘 이끌어온 주격 아니던가. 사고 친 자신과 오빠를 위해 친히 당문을 방문한 부친의 노고에 죄송함을 느끼는 중이었다.

“하아! 일이 꼬이네, 꼬여. 소은아, 중앙 우물 있지? 거기 당분간 쓰지 말라고 사람들에게 일러라.”

“우물? 정말 독 풀었어?”

“그런 것 같아.”

대충 경고한 주석하는 재빨리 밖으로 나와 두 노인을 찾았다.

불과 몇 시진 사이에 맞은 자국이 완전히 사라진 두 노인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밝은 곳에서 보니 과연 그날 백화루에서 술을 마셨던 그 두 사람이 맞았다. 안색도 희고 붉은 게 볼 때마다 정말 특이했다.

“오늘 할 일이 생겼다. 당문 끄나풀이 아니라고 했으니…… 이미 말한 대로 나랑 같이 당문을 치러 간다. 알겠지?”

눈을 부릅뜨고 다그치는 주석하에게 화가 치민 빙군은 주먹을 꽉 쥐었다.

‘이 자식을 그냥 때려 죽여버릴까…….’

옆을 돌아보니 염군이 급하게 고개를 젓고 있었다.

‘참아라, 참아. 어마어마한 공력이 눈앞에 있는데 포기할 거냐?’

‘하아, 그렇지. 공력이…….’

간신히 빙군이 성질을 죽이고 있자니 주석하가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잘해서 당문이 아님을 증명하라고.”

다시 불끈 주먹을 쥐었다가 염군의 눈빛을 본 빙군은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내버려 두면 큰일 나겠다는 생각에 염군이 얼른 끼어들었다.

“소, 소문주. 다, 당문을 어떻게 할 거요?”

“원래 내 신조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였는데 그렇다면 독을 풀면 나도 독으로 대항해야 하거든?”

“그게 가능할 리가…….”

“그렇지?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을 수도 없잖아. 그냥 독 말고…… 적당히 손만 좀 봐주려고.”

어쩌다 보니 당문과 그는 여러 악연으로 얽혔다. 당문의 장로인 독암쌍로를 죽였고 문주의 두 자제를 죽였다. 이쯤 되면 타협할 여지는 없다. 당문에서는 그가 흑검서생이란 사실을 모르기에 독암쌍로를 죽인 범인이라고 여기진 않겠지만 언제까지 숨길 수 있을까.

“흐흐, 우리 사파에는 적당이란 말이 없다! 시작하면 끝장을 봐야지!”

“그렇지. 이참에 당문을…… 쓸어버리지?”

염군과 빙군이 바로 본색을 드러냈다. 주석하에게 얻어터진 수모를 갚을 대상이 필요했다.

사실 주석하는 당문을 어떻게 할 생각은 없었다. 가서 흑검문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고 경고하는 정도로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모든 일이 당문이 먼저 도발해와서 벌어졌음을 명확하게 주지할 생각이었는데…… 이들의 생각은 달랐다.

‘이 자식들 누구지?’

그때야 주석하는 염군과 빙군의 정체를 의심했다. 어제 새벽에는 우물에 푼 독 때문에 경황이 없어서 정체를 고민하지 않았었다. 아침에도 주격이 당문으로 떠났다는 말에 정신이 없었다.

지금에야 만만찮은 무공을 지닌 이 두 사람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무려 당문마저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라……. 그러고 보니 어제 순간적으로 내력을 끌어올린 두 사람의 기운이 정말 익숙했다.

주석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두 사람을 살폈다. 만만찮게 특이한 외모, 거기에 그와 유사한 친숙한 기운. 머리를 벼락처럼 내리치는 정보가 있었다.

‘설마? 빙군과 염군?’

도무지 이해 불가한 상황이었다. 빙군의 거주지는 북해이고 염군은 대막이다. 거기에 두 사람은 상반된 외모만큼이나 사이가 나쁘다고 소문났다. 그곳에서 여기까지 거리도 거리인 데다 절대 함께 붙어 다닐 사람이 아니었다.

모든 정황을 차분하게 더듬어보니 빙군과 염군이 아니라면 이런 위압감을 줄 인물이 없다.

주석하가 조용히 두 사람을 노려보고 있자니 내심 뜨끔해진 염군이 얼른 물었다.

“왜 그러나? 소문주?”

“아, 아니다. 그렇지, 그게 맞지. 우리 사파에는 ‘적당히’란 게 없다.”

졸지에 ‘적당히’가 아닌 확실하게 당문을 손봐주는 것으로 결정됐다. 이것은 분명히 주석하의 의도가 아니었다. 주석하는 자신이 사악한 놈이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었다.

당문과의 일전이 벌어지면 이들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염군과 빙군이라면…… 당문을 쓸어버릴 수 있나? 흑도팔군이 괜히 흑도팔군이 아니다. 현재 당문에 정파십존 급의 고수가 설사 존재한다고 해도 흑도팔군이 둘이나 되니 당문으로서는 역부족이다.

염군과 빙군에 자신까지라면, 무려 흑도팔군이 셋이나 마찬가지니 오늘 당문의 멸문은 예약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주석하는 멸문까지 바라진 않았다. 그는 그렇게 악하지 않다고 스스로 자위했다. 남의 칼을 빌리니 더 나쁜 놈이라고 욕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좋아, 그럼 가도록 하지.”

주석하가 먼저 당문 쪽으로 몸을 틀었고 빙군과 염군이 길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졸졸 따라왔다.

‘이들이 왜 흑검문까지 찾아왔지?’

벌써 당문의 미래는 머릿속을 벗어났다. 그보다 자신의 앞날에 주석하의 머릿속은 엄청 복잡해졌다.

뇌군이 이들에게 서신을 보낸 것은 안다. 하지만 이들은 절대 그에게 호의를 베풀 사람이 아니다. 이 먼 곳까지 손수 찾아왔다? 그것도 두 사람이 손잡고?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니 그들의 성격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하지만 뇌군의 전갈을 받았다고 해도 자신의 절기를 손수 가르쳐 주려고 찾아오는 호의를 베풀 자들은 아니다.

‘꿍꿍이가 있어.’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조심해야 한다. 주석하는 뒤를 따라 오는 빙군과 염군을 슬쩍 흘겨보고는 걸음을 빨리했다.

**

당문의 대청에서 주격과 신옹은 가슴을 졸였다.

벌써 도착 한 시진째. 당문에서는 그들을 대청에 앉혀 놓고 아무도 나와 보지 않았다. 흑검문이라는 말에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나마 차라도 대접해주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두 사람만 지겹게 대청에 앉아 있자니 슬슬 걱정이 앞섰다.

“이들이 너무 사람을 무시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일단 참아봅시다. 우리가 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주격은 걱정하는 신옹을 달래며 머릿속에서 전략을 다시 검토했다.

어차피 당문과 싸울 담력은 없었다. 먼저 머리를 숙이고 자비를 구해야 한다. 저쪽은 무려 아들 둘이 죽었지 않은가. 주석하의 목숨을 요구하는 것만 아니라면 무엇이든 감내하겠다고 결심하고 찾아왔다.

“우리는 그날 혼천교 소교주와 화산파 제자가 일을 벌였다고 우겨야 합니다.”

신옹이 전략을 설명했다.

상식으로 판단하면 당연했다. 이름 없는 문파인 흑검문 소문주가 당문의 아들을 해치웠다기보다 혼천교와 화산파가 저질렀을 가능성이 더 크다. 게다가 화산파는 당문과 같은 무림맹 소속이니 선처의 여지도 남아 있다.

그때 그 곱상한 녀석이 무려 자하검존의 제자라고 했던가? 자하검존까지 물고 늘어지는 것이 작전의 최후 보루였다.

그런데 당문에서 만나주지도 않으니 우려가 컸다. 이는 두 사람을 무시하는 처사이거나 아니면 길들이려는 경고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

노심초사하고 있자니 마침내 대청 안쪽 문이 열리면서 세 사람이 나타났다. 제법 나이가 든 초로의 노인과 두 청년이었다.

주격과 신옹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공수의 예를 취했다.

“흑검문 문주 주격입니다.”

“앉으시지요. 당문의 장로인 백수신옹 당문기외다.”

백수신옹(百手神翁)은 손이 백 개라 해서 붙여진 별호였다. 그는 암기술의 달인으로 단번에 백 개의 암기를 뿌린다고 했다. 당문 내에서도 암기에 관한 한 현 당문가주를 제외하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흑검문이 소문파라지만 문주가 찾아왔으니 당문 가주가 맞이하는 게 정상이었다. 그런데 일개 장로가 대표로 나섰다는 것으로 흑검문을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 빤히 보였다.

그나마 인자한 표정의 당문기 장로와 달리 옆에 앉은 두 청년은 흉흉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주격의 시선이 그 둘을 향하자 당문기가 느릿하게 말했다.

“가주의 자제 두 분입니다. 첫째와 둘째지요.”

주격이 인사하려 하자 곧바로 적의가 날아들었다.

“감히 셋째와 넷째를 죽이다니! 그러고도 뻔뻔하게 여기를 찾아와?”

“고, 공자…….”

신옹이 급히 끼어들었으나 당문의 첫째 공자인 당행은 말을 거두지 않았다.

“당문오객이 하독 한다고 하니 겁이 났구나. 흐흐, 어쩌나? 벌써 하독이 끝났을 건데?”

역시 당문오객이 흑검문에 독을 푼다는 사실을 당문 고위층에서도 알고 있었다. 당문의 공식적인 복수는 아니지만 묵인한다는 뜻이다.

“그러잖아도 그 때문에 왔습니다. 먼저 두 분 자제를 잃으신 흉사에 심심한 조의를 표합니다.”

“뭔 개소리냐? 네놈들이 저질러 놓고.”

당행이 버럭 소리쳤다. 첫째 공자라면 차기 당문 가주가 될 인물이다. 당문 내에서 그를 무시할 자는 아무도 없으니 오늘 회담의 주역은 당문기가 아닌 첫째 공자, 당행이라고 봐야 했다.

주격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혈기 방자한 젊은이와 협상하기는 쉽지 않다. 이자는 지금 동생을 잃었다는 슬픔에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오늘의 험난한 일정이 예고되는 듯했다.

“그날 혼천교와 화산파 사람도 있었습니다. 저희에게만 온전히 책임을 지우는 것은…….”

“그래서 흑검문은 책임이 없다는 뜻이냐?”

당행이 버럭 소리쳤다.

“그, 그건 아니고…….”

맞받아치지 말라는 신옹의 눈짓에 주격은 꼬리를 내렸다. 그는 슬그머니 당문기를 바라봤다. 전혀 도와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 태도로 보아 작정하고 나온 듯했다.

“혼천교와도 담판을 지을 예정이니 흑검문이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당문을 건드리면 누구든 제 명에 살지 못한다는 무림 법칙을 들어봤느냐?”

당행이 호기롭게 외쳤다. 최근 들어 당문의 가세가 조금 기울기는 했지만 적어도 아직은 큰소리칠 능력이 있다.

‘쉽지 않겠구나.’

주격은 내심 땀을 흘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최근 주석하의 위세로 봐선 쉽게 당문에 당하지 않을 게 확실하지만 문파인 전부를 독에 떨게 만들 수는 없다. 다시 몸을 낮추고 달래려 할 때 당행이 요구 조건을 내걸었다.

“그래도 흑검문에서 이렇게 찾아와서 백배사죄하니 그 정성을 참작해주마. 그래서…….”

주격은 희망을 품고 눈을 떼지 않았다.

“사건을 벌인 당사자인 흑검문 소문주! 그놈을 용서할 수는 없다. 먼저 그놈의 목을 바쳐라. 그놈을 잘못 가르친 부모도 용서할 수 없으니 그 부모의 목숨도 바쳐라. 거기에 방자한 행위로 흑검문이 덕양에서 악명이 자자하니…… 흑검문의 장로 목숨까지 내놓는다면 더는 죄를 묻지 않겠다.”한 마디로 목을 내놓고 흑검문 문을 닫으란 뜻이다.

“그건 좀 너무 하지 않소?”

“흐흐, 그 정도는 각오하고 오지 않았나?”

당행이 비릿한 웃음을 머금으며 주격을 놀렸다. 하룻강아지의 사정을 봐주는 호랑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워지더니 한 청년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소가주님! 이상한 놈들이 찾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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