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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검천하-108화 (108/273)

108화 당문 풍운 (2)

다급한 청년의 보고에 당행이 주격과 신옹을 힐끔거렸다.

주격은 뭔가 흑검문과 연관된 일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다만 무슨 일인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당행이 청년에게 명령했다.

“네놈은 이곳에서 이 두 사람을 감시하고 있거라.”

당행이 둘째와 당문기를 데리고 급히 대청을 떠났다.

당행의 명령을 주격은 자신이 이곳을 벗어나지 말라는 경고로 받아들였다. 신옹과 눈빛으로 의견을 교환한 주격이 청년에게 넌지시 물었다.

“무슨 일인가?”

청년이 그를 힐끔 보더니 주저하다가 대답했다.

“이상한 놈들이 찾아왔습니다.”

“이상한 놈?”

“한 놈은 눈처럼 하얗고 한 놈은 불처럼 시뻘건데…… 하여튼 척 보면 이상한 놈이라고 쓰여있을 정돕니다.”

“그런데?”

“그자들이 흑검문에서 왔다고 그래서…….”

“흑검문?”

놀란 주격이 신옹을 돌아봤다. 당연히 신옹도 무슨 일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흑검문에는 그렇게 이상한 놈들이 없었으니까.

고개를 갸웃거리던 주격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청년이 말렸다.

“여기를 나가시면 안 됩니다. 나가시면 제가 소가주님께 죽습니다요.”

“끙.”

사정하는 청년이 불쌍하기도 하고 차후 당문의 선처를 구하려면 아무래도 조용히 있는 게 유리할 듯하여 주격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다만 마음만은 이미 대청을 벗어나 밖을 나돌아다니고 있었다.

“석하가…… 무슨 일을 벌인 건 아니겠지.”

그래도 멀끔한 청년이 같이 왔다는 보고는 없었으니 다행이라 생각했다.

**

주석하는 서너 장 뒤에 떨어져서 빙군과 염군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파의 종사이자 흑도팔군이라더니 과연 하는 짓이 범인과 달랐다. 그들은 당문 정문에서 사천당문이라고 적힌 현판을 곧바로 박살냈다.

그것만으로도 입을 쩍 벌렸는데 두 사람이 다음 단계로 커다란 솟을대문을 걷어찼다. 거대한 문짝이 부러지고 일대가 난장판이 됐다. 말리려던 당문 문지기가 저쪽으로 날아갔다.

사자처럼 포효를 날리는 염군을 향해 빙군이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우리 이래도 되는 거냐?”

“이왕 시작한 거 잘 보일수록 좋아. 그래야 경계심을 누그러트리지.”

“으음, 그렇긴 한데……. 우리 체면이 이거…….”

“설마 당문에 쪼는 거냐?”

“흐흐, 그럴 리가.”

염군과 빙군이 의견을 주고받으며 행동을 합리화했다.

이왕 시작했으니 끝까지 가겠다는 것이 염군의 생각이었고 빙군도 어쩔 수 없이 동조했다. 정파에서 그래도 명망이 있는 당문을 제거하면 분명히 문제가 되겠지만 주석하의 내공을 빼앗은 후라면 걱정할 이유가 없었다.

설사 정파십존이 모두 몰려오고 구대문파, 오대세가마저 다 몰려와도 감당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계획대로 내공이 지금의 두 배로 폭증한다면.

염군과 빙군은 오늘 안면을 몰수하고 흑검문을 도와 당문을 처리할 생각이었다.

주석하는 그런 행동을 뒤에서 관찰하면서 나름대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당문을 내버려 두면 두고두고 골치 아픈 존재가 된다. 어떤 식으로든 마무리를 짓는 게 좋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확실히 마침표를 찍을 줄이야.

대문에서 난리가 벌어지자 과연 수많은 당문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 가운데 노기를 띠며 소리치는 독보적인 청년이 있었다. 바로 소가주 당행이었다.

“네놈들은 뭐냐? 여기가 어디라고 행패냐?”

“내가 누구냐고? 내가 바로…….”

곧바로 응수하려는 빙군의 말을 염군이 막았다.

“네놈은 알 필요 없다!” 염군이 빙군에게 눈을 찡긋거리고 대신 대답했다. 정체는 비밀이어야 한다고 다시 눈빛으로 지적했다.

“끙!”

별호만 밝혀도 찌그러질 놈들이라 빙군은 아쉬웠다. 이런 피라미들과 노닥거리려니 흑도팔군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그 답답함은 분노로 바뀌었다.

“당문가주가 누구냐? 가주를 불러와라!”

당행이 분노를 삼키며 문파 제자들에게 명령했다.

“저놈을 잡아서 데려와라. 대체 어떤 놈인지 확인해보자.”

명령이 떨어지자 당문에서는 앞뒤를 가리지 않았다. 기세등등한 몇 놈이 막무가내로 염군과 빙군에게 덤벼들었다.

“크윽!”

당연히 염군과 빙군은 손에 사정을 두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이 손을 젓자 순식간에 주위에 핏물이 흥건해졌다.

그제야 침입한 자들이 보통이 아님을 깨달은 당문에서는 암기와 독을 쏟아냈다. 빙군과 염군의 앞에 벌떼처럼 암기가 날아오고 독이 뿌려져 눈앞이 안개처럼 뿌옇게 흐려졌다. 두 사람에게 뿌려진 암기와 독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정작 염군은 콧방귀를 끼었다. 불과 독은 상극이다. 암기라면 몰라도 독은 염군에게 그리 문제가 아니었다.

염군이 소매를 펄럭이는 순간 전방을 가득 메우며 날아오던 뿌연 독 안개에 불이 붙었다. 날아오던 암기는 빙군이 손을 젓자 얼음에 갇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헉!”

놀라운 솜씨에 모두가 경악했다. 흑검문에서 왔다고 하여 가볍게 상대할 생각이었는데 침입자들의 무공이 예상 밖이었다.

당문에서 놀랄 틈도 없이 염군과 빙군이 앞으로 질주했다.

“환영 인사 잘 받았다!”

당행에게 경고하듯 염군이 오른손을 홱 저었다. 순간 뜨거운 기운이 벼락처럼 당문의 전각에 꽂혔다.

화르르르-

순식간에 전각이 달아오르고 불이 붙었다.

빙군이 염군에게 눈치를 줬다.

“정체가 발각되잖아?”

“지금 정체가 문제냐? 저 새끼들이 우리를 무시하고 도발하는데!”

“그렇지? 정체고 뭐고 버르장머리부터 고쳐주마!”

화가 난 염군이 강하게 진각을 밟았다.

쿵!

“으으, 당신들은 누구냐?”

당행은 흑검문에 이처럼 강한 자가 있다고 들어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인물이 있었다. 현 무림에서 뜨거운 양강지력으로 유명한 사람은 오직 하나다. 대막에 거주한다던…….

“서, 설마 다, 당신은…….”

당행이 손가락질하며 입을 열려는 순간 염군이 다급하게 입을 막았다.

“갈!”

당행의 옷자락에 불이 붙었다.

“허억!” 당행이 불에 휩싸이자 주변의 문도들이 불을 끄느라 난리가 났다. 간신히 옷으로 덮어 불을 껐으나 당행은 완전히 진이 빠져 흐느적거렸다.

당행이 정체를 언급하지 않았다면 염군도 당행부터 공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염군은 당행의 몰골을 보며 혀를 찼다.

“이래서 입이 화를 부르는 법이지.”

소가주가 화를 입자 당문 사람들의 눈이 뒤집혔다.

마치 눈이 내리는 듯 암기가 쏟아졌고 희고 검은 독이 사방에서 날아 왔다. 지금까지 뒤에서 대기하던 문도까지 한꺼번에 덤벼들었다.

“우아아아!”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당연하게도 정문 앞에 지옥도가 펼쳐졌다.

염군과 빙군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생사를 건 전투를 수없이 경험했던 그들은 당문의 반발에 딱히 영향 받지 않았다. 피도 눈물도 없는 마두는 몇 명이 죽든 상관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로지 하나의 목적만 생각했다. 이들을 일망타진해야 주석하의 환심을 사고 그들이 고금제일의 고수가 될 수 있다.

화르르르-

콰지직-

안타깝게도 당문의 암기와 독은 빙군과 염군의 상극이었다. 암기와 독은 그들의 근처에도 닿지 못하고 무력화됐다.

처절한 비명이 천지를 울리고 시산혈해가 그려졌다.

주석하는 멀찌감치 뒤에 서서 이 장면을 묵묵히 구경했다.

빙군과 염군의 활약은 완전히 예상 밖이었다. 사람의 목숨을 벌레처럼 여기는 자들이라 전혀 손속을 꺼리지 않았다.

당문을 치러 온 주석하가 당문을 불쌍하게 여길 정도였다.

“우물에 독을 풀지만 않았어도…….” 그들이 정면으로 쳐들어왔다면 이런 식으로 잔인하게 보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선을 넘었다. 독으로 불특정 다수를 살상하려 했다. 그렇기에 주석하도 빙군과 염군을 말리지 않았다.

어차피 그가 말린다고 들을 인간도 아니었다.

주석하는 혼군과 악군의 무공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그 위력을 본인도 잘 모르고 있었다. 분명히 무림 최강자에 속해 있으니 강하다고만 생각했지 얼마나 강한지 감이 없었다.

그도 전력을 다해 무공을 펼쳐보지 못했고 흑도팔군이나 정파십존이 전력을 다해 무공을 펼치는 것 또한 보지 못했다. 기껏 신창패존과의 생사 결투가 유일했다.

그러던 것이 지금 드디어 그 위력을 알게 됐다. 빙군과 염군이 거리낌 없이 폭발시키는 능력에 주석하도 입만 쩍 벌렸다. 지금 저 모습이 훗날 그가 달성할 능력이자 벌어질 참상이라 생각하니 책임감이 피어났다. 정말 한 지역을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는 가공할 능력이었다.

그는 빙군과 염군의 활약을 착잡한 기분으로 쳐다봤다. 시간이 흐를수록 당문은 무림에서 지워지고 있었다.

**

콰쾅-

요란한 소음이 밖에서 들려왔다.

주격과 신옹은 안절부절못했다. 저 소리는 외부의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뜻이었다. 흑검문이 왔다고 했으니 아마도 그 사람은 주석하일 텐데.

소음이 큰 만큼 싸움이 거세다는 뜻이고 당문이 곤란할 가능성은 없으니 주석하와 흑검문이 어려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고 추정했다.

자연스럽게 들썩이는 엉덩이를 앉히고 지키는 당문 제자의 눈치를 봤다.

“상황이…… 좋지 않은 것 같은데요?”

신옹이 어두운 얼굴로 의견을 물었다.

“석하가…… 얼마나 데려왔는지 모르지만 너무 무리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주격도 불안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상황을 막고자 주석하에게 알리지 않고 둘이서만 이곳을 찾았다. 예상보다 회담이 시원찮았으나 어떻게든 해결할 요량이었는데.

“이보게, 혹시 바깥 사정 좀 알아봐 주지 않겠나?”

당문 제자에게 사정했으나 돌아온 것은 냉담뿐이었다.

한숨만 푹푹 쏟아지는 찰나 갑자기 온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이상한 조짐에 주변을 살펴보니 전각에 불이 붙고 있었다.

“헉! 불이다!” 이제는 체면을 차릴 때도 아니고 당문의 눈치를 볼 때도 아니었다. 주격은 혼비백산하여 대청을 뛰쳐나갔다. 그 뒤를 신옹과 당문 제자가 뒤따랐다.

놀랍게도 세상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넓은 당문의 절반은 불에 타서 잿더미가 됐고 나머지 절반은 눈이 내려 얼음판이 됐다.

당문 제자가 곳곳에 보이긴 했다. 다만 그들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데 팔다리가 멀쩡한 자가 드물었다. 이미 대부분 저 세상을 떠도는 것처럼 보였다.

눈 앞에 펼쳐진 지옥도에 주격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그, 글쎄요.”

신옹이라고 알 리가 없었다.

그들의 눈에 이상한 인간 둘이 들어왔다. 온몸이 하얗고 시뻘건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마구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그 두 사람의 앞에서 당문의 가주로 알려진 암독사신(暗毒死神) 당천이 분노를 누르지 못하고 분기탱천한 모습을 보였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흑검문이라 해서 주석하를 찾았더니 정작 아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이상한 인간 둘이 날뛰고 있었다.

“네놈들은 하늘이 두렵지…… 크윽!”

분노로 일갈하던 당문 가주 당천이 채 말을 잇지도 못하고 가슴을 붙잡으며 피를 토했다.

그 장면에 주격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암독사신이라면 정파십존에는 들지 못하더라도 무림에서 쟁쟁한 위명을 날리는 자다. 사천에서는 곤륜파 장문인 정도가 아니라면 감히 비빌 상대가 없다. 그런 자가 일격에 무너졌다.

얼떨떨한 눈을 부릅뜨자 당천의 앞에서 어른거리는 붉은 피부의 노인이 눈에 들어왔다.

“뭔 소리야? 하늘이 뭐 어째? 내가 바로 하늘이다!”

“으으윽!”

당천이 그대로 주저앉았고 곧바로 그의 몸에 화염이 일었다. 독이고 암기고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짧은 순간이었다.

두 괴인의 무시무시한 무공에 주격과 신옹은 기절할 만큼 놀랐다.

“저자들은 흑검문이 아닌데…….”

가주가 쓰러지자 당가 제자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더는 이 난장판에 계속 있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주격과 신옹도 불타는 전각을 뒤로하고 황급히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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