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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검천하-109화 (109/273)

109화 당문 풍운 (3)

주석하는 이 모든 과정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는 부근의 커다란 나무에 올라가 나뭇가지에 비스듬히 기댄 채 당문 앞마당을 살피고 있었다. 나뭇가지가 적절하게 가려주었고 다른 사람들은 정신이 없어 그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목불인견의 참상이었으나 그는 간간이 눈을 찌푸릴 뿐 특별한 감흥이 없었다. 전생에서도 이 정도 참극은 숱하게 봤었다. 지금도 살아남은 당문 사람이 흑검문에 계속 앙심을 품으면 골치 아프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사람의 팔이 안으로 굽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다만 그를 고민되게 한 점은 따로 있었다. 바로 빙군과 염군의 존재다. 두 사람이 사용하는 무공을 보고 확신을 얻었다. 이 두 사람은 빙군과 염군이며 그의 내부에 품은 기운 또한 이들과 똑같다는 사실을.

게다가 지금 이들이 펼치는 무공은 그가 익혔던 혼군이나 악군의 무공과는 너무 달랐다. 위력도 패도적이었다.

‘이것들이 왜 덕양까지 왔지?’

같은 기운을 가진 그에게 무공을 전수하기 위해서? 사람은 그렇게 선하지 않고 이유 없이 친절을 베풀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생에서 이미 뼈저리게 경험했다.

날뛰는 빙군과 염군을 보는 주석하의 눈이 점점 의심으로 가늘어졌다.

문득 뇌군이 그에게 당부했던 말이 떠올랐다. 흑도팔군을 믿지 말라고. 그들은 그리 좋은 사람들이 절대 아니라고.

‘이자들이 얻을 이익이라면…….’

그에게 무공을 전수하여 훌륭한 제자를 키울 수도 있다. 그렇게 보기엔 빙군은 북해빙궁이라는 단체를 이끌고 있어서 적합하지 않다. 주석하의 무재가 특출한 것도 아니어서 굳이 외부에서 제자를 들일 이유가 없다.

‘역시 뇌군의 추측대로 내공을 뺏으려는 목적인가…….’

돌고 돌아 처음의 의심으로 돌아왔다. 가장 타당한 의심이다.

골치 아픈 당문을 대신 처리해줬기에 이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없잖아 있다. 하지만 진정 그들이 그를 해치려고 온 것이라면 용서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지금 당문을 처리하고 나면 이들과 생사를 건 한판 대결을 벌여야 한다. 그것도 두 사람을 동시에 상대해야 한다.

기습? 그가 둘을 동시에 처리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렇다고 정식으로 무공의 고하를 가린다면? 그 역시 장담할 수 없다. 그들의 허를 찔러야 하는데…….

주석하는 고민을 거듭했다.

화르르르-

전각이 불타오르고 당문 가주가 제대로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죽었다. 사천, 아니 중원에 이름을 떨치던 문파의 허망한 종말이었다.

가주가 죽고 소가주마저 쓰러지자 당문은 지리멸렬했다. 당문 사람들은 목숨을 지키려고 뿔뿔이 흩어졌고 당문에서 독극물을 제조하기 위해 키웠던 독초밭은 염군이 불을 놓았다. 매캐한 연기가 하늘로 피어올랐다.

그사이 허겁지겁 당문을 떠나는 주격과 신옹을 발견했다.

“무사하셨네.”

주석하는 안도한 마음으로 그들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지켜봤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일대가 잿더미가 된 이곳에는 오직 두 사람만이 존재했다. 지옥에 왕림한 두 악마였다.

주석하는 나무에서 내려가서 그들을 맞이했다.

“고생했다.”

실제로 고생한 게 맞으니 그 말은 진심이었다. 적어도 그를 대신해서 사람을 죽이는 업보를 쌓았으니.

손을 탁탁 털면서 염군과 빙군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별것도 아닌 놈들이…….”

“덕분에 오늘 재밌었군.”

오랜만에 손을 풀었다고 흐뭇한 표정이다. 주석하를 향해 돌아서는 빙군과 염군의 눈빛이 의미심장했다.

“안에…… 놈들이 남았는지 확인해 봐야겠지?”

“크음, 쥐새끼도 없지.”

빙군과 눈빛을 교환하던 염군이 화들짝 놀라 걸음을 옮겼다.

역사가 깊은 당문인 만큼 당문이 차지한 부지도 넓었다. 전각은 반쯤 불타고 반은 온전히 남아 있었다.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남은 자가 있다면 다시 참극이 벌어질 수 있기에 오히려 다행이다.

당문에서 관리하는 독초 밭과 암기 제조창을 적당히 망가트리면서 그들은 당문 한중간으로 들어갔다.

외부와 적당히 격리된 지점에 이르렀을 때 주석하는 걸음을 멈췄다.

“흠, 수고 많았다. 덕분에 흑검문이 안전해졌고 너희도 당문 사람이 아니란 게 증명됐군.”

여기까지는 진심이었다.

주석하가 감사를 표하자 빙군과 염군이 우쭐거렸다.

“크흠, 이 정도야…….”

막상막하의 전투를 벌이지는 않았더라도 적의 수가 많았기에 그들의 내력 소모는 꽤 클 것이다. 적어도 이들이 본신의 내력을 모두 찾기 전에 일을 벌이도록 유도해야 한다.

“마침 아무도 없으니 얼른 운기조식을 하라.”

“흐흐, 그럴까?”

운기조식은 아무 곳에서나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운기조식 중에 외부의 적이 기습한다면 대처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주석하가 옆에 있기에 정상이라면 이들은 운기조식을 할 수 없다. 주석하가 그들의 편이라고 장담할 수 없으니까.

그런데…….

“흠, 소형제, 그럼 조금 도와주게나.”

“무슨 말이지?”

“우리 둘은 서로 상반된 무공을 쓰고 있잖나? 자네가 우리 둘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준다면 훨씬 빨리 끝낼 수 있어.”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주석하는 재빨리 그 결과를 가늠했다. 이 둘과 내력 대결을 벌인다면 과연 승리할 수 있을까.

이 둘의 공격으로 단전에 품은 빙군과 염군의 내력이 잠을 깬다면, 그래서 그 두 내력이 빙군, 염군과 겨룬다면 적어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지금 이들은 내력 소모가 많아서 평소보다 아무래도 그 힘이 떨어질 수밖에 없으니까.

빙군과 염군의 내력이 이들과 싸우는 동안 그는 혼군이나 악군의 내력을 운용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빙군은 빙군과 혼군의 내력을 동시에 상대해야 한다. 염군도 마찬가지. 당연히 그에게 유리했다.

작전이 세워졌다.

주석하는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내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당연히 해주지. 어떻게 하면 되나?”

“여기 앉아 보게.”

반쯤 불에 탄 황량한 벌판에 그나마 앉을만한 석판이 눈에 띄었다. 주석하는 그 중앙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가 전혀 경계하지 않고 순순히 말을 듣자 염군의 입가에 음산한 미소가 떠올랐다. 역시 강호 경험이 일천한 자식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이다.

주석하의 좌우로 빙군과 염군이 나란히 앉았다. 그들 역시 가부좌를 했다.

“손을 내밀어 보게.”

주석하는 양쪽으로 손을 뻗었다. 빙군과 염군이 동시에 그의 손을 잡았다. 그것도 절대 빠지지 않도록 손가락을 깍지꼈다.

빙군의 손은 차가웠고 염군의 손은 뜨거웠다. 평범한 사람과 다른 특이한 느낌에 주석하는 모골이 송연했다.

은은하게 긴장이 쌓였다. 계획대로라면 그가 이기겠지만 모든 일이 계획대로 풀리란 법은 없으니.

‘빙군, 염군! 그대들에게 마지막 기회를 준다. 허튼짓하지 않는다면 아무 문제없겠지만 정말 사악한 마음을 품었다면 용서할 수 없다. 인간의 도리를 지켜라…….’주석하는 내심 좋은 결말이 맺어지기를 바랐다.

염군의 음성이 그의 상념을 깼다.

“자, 이제 서서히 내력을 올려보게.”

주석하는 천천히 내력을 끌어올렸다. 지금 그가 끌어올리는 내력은 혼군의 것이다.

“이제 우리가 진기를 인도하겠네. 그대는 편하게 가만히 있으면 충분하네.”

이어서 양쪽 손으로 상반된 기운이 몰려들었다. 왼손의 차가운 기운과 오른손의 뜨거운 기운이 조금씩 염탐하듯 그의 내부로 들어왔다. 그 기운은 혼군의 기운과 살짝 충돌을 일으켰으나 주석하는 반응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염군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어? 이건 정말 혼군의 기질처럼 느껴지는데? 뜨거운 기운은 어디로 갔지?’

빙군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뇌군이 헛소리 한 건가? 차가운 기운이 없잖아?’

이왕 시작한 일이다. 두 사람은 주석하 내부를 샅샅이 살펴보기로 했다.

두 사람의 기운이 혈맥을 타고 돌기 시작했을 때 주석하는 단전이 꿈틀대는 기분을 느꼈다. 동일한 성질의 기운이 들어오자 빙군과 염군의 기운이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고오오오-

한번 일어난 기운은 맹렬하게 혈맥을 일주천했다. 단전에서 용솟음친 기운이 양쪽 손으로 들어온 빙군과 염군의 기운과 뒤엉키면서 화합과 대립을 반복했다.

그 느낌은 대단히 신기했다. 혼군이나 악군이 무공을 전수할 때와 완전히 달랐다.

주석하는 점차 염군과 빙군의 기운이 편안해졌다. 애초에 몸에 포함된 같은 성질의 기운인 데다 막을 의지가 전혀 없었기에 몸에서도 거부 반응을 일으키지 않았다.

경악한 빙군과 염군은 자칫 운기조식을 망칠 뻔했다.

‘이럴 수가? 정말이었어! 똑같은 기운이 어마어마하게 잠들어 있었어.’

그야말로 신비 그 자체였다. 사람의 몸속에 상반된 기운이 동시에 공존하며 존재하는 데다 그 양도 놀랄 만큼 많았다. 그것도 그들과 똑같은 기운이, 북해와 대막이 아니라면 절대 얻을 수 없는 순수한 기운이 한 사람의 몸속에서 용트림하고 있었다.

빙군과 염군은 하늘에 감사했다. 이 기연은 그들이 고금 최강으로 우뚝 서는 발판이 될 것이다.

‘이제 이 기운을 내 몸으로 인도하면 끝이다!’

남은 작업을 떠올리며 흐뭇한 미소를 짓던 염군은 돌연 빙군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저놈도 고금제일인이 된다는 뜻 아닌가? 빙군이 내공을 취한 후 나를 공격한다면? 이 세상에 두 명의 황제는 존재할 수 없는 법. 빙군이 나쁜 마음을 품는다면?’갑자기 의심이 밀려왔다. 주석하에게서 내공을 빼앗을 생각만 했지 그 후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엄청나게 고민되기 시작했다.

이런 마음은 빙군도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주석하가 문제가 아니라 동료인 염군이 의심스러웠다. 염군이 나쁜 마음을 먹고 해치려 한다면?

순간 주석하의 몸 내부에서 염군의 기운이 빙군의 기운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주석하의 단전에서 공존하던 기운은 동참하지 않았다. 단지 그의 몸속으로 들어온 염군의 내력만이 빙군을 공격했다.

곧장 빙군의 내력이 반격하면서 주석하의 몸 내부는 전쟁터로 변신했다.

서로 상대의 기운을 압도할 수 없자 이번에는 동일한 주석하의 기운을 끌어들여 상대를 공격하려 했다. 순식간에 주석하의 몸 내부는 뜨거움과 차가움이 마구 엉키는 대결장이 됐다.

“크윽!”

갑자기 고통이 밀려왔다. 이런 전개는 그의 예상과 달랐다. 예상대로라면 두 사람은 그의 숨은 진기를 끌어당겨 각자에게로 옮기려는 탐욕을 부려야 했다. 그런데 옮기지 않고 상대를 죽이려는 무리수를 두고 있었다.

뜨거움과 차가움이 마구 엉키면서 고통이 가중했다.

‘역시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구나.’

주석하는 빙군과 염군의 내심을 명확하게 알아챘다. 이것은 중간에 있는 주석하의 안위를 전혀 고려치 않은 행동이었다.

손을 회수하려 하자 빙군과 염군이 더욱 강하게 손가락을 옥죄어 왔다. 그는 둘 사이에서 꼼짝할 수 없었다. 의심할 여지없는 적의였다. 두 사람은 상대를 죽이면서 그도 마찬가지로 죽이려 하고 있었다.

‘욕심은 인생을 망치는 법이니.’

주석하는 이를 악물고 기의 흐름을 파악했다. 빙군과 염군이 강제로 그의 기운을 제어하면서 고통이 가중되고 있었다.

‘이제 네놈들은 끝났다!’

조용히 순응하며 참고 있던 주석하의 반격이 시작됐다.

그는 두 기운이 서로 싸우면서 발생하는 몸의 고통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몸으로 위험 신호가 감지됐다.

단전에서 잠자고 있던 다른 기운이 일제히 잠을 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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