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110화 (110/273)

110화 당문 풍운 (4)

혼군, 악군, 독군의 기운이 단전에서 밖으로 나왔다. 그 기운은 원래 주석하의 몸속에 있으면서 외부의 제어에 반항하던 염군과 빙군의 기운과 어울려 그의 혈맥을 폭주하기 시작했다.

빙군이 불어넣은 내력은 염군의 내력과 싸우다가 갑자기 몰려든 거대한 기운에 혼비백산했다. 염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태산 같은 기운이 압박했다.

‘허억! 이게 대체 뭐냐?’

‘크으으윽! 무슨 기운이!’

두 사람은 감당하지 못할 거대한 압력에 망연자실했다. 뭔가 잘못 건드렸다는 직감이 왔다. 이건…… 인간이 품을 수 있는 내공이 아니었다!

염군은 주석하와 잡았던 손을 놓으려 했다. 그런데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애초에 자신이 결코 주석하가 뗄 수 없도록 강하게 깍지 꼈기에 꼼짝할 수 없었다.

고오오오-

거대한 밀물에 강물이 저항하기 어렵듯 염군과 빙군의 내력은 주석하의 몸에서 마구잡이로 휩쓸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통제하고 있던 권한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두 사람의 내력은 그들의 의지를 따르지 않고 오히려 주석하에게 숨어 있던 동질의 기운과 어울려 함께 떠돌았다.

“헉!”

염군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주석하의 기운을 끌어오기는커녕 반대로 그의 기운이 오히려 주석하에게 흡수되고 있었다. 저항을 시도했으나 도무지 먹히지 않았다. 그의 내력은 거대한 태풍 앞에 간신히 버티는 조각배와 같았다.

“이게 어떻게 된…….”

빙군도 입을 쩍 벌리고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의 내공이 오히려 점차 빨려들고 있었다.

“으으으!”

두 사람은 동시에 비명을 터트리며 주석하의 손을 떼려 했다. 하지만 그들은 꼼짝할 수 없었다. 지금 운기조식을 멈추면 그야말로 심각한 타격을 입기에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주석하는 점점 편안해졌다.

예전 같았으면 위험이 사라지자마자 단전으로 바로 진기가 돌아갔지만 지금은 달랐다. 새롭게 받아들인 기운이 여전히 몸 내부를 돌아다니기에 다른 진기도 함께 어울려 혈맥을 일주천했다.

주석하도 초반에는 어떻게 되어 가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내력을 뺏으려고 나쁜 마음을 품은 두 사람을 응징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두 사람에게 타격만 줄 수 있다면 충분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예상과 달랐다. 두 사람의 기운이 오히려 그의 내력에 굴복하여 그에게로 넘어오고 있었다. 빙군과 염군의 내공을 오히려 흡수하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크으으! 안 돼!”

버티던 빙군과 염군이 참지 못하고 운기를 중단하려 했다. 하지만 그마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완전히 얼이 빠져 급히 내력을 차단했다.

고오오오-

놀랍게도 그들의 내력은 이미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 그제야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직면했는지 깨달은 두 사람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이 위기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조금이라도 내력을 유지하며 살아날 방법은 이것뿐이다. 그들은 모든 내력을 동원해서 주석하의 손을 향해 쏟아 부었다.

콰아아앙-

거대한 반발력이 형성되면서 두 사람의 신형이 양쪽으로 튕겨 나갔다. 반면 주석하는 가부좌를 튼 상태에서 조금도 꿈쩍하지 않았다. 체내의 공력이 그를 보호하며 중심을 잡아주었기 때문이다.

“크으으윽!”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한 빙군과 염군이 넋이 나간 채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몸 내부를 확인한 두 사람은 더욱 절망했다. 그 많던 공력이 절반도 채 남아 있지 않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평생 쌓았던 공력이 하루아침에 박살나자 두 사람은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지금 이런 타격을 입은 사람이 주석하여야 했다. 그런데 상황이 정반대로 흘렀다. 대체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주석하는 조용히 눈을 감고 운기에 몰두했다.

몸에서 들끓던 기운이 서서히 단전으로 돌아갔다. 다만 염군과 빙군의 내공은 방금 엄청난 양이 추가된 관계로 질서를 잡느라 여전히 일주천을 거듭했다.

몸 주위로 장엄한 서기가 뿌려졌다. 그의 표정은 무척이나 평온했다.

비록 지금 당장 제어할 수 없지만 빙군과 염군의 내력이 무려 절반 이상이나 폭증했다. 이전에도 주석하의 내공은 가히 고금제일이었으나 이제는 그마저도 넘어서는 경지에 이르렀다.

운기조식에 몰두한 주석하를 보자 염군과 빙군은 화가 치밀었다.

그들이 잘못한 것이라고는 주석하의 내공을 탐냈다는 것과 내공을 훔치는 과정에서 탐욕에 사로잡혀 상대를 공격한 것뿐이었다. 그 잘못의 대가로 내력을 거의 잃다시피 했으니 도저히 죗값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이놈을! 그냥 둘 수 없다!”

멀쩡한 주석하를 보자 당연히 눈이 돌기 마련. 염군과 빙군은 앞뒤를 가리지 않고 주석하를 공격했다.

운기조식 하는 자를 공격하면 무공 고하를 막론하고 손쉽게 제압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경험이었다. 방금 주석하가 내력을 빼앗아갔지만 적어도 지금 공격하면 원수를 갚을 수 있었다. 빼앗긴 공력이 아깝지만 어쩌겠는가. 지금은 주석하만 혼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두 사람의 일격이 주석하의 가슴에 닿으려는 순간이었다.

주석하는 눈을 번쩍 떴다.

동시에 목을 콱 죄는 듯한 압박감을 느낀 빙군과 염군이 신음을 토했다.

“커윽!”

눈을 뜬 주석하는 여전히 가부좌를 풀지 않은 채 두 손을 휘저었다.

콰앙!

빙군과 염군의 목을 조르던 무형의 기운이 두 사람을 땅바닥에 그대로 내팽개쳤다. 그 위력이 실로 엄청나서 염군과 빙군은 다시 일어날 수 없었다.

“으으으.”

허공섭물인지 아니면 다른 재주인지 분간할 수 없는 상황에서 빙군과 염군은 바닥에서 흐느적거렸다. 강호에 출두한 후 최초의 수모이자 최악의 위기였다.

주석하는 가부좌를 풀고 일어났다. 이제 빙군과 염군의 내공은 단전으로 모두 돌아갔고 대신에 스스로 운용할 수 있는 혼군의 기운을 부른 상태였다.

“그대들이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면, 나를 적대시하지 않았다면 목숨은 건졌을 것이다. 그런데 분수를 참지 못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나를 노렸다.”

탐욕으로 내공을 노렸기에, 운기조식 하는 그를 노렸기에 이 둘을 살려둘 여지가 없었다. 원래 흑도팔군은 전생에서 그에게 내력을 아낌없이 전했던 자들이다. 그 고마움을 알기에 주석하는 친근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계속해서 그를 공격하는 빙군과 염군에게 자비를 베풀 수 없었다. 이 둘을 살려둔다면 두고두고 골치를 앓을 것이 뻔하니 어떻게 살려둘 것인가.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빙군과 염군은 뼈가 부러져 제대로 몸조차 가누지 못했다.

주석하는 한 손을 뻗어 허공섭물을 펼쳤다. 염군이 끌려와 그의 손에 잡혔다.

그는 염군의 멱살을 잡고 분노한 눈으로 물었다.

“염군, 네놈의 무공을 내놓아라. 극양염천신공의 구결을 말하라.”

황당한 요구에 염군은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보따리까지 송두리째 내놓으라니 이게 무슨 소리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주석하도 고민이 많았다. 이들의 내공을 제대로 활용하려면 이들의 심법이나 신공을 익혀야 한다. 그가 이들을 찾아가려고 한 이유도 이들의 무공을 배우기 위해서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이들을 죽여 버리면 무공을 얻을 수 없게 된다. 자연히 단전에 품은 내공 역시 무용지물이 된다.

“흐흐, 무공? 미친놈!”

당연한 반응이 돌아왔다. 누가 자신의 무공을 남에게 가르쳐 주려 할까.

“미친놈인지 아닌지는 두고 보면 알 일!”

주석하는 염군의 멱살을 잡고 땅바닥에 내팽개쳤다.

콰앙!

“끄악!”

비명이 일면서 염군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곳곳이 부러지고 입에서 피를 뿜는 중상이었다.

그때 주석하의 눈에 이상한 것이 눈에 띄었다. 염군의 옆에 책자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염군이 땅에 부딪혀 충격을 받았을 때 품에서 빠져나온 듯했다.

그가 손을 젓자 책자가 허공을 날아 손에 잡혔다.

극양염천신공.

책자의 제목이었다. 평소 품에 넣어 다니던 비급이 떨어진 것이다.

그 장면을 본 염군이 부들부들 떨면서 분노의 소리를 질렀다.

“이, 이놈이! 내 비급을 내놓아라!”

주석하는 피식 웃으며 비급을 챙겼다. 굳이 무공을 내놓으라고 윽박지를 필요가 없어졌다. 이 비급으로 극양염천신공을 익혀 염군의 내력을 움직일 수 있다.

“염군! 잘 쓰겠다. 네 무공도, 네 내공도.”

“이 악마 같은 놈!”

염군의 비난은 길지 않았다. 주석하가 가볍게 손을 젓자 손에서 뻗은 강기가 염군의 머리를 잘랐다.

염군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저세상으로 떠났다. 흑도팔군의 일인으로 강호를 호령했던 대마두의 허망한 죽음이었다.

주석하의 시선이 빙군으로 향했다.

“넌 무공 구결을 내놓겠느냐? 아니면 비급을 내놓겠느냐?”

빙군이 서릿발 날리는 눈빛으로 주석하를 쏘아보았다.

“나에게는 그런 방식이 통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염군처럼 약하지 않다. 비급도 갖고 다니지 않는다. 흐흐, 네놈은 뜻을 이루지 못한다.”

주석하는 빙군을 향해 손을 뻗었다.

빙군의 품속에 있던 각종 물건이 주석하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약간의 노자와 향낭, 그리고 신분패. 별다른 것이 없었다.

주석하는 푸른 옥패를 살피면서 물었다.

“이건 무엇이냐?”

“그건…… 북해빙궁 궁주를 뜻하는 북빙패(北氷牌)다.”

“북빙패라…….”

비급이 없으니 이것이라도 챙겨놓을까.

“비급은 없어?”

“미친놈!”

“구결을 알려줄 의향은?”

“얼빠진 놈!”

일궁의 종사인 빙군이 의지를 꺾을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한참 빙군을 노려보았으나 그 태도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어쩔 수 없다. 빙군의 무공을 얻는다면 금상첨화겠지만 없다고 그가 답답할 것도 없다. 이미 얻은 세 사람의 무공과 내력만으로도 그는 절대자의 위치에 이르렀으니까. 흑도팔군 가운데 다섯 사람이 아닌, 세 사람이나 네 사람의 진전을 얻는다고 하여 무엇이 달라질까.

“어쩔 수 없군. 내가 살려둘 생각이 없음을 알았나 보지?”

주석하도 더는 매달리지 않았다. 가볍게 손을 젓자 손에서 수강이 뻗어 나가 빙군의 목을 절단했다.

염군과 마찬가지로 빙군 또한 목숨을 잃었다.

“하아!”

주석하는 한숨을 쉬며 빙군과 염군의 시체를 한쪽으로 치웠다.

흑도팔군 가운데 두 사람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실로 경천동지할 사건이건만 주석하는 무덤덤했다.

만일 빙군, 염군과 무공으로 대결했다면, 그것도 두 사람이 연합해서 그를 공격했다면 오늘 고혼이 된 사람은 그였을지도 모른다.

주석하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며 빙군과 염군의 명복을 빌었다. 전생에서 그에게 내공을 전수한 사람들이니까.

지금까지 그는 신창패존, 빙군, 염군, 세 사람의 목숨을 빼앗았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도전을 받고 죽여야 할지 모른다.

정파십존과 흑도팔군을 합치면 모두 열여덟인데 그 가운데 과연 몇이나 그에게 우호적일까. 오늘 빙군과 염군의 행태를 보면 우호적인 자보다 아닌 자가 더 많으리라.

“이번 생도…… 쉽지 않구나.”

덕양에서 편히 살려고 결심했는데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전생보다 더 파란만장한 생을 살고 있었다. 예전에는 변방에서 근근이 목숨을 이어갔다면 지금은 중원 한복판에서 천하의 운명을 좌우할 느낌이다.

왜 이렇게 된 걸까.

“백화루주가…… 우는구나.”

주석하는 자신을 회귀시켰던 그때의 뇌군을 떠올렸다. 그는 지금 순수한 자신의 의지로 살아가는 걸까, 아니면 과거 뇌군의 의지에 맞춰서 살아가는 걸까, 아니면 무한회귀공을 넘긴 마교의 의도에 따라 살아가는 걸까.

아직은 도저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