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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검천하-111화 (111/273)

111화 구주사은 (1)

정파십존의 일인이자 무림맹 군사인 만사지존 제갈휘는 전서구를 통해 날아온 소식에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 사천당문 멸문. 빙군, 염군 사망.

경천동지할 일이 일어났다. 전달된 정보만 보면 빙군과 염군이 연합하여 사천당문을 멸문시키고 양패구상했다는 소식이었다. 정파에서 사천당문이 차지하는 위치와 흑도팔군인 염군과 빙군의 막강한 무공을 고려하면 얼핏 무게추가 맞는 것 같지만 제갈휘는 이것이 말도 안 되는 분석임을 잘 알고 있었다.

사천당문이 과거의 당문이 아니고 흑도팔군은 그렇게 약하지 않았다. 흑도팔군 일인과 당문이 싸운 것도 아니고 두 사람이며, 하필이면 사이가 나쁘기로 소문난 빙군과 염군이 연합 작전을 폈다고는 절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함께 있었다면 내가 넣은 익명 문서에 반응했다는 건데…….”

직감이 알려주고 있었다. 빙군과 염군이 주석하를 해치려고 했다는 사실을. 거기에 왜 당문이 엮였는지 또 빙군과 염군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모른다. 그 부분은 조사해보면 결국 밝혀질 일이다.

다만…… 빙군과 염군의 죽음에 주석하가 개입했다는 사실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보통내기가 아니구나. 흑도팔군 둘이 노렸음에도 살아남았고 반대로 그 둘을 제거했다니.”

운이 좋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운도 실력이고 적어도 흑도팔군 수준이라면 운이 작용할 여지는 확연히 줄어든다.

이제 주석하를 흑도팔군 이하라고 평가할 수 없게 됐다. 그는 신창패존, 빙군, 염군을 제거한 희대의 고수니까.

“내버려 두면 안 될, 정말 위험한 인물이다.”

정파십존이 한 사람 죽었을 때 흑도팔군은 둘이 죽었으니 다시 정파가 유리해졌다. 하지만 제갈휘는 탐탁지 않았다. 자신의 예측을 벗어난, 자신의 계략을 거스르는 인물이 튀어나온 것을 용납하기 어려웠다.

입수한 정보가 적힌 양피지 조각을 태우고 제갈휘는 화원을 거닐며 생각에 잠겼다.

모든 게 확실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지만 자칫 실기하면 위험하다. 불확실할수록 빨리 제거하는 편이 좋다.

“누구를 동원하지?”

어설픈 문파나 인물은 동원해봐야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주석하의 무력이 확인된 이상 적어도 정파십존 급이어야 한다. 하나는 불가능하고 둘도 위험하니…… 적어도 셋 이상이어야 한다.

“젠장, 쉽지 않군.”

흑도팔군을 또 동원하기는 어렵다. 남은 선택지는 정파십존뿐이다. 다만 정파십존은 부르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만일 실패하면 정파 전체가 기울지도 모른다.

“바보 같은 불존이…….”

그날 반야불존이 주석하를 처리했다면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제갈휘는 내심 한바탕 욕을 퍼붓고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이제 어쩔 수 없다. 승부를 걸어야 할 시점이다. 정파십존을 동원해야 한다.

**

추운 겨울이 가고 따뜻한 봄이 올 때까지 주석하는 흑검문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딱히 갈 곳도 없었지만 어쨌든 그도 바쁘게 보냈다. 외부인을 불러 독이 풀린 우물을 중화한 다음 폐쇄했고 간간이 혈혼도객을 시켜 흑검문 문도를 가르쳤다.

그가 최근에 알게 된 무공은 흑검문 제자에게 전수하기에 부적합한 것이어서 궁여지책으로 혈혼도객을 끌어들였다. 빈객인 혈혼도객도 밥값을 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고 실제로 그가 눈을 부라리자 혈혼도객은 즉시 꼬리를 말았다.

지금 주석하가 매진하는 분야는 뇌군의 진법과 염군의 극양염천신공이었다. 염군이 남긴 비급은 난해한 데다 설명이 부족하여 각고의 노력이 필요했다. 간신히 주석하는 염군의 내력을 대충이나마 자유롭게 운용할 수 있게 됐다.

이제 그는 혼군, 악군, 염군의 내력을 제 것처럼 쓸 수 있게 됐다. 아쉽게도 빙군의 내력은 빙군이 죽어버린 관계로 영원히 사용할 수 없게 됐고 마지막 남은 독군의 내력을 다루려고 언젠가 독군을 한 번 찾아가 볼 생각이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해.”

물론 세 내력을 융합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세 내력을 각각 사용해도 당금 무림에서 대적할 강자가 없음을 그도 잘 안다. 이제는 덕양에서 조용히 머물면서 돈을 모아 백화루를 사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마교의 공습이 없다는 전제하에서다. 마교가 설치는 세상이 오면…… 아직은 그도 답을 찾지 못했다.

주석하는 잎이 채 돋지 않은 마른 숲으로 둘러싸인 연무장에서 극양염천신공을 연마하고 있었다.

될 듯 될 듯하면서도 여전히 깨달음이 부족했다. 그날 염군이 당문의 전각을 불태우는 장면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난 왜 안 되냐고…….”

주석하는 손에 쥔 나뭇가지를 살피며 한숨을 내쉬었다. 마른 나뭇가지 끝부분이 살짝 그을어 있었다.

웬만한 고수라면 삼매진화로 물건에 불을 붙일 수 있다. 주석하 수준의 고수라면 눈 감고도 가능해야 한다. 다만 그는 그런 수련을 해본 적이 없어서 못 할 뿐이다. 절대 무공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지금 그가 수련하는 극양염천신공은 삼매진화와는 차원이 다른 무공이라 나뭇가지에 불을 붙이는 데도 애를 먹고 있었다. 제대로 신공을 운용하지 못하는 게 확실했다.

“누구는 거대한 전각에도 불을 놓는데 나는 나뭇가지를 태우기도 어렵네.”

나뭇가지를 들고 극양염천신공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단전에서 염군의 내력이 물밀 듯이 일어났다. 온몸이 뜨거워지는 기분이다.

주석하는 흑검소에 혼군이나 악군의 내력을 밀어 넣을 때처럼 나뭇가지에 염군의 내력을 밀어 넣었다.

피시시식-

하얀 연기가 조금 피어올랐다.

“허어, 마른 장작이 왜 이 모양이냐!”

아무래도 비급이 진짜 극양염천신공의 진수를 포함하지 않은 것 같다.

“그 자식이 나를 골리려고 엉뚱한 비급을 준 건가?”

그렇게 생각하기엔 염군의 내력이 제대로 운용되는 것이 신기했다. 내력은 운용이 되는데 그 위력을 밖으로 표출할 수 없다.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주석하는 주위를 둘러보며 풀밭에 드러누웠다. 만사가 귀찮았다.

가지만 앙상한 나무로 둘러싸인 이 연무장은 야산의 비탈에 자리 잡고 있었다. 뒤로는 울창한 숲이 아담하게 펼쳐져 있으나 지금은 새순이 돋기 전이라 볼품없었다. 앞으로 흑검문의 전각이 곳곳에 띄엄띄엄 세워진, 평화로운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누운 채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가를 반복하며 신공을 떠올렸다.

“부싯돌에서 벗어나기도 쉽지 않겠네.”

실망해서 기지개를 켜며 그는 내공을 끌어 올려봤다. 염군의 내력은 혼군이나 악군의 내력보다 훨씬 많았다. 전생에서 얻은 내력에 염군을 죽이면서 뺏은 내력 일부가 더해졌기 때문이다.

“이 어마어마한 내공을…….”

순수 내공으로만 써야 한다는 점이 아쉬웠다. 그는 내력을 일주천한 다음 기지개를 켠 손끝으로 힘껏 내뿜었다.

콰아앙-

다른 내력과 마찬가지로 장법으로 운용할 수는 있었다. 그의 손에서 강력한 장력이 뿌려지며 머리 뒤쪽의 숲을 한바탕 휩쓸었다.

“이걸로 만족해야지.”

주석하는 비탈에 드러누워 잠을 청했다. 무공 연마는 재미있지만 뜻대로 되지 않으니 답답하다.

산들바람이 불면서 잠이 솔솔 쏟아졌다.

눈을 감으려 할 때 이상한 냄새가 났다. 그리고 아래쪽에서 몇 사람이 허겁지겁 몰려왔다.

“소문주님!”

“하아암, 귀찮게 왜 그래? 잠 좀 자자고.”

“소, 소문주님!”

뭔가 분위기가 수상쩍다.

“대체 왜 그러는데?”

“뒤, 뒤 좀 돌아보세요! 위험합니다!”

이게 뭔 말이지? 주석하는 미간을 찌푸리며 느긋하게 상체를 일으켜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의 입이 쩍 벌어졌다. 어째 냄새가 좀 나더라니!

뒤쪽 마른 숲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당연히 주석하는 어떻게 된 상황인지 몰랐다.

“허억!”

흑검문 문도들이 정신없이 움직였다.

“물! 물 떠와!”

“서둘러! 불이 더 번지면 위험해!”

“사람들도 불러오고!”

주석하는 멍한 상태로 그 장면을 쳐다봤다. 조금 전까지 멀쩡하던 산에 불이 왜 난 거지? 이래서 건조한 봄이 문제다.

‘이럴 때 빙군의 무공을 익혔더라면…….’

주석하는 빈손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빙군의 무공은 이번 생에서는 얻기 어려울 듯하다.

“이번 생은 글렀어…….”

**

남궁천은 인가에서 떨어진 산비탈로 올라섰다.

흑검문이 덕양에서도 변두리에 자리 잡고 있기에 찾아가기가 다소 번거롭다. 그나마 예전에 갔던 곳이라 자신 있게 부친을 안내했다.

지금 그의 뒤를 따라 오는 사람은 남궁세가 가주인 남궁후와 누이동생 남궁서란이다.

남궁천 본인은 창천일룡이라는 별호에 주목받는 후기지수인 중원사룡에 속해 있고 창궁무존이라는 칭호를 얻은 부친은 정파십존의 일인이다. 심지어 남궁서란은 검봉이란 호칭에 무림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천상삼화다.

당연히 남궁세가는 현 무림에서 가장 잘 나가는 세가에 속했다. 심지어 구대문파와도 그 명성을 겨눌 수 있을 수준이다.

그런 남궁세가의 주축이 작은 시골 문파인 흑검문을 찾아온 것은 정말 콩 심은 곳에 팥이 날 만큼 말도 안 되는 사건이다.

“이쪽입니다.”

남궁천은 오솔길을 올라가며 두 사람을 열심히 안내했다.

일전에 곤륜십이검수 사건 때문에 주석하를 주시했었다. 특이한 이력을 지닌 자였고 마음에 들었기에 흑검문을 방문했었다. 자신이야 젊어서 두루 견문을 넓히다 보니 흑검문을 방문하게 되었지만…… 가주인 아버지는 왜 방문하는 걸까. 무림의 이목이 쏠릴 일이다.

그런데도 먼 곳까지 방문을 강행했으니 분명히 이유가 있다.

‘뭔지 모르겠군.’

남궁천은 고개를 저으며 발걸음을 빨리했다.

이 나지막한 언덕만 넘으면 흑검문 정문이 나타난다. 뒤를 보니 남궁후가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따라오고 있었고 남궁서란은 불만이 가득한 듯 인상을 쓰고 있었다.

만진장 마지막 날에 봤던 남궁후의 만족한 표정과 남궁서란의 불만스러웠던 짜증이 지금도 똑같이 남아 있다.

‘아버지도 주석하를 좋게 본 건가?’

그렇지 않다면 오지 않았을 테니 의심의 여지는 없으나 그 이유를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나지막한 언덕을 넘었다. 흑검문이 보이고 시야가 탁 트인 순간 남궁천은 비명을 질렀다.

“허억!”

남궁후와 남궁서란도 마찬가지였다. 경악한 표정으로 그들은 서로를 쳐다봤다.

“이게 어떻게 된…….”

“어서 가서 돕자!”

남궁후가 재빨리 몸을 날렸고 그 뒤를 남궁천 또한 급하게 뛰어갔다. 정작 남궁서란은 한숨을 내쉬며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자식이 천벌을 받은 거야!”

오히려 남궁서란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내심 욕을 퍼부었다. 그녀의 앞에는 활활 타오르는 산불이 숲을 태우며 메케한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

“남궁 대협이 아니었다면 정말 큰일 날 뻔했습니다.”

흑검문주 주격은 진심으로 공수하며 허리를 굽혔다.

걷잡을 수 없이 번지던 불길이 남궁후가 검으로 숲 일부를 쳐내면서 가까스로 불길이 잡혔다. 그대로 두었더라도 흑검문 전각으로 번질 일은 없었겠지만 일대의 야산이 홀라당 다 타버렸을 것이다.

“하하, 서로 돕고 살아야지요.”

남궁후가 얼굴에 묻은 검댕을 수건으로 닦으며 여유롭게 웃었다.

불을 끄느라 정작 흑검문도보다 더 고생한 사람이 바로 남궁후와 남궁천이었다. 흑검문도들은 무공이 얕아서 물을 긷는 것을 제외하면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 물마저 우물 하나가 폐쇄되어서 제 역할을 못 했다.

뜻하지 않은 사건 때문에 흑검문과 남궁세가의 만남은 정신없이 시작됐다.

주변이 정리되자 사람들을 물리고 차를 대접하면서 주격이 물었다.

“오신다는 전갈을 예전에 받았습니다만 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남궁세가의 위세와 정파십존인 남궁후의 신분을 알기에 주격은 지극 정성을 다했다.

참석한 흑검문 사람은 주격과 신옹이었다. 주석하는 산불을 마무리하느라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당문과 흑검문 사이에 최근 벌어진 사건 때문입니다.”

남궁후의 발언에 주격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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