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구주사은 (2)
그날의 일을 되새긴 주격이 완곡하게 대답했다.
“그때 우리 흑검문과 당문 사이에 약간의 문제가 있긴 했습니다만 당문의 멸문과 저희는 조금도 관계없습니다.”
“그렇습니까?”
“들으셨다시피 당문의 멸문은 흑도팔군인 빙군과 염군이 저지른 일입니다. 그날 저도 어쩌다 휘말려서 그곳에 있었습니다만 흑검문도는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두 노군의 무공이 정말 대단했습니다.”주격은 괜히 의심을 받는 듯하여 열심히 설명했다.
“그럼 아드님도?”
“제 자식 녀석은 그날 전혀 보지 못했습니다.”
실제로 주격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빙군과 염군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놀랐다. 단지 당문의 독에 뒤늦게 중독되어 죽었다고 짐작했다.
남궁후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시작했다.
“문주님, 저는 이곳에 적의를 품고 온 게 아닙니다. 우호적인 관계로 온 거지요.”
“하하, 적의라뇨. 무슨 섬뜩한 말씀을…….”
주격은 삐질삐질 흐르는 땀을 닦았다. 남궁세가에 비하면 흑검문은 오합지졸이니 절대 심기를 거스를 수 없었다. 하지만 정과 사로 엄연히 나누어져 있어 방문 의도가 찜찜한 것도 사실이었다.
“실은 주석하 소문주 때문입니다.”
주석하 이야기가 나오자 주격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녀석이 예전에 강호로 나갔을 때 남궁세가 영예랑 다투었다더니 미운털이 박혔나. 그래도 그는 주석하를 믿었다.
“지금 무림맹의 제갈휘 군사께서 소문주를 주시하고 있습니다. 좋지 않은 쪽으로 말입니다. 그분은 당문의 멸문을 소문주의 짓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저, 절대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강호에서 진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갈휘 군사가 그렇다면 그게 진실이 되어 버리니까요. 군사는…… 아마도 소문주를 제거하려는 것 같습니다.”예상치 못한 말이 나오자 주격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남궁후를 노려보았다.
“남궁가주께선 만사지존의 의사를 통보하러 오신 거요?”
“아, 오해입니다. 그 소식은 저도 오는 도중에 들었을 뿐입니다. 미리 알고 대비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저는 어느 편도 아닙니다. 오늘은 순수한 마음으로 방문했습니다.”그나마 다행이라 주격은 안도했다. 어쨌든 흑검문은 남궁세가와 견줄 문파가 아니니까.
“소문주에게도 별도로 말하겠습니다만…….”
말이 이어질 때 주석하가 뛰어 들어왔다.
“오셨습니까?”
불을 끄느라 주석하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옷이야 원래 검은색이라 검댕이 묻든 말든 상관없었으나 얼굴과 손은 재가 묻어 엉망이었다.
그의 몰골에 남궁서란이 싸늘한 비웃음을 날렸다. 어쩌다 보니 이곳에서 유일하게 말끔한 사람은 남궁서란뿐이었다.
주석하와 인사를 나눈 남궁후가 다시 질문했다.
“주 공자, 당문의 멸문에 관여한 바 없는가?”
“저는 손을 거들지 않았습니다.”
빙군과 염군을 부추긴 바가 있긴 하지만 그가 당문에 직접적인 해를 끼친 바는 없다. 어쨌든 거짓말하진 않았다.
“제갈 군사는 다르게 생각하더군. 그래서 자네를 당문을 멸문한 공적으로 지목할 생각인 듯하네.”
“제갈 군사야 예전부터 저를 탐탁지 않게 여겼으니까요.”
“그건 아네만 이번에는 좀 심각하네.”
남궁후는 오는 도중 전달받았던 제갈휘의 서신을 설명했다. 당문의 멸문 배후에 흑검문이 있으며 흑검문 소문주인 주석하가 범인일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내용이었다. 지금 정파에서는 주석하를 처단할 협사를 모집한다고도 했다.
“내가 뭐라고…….”
도무지 제갈휘의 내심을 이해할 수 없자 주석하는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는 적어도 정파십존 가운데 셋 이상의 원군을 모을 거네. 자네를 처리하려고 말이지.”
셋이란 말에 주석하는 입을 쩍 벌렸다. 자신이 언제 이런 괴물이 되어버렸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과연 십존 셋을 상대할 수 있을까.
패존을 죽여 봤으니 한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가능하다. 적어도 그때보다 지금이 더 강해졌으니까.
다만 이번에 빙군과 염군을 동시에 제거한 것은 무공 다툼이 아니라 계략이었고 동일한 진기를 품었던 결과였다. 순수하게 무공으로 싸웠다면 그 둘을 과연 당해낼 수 있었을까.
그런 상황에서 세 사람을?
그것으로 보아 제갈휘는 그가 염군과 빙군을 처리했다고 확신한 듯했다. 사파에서 강한 자가 나오니 내버려 둘 수 없었을 것이다.
“정파십존의 무위는 자네도 잘 알겠지. 그런 자들 셋이라면…… 신이 아닌 이상, 아니 신이라도 살아남기 어려울 걸세.”
남궁후의 견해에 주석하도 동의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푸념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만진장에서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 건데…….”
다소 어이없는 한탄에 남궁후는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주석하가 의외로 순진하다는 생각에 그도 안타까웠다.
“나도 아네. 일단 내 의견을 제갈 군사에게 보내긴 했는데…… 얼마나 들어줄지 모르겠군. 하여튼 당분간 조심해야 하네. 제갈 군사가 자네를 노린다면 지극히 험난해지니까.”주석하에겐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나 마찬가지였다. 만진장에서 만났던 제갈휘와 자하검존. 그들이 목숨을 노린다면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과연 그들의 노림수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한 사람씩이 아니라 한꺼번에 몰려온다면?
주석하는 자하검존과 창궁무존이 동시에 그를 공격하는 장면을 상상해봤다.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지는 기분이었다.
‘젠장!’
어쨌든 남궁후가 미리 경고해준 것만으로도 어떻게든 대책을 세울 수 있어 무척 도움이 됐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제 명이 길어질 것 같습니다.”
주석하의 너스레에 남궁후가 대소했다. 그는 다시 주격에게 시선을 돌리고는 조용히 말을 건넸다.
“문주님, 제가 둘이서만 긴히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남궁후의 의사를 짐작하고 주격은 주석하를 내보냈다.
“너는 손님들을 데리고 이곳저곳 둘러보도록 해라.”
남궁천이야 예전에도 왔었기에 새삼 구경할 것도 없었지만 어쨌든 대청을 나가달라는 뜻인지라 주석하는 남궁천과 남궁서란에게 말했다.
“두 분은 따라오시지요.”
남궁서란은 내키지 않은 표정으로 주석하를 따라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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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스한 봄날이었건만 밖은 황량했다.
특히 오늘은 산불마저 발생하여 더욱 어수선했다. 아직 불이 완전히 꺼지지 않아 곳곳에서 흰 연기가 피어올랐고 숲은 메케한 냄새로 가득했다.
도무지 손님에게 장원을 안내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어쩌다 오늘 불이 났어?”
“하아, 그게 산신령이 미쳤는지…… 잠을 자는데 갑자기 숲에 불이 붙었더라고요. 까딱하면 타 죽을 뻔했다니까요.”
“누가 일부러 불을 놓은 건 아니고?”
“여기가 흑검문 소유지라 절대 그럴 일 없어요. 산신령이 분명해요.”
주석하는 산신령을 욕하면서 분노를 터트렸다. 이제는 남궁천과 꽤 친해져서 자연스럽게 형제처럼 말을 트는 사이가 됐다. 주석하는 남궁천과 거리낌 없이 통했다.
그런 주석하의 행동에 남궁서란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아무리 봐도 주석하의 행동은 조금 덜떨어져 보였다. 산신령이 있기나 한 건가? 어린애도 믿지 않을 일을. 저런 자와 좋다고 말을 섞고 있는 오빠 남궁천이 못마땅했다.
“소제, 일전에는 심법 때문에 고생하던데 이제는 별문제 없지?”
“아, 그 문제는 혼천신공을 사사하면서 해결했어요. 마침 제가 익혔던 경혼심법이 혼군의 혼천신공과 비슷했거든요. 그 덕에 손쉽게 심법을 익혔습니다.”주석하가 혼군의 진전을 이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기에 굳이 숨길 이유가 없었다.
“잘됐어! 그래서 소제의 무공이 일취월장했군.”
남궁천이 진심으로 축하했다.
남궁천은 만진장에서 주석하가 악군의 신물인 흑검소와 화존의 보법을 쓰는 것을 목격했었기에 어떻게 배웠는지 물어보고 싶었으나 너무 세세하게 물으면 껄끄러워할 것 같아 나중으로 미뤘다. 대신에 다른 궁금한 점을 물었다.
“그런데…… 정말 빙군과 염군의 죽음과 관계가 없어?”
조금 전 남궁후는 주석하와 당문 멸문의 연관성을 물었다. 남궁천은 그 대신에 흑도팔군의 연관성을 묻고 있었다.
주석하는 어떻게 대답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남궁천에게는 거짓말하고 싶지 않았다.
“최근에 흑검문과 당문 사이에 약간의 문제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저도 당문에 가게 되었는데…… 그때 빙군과 염군이 당문을 공격했죠. 그 두 사람…… 정말 무공이 대단하더라고요. 당문을 일거에 박살 내는데…… 어쨌든 그렇게 당문이 멸문된 후 저랑 염군, 빙군이 얽혔죠.”예상했다는 듯 남궁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염군, 빙군은 당문과 싸우느라 내력이 많이 소모된 상태였는데 저에게 시비를 걸어서…… 어쩌다가 그만…….”
주석하는 거짓말 대신 중요한 부분을 빼고 말했다. 빙군과 염군을 그가 죽인 게 사실이었으니 굳이 회피하지 않았다.
만진장에서 이미 주석하의 무공이 흑도팔군에 육박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빙군과 염군을 동시에 상대하기엔 미흡하지만 힘이 빠진 둘이라면 주석하도 상대할 만하다.
커다란 의문점을 풀었기에 남궁천은 충분히 이해하며 주석하를 다독였다.
“그렇지. 그들은 대마두니까 죽어도 싸지.”
남궁천은 정파여서 흑도팔군 둘의 죽음을 아쉬워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주석하가 무림 정의를 실현했다고 오히려 좋아했다. 따지고 보면 주석하는 오히려 당문의 원수를 갚아준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적어도 남궁천이 보기엔 그랬다.
현재 무림 최강고수인 흑도팔군의 수준에 이른 주석하를 남궁천은 대단히 높이 평가했다.
“다음에 만나면 중원사룡을 소개해줄게. 중원사룡이 인품도 무공도 괜찮거든. 꼭 내가 속해 있어서가 아니라.”
주석하라면 당연히 가장 명망 높은 후기지수와 어울려야 한다고 남궁천은 생각했다.
그들이 불에 탄 숲을 거닐며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주소은이 급히 뛰어왔다.
“오빠!”
그녀는 주석하 옆에 있는 남궁천을 발견하고 낯을 붉혔다. 그녀는 대청에 갔다가 남궁세가에서 방문한 사실을 알고는 뒤늦게 주석하를 찾아왔다.
“주 소저도 그동안 잘 지냈습니까?”
남궁천이 정중하게 인사했다.
주소은이 몸을 배배 꼬면서 몸을 낮췄다.
“찾아주셔서 감사드려요. 편히 쉬다가 가시길 바라요.”
인사를 마친 주소은은 주석하 뒤로 후다닥 숨었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빼꼼히 내밀며 남궁천을 힐끔거렸다.
‘유 소협과는 분위기가 확실히 다르네. 유 소협은 부드러운 인상인데 남궁 소협은 기개가 넘쳐.’
주소은의 머릿속에서 어느새 유비연은 지워지고 없었다.
그녀가 안면을 붉히며 남궁천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그녀의 등을 콕콕 찔렀다. 놀라서 뒤를 홱 돌아보니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아름다운 여자가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주소은은 이처럼 예쁜 여자를 태어나서 처음 봤다. 얼마 전에 만났던 녹윤영을 이 여자와 비교하면 거의 오징어 수준이라고 해야 할까.
“누, 누구세요?”
“전 남궁서란이에요. 그대는…….”
“아, 안녕하세요. 전 주소은이라고…….”
“문주님 따님이셨구나. 반가워요.”
남궁서란이 손을 내밀었다.
갑자기 나타난 아름다운 여자를 수상쩍게 여기던 주소은은 여전히 남궁천과의 대화에 정신없는 주석하의 존재를 깨달았다.
잠시 남궁서란과 주석하를 번갈아 쳐다보던 주소은이 미간을 확 찌푸렸다.
“너도 우리 오빠 꼬시러 온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