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113화 (113/273)

113 구주사은 (3)

남궁서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닌 밤에 홍두깨도 아니고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지? 그녀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인간이 주석하였다. 처음 만날 때부터 사사건건 다투지 않았던가. 그런데 꼬시러 왔다니?

주소은은 그녀에게 빈정거리듯 경고했다.

“내가 이미 봤거든. 아까부터 자꾸 오빠를 흘끔거리는 게…….”

남궁서란은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솔직히 자꾸 훔쳐본 건 맞다. 다만 그 이유는 주석하가 그녀를 해코지하지 않을지, 남궁천을 위협하지 않을지 걱정되어서다. 또 주석하의 꼬투리를 잡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그게 호감 때문에 자꾸 살피는 것으로 보였나?

“김칫국 마시지 마세요. 우리 오빠 그렇게 녹록한 사람이 아니거든요. 지난번에 왔던 그 처자도 아무 소득도 못 얻고 돌아갔으니까요.”

그 처자는 녹윤영을 의미했다. 의기양양하게 한바탕 말을 쏟아 부은 주소은이 주석하 옆에 딱 붙어 섰다.

“……이!”

얼이 빠진 남궁서란이 버럭 소리치려 할 때였다.

“물론 소저는 남궁 소협의 누이이시니, 또 강호의 유명 여협이시니 자신감이 넘치시겠지만……. 굳이 제가 충고드리자면 여기에서는 남궁 소협처럼 의젓하게 행동하시면 도움이 될 거예요.”주소은은 남궁천을 띄우는 것을 빼놓지 않았다.

주소은이 오빠인 남궁천을 치켜세웠으니 남궁서란은 화를 낼 수도 없어 속으로 분노를 삭일 수밖에 없었다.

남궁천은 그러잖아도 지나치게 틱틱대는 남궁서란에게 주의 줄 생각이었는데 주소은이 똑 부러지게 말하자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남궁서란 앞에서 이처럼 자신감 있게 그 존재를 드러내는 여자를 본 적이 없었다.

대부분 여자는 남궁세가란 배경에, 남궁서란의 외모에 눌려 그녀 앞에서 움츠러들었다. 그런데 주소은은 확연히 달랐다. 남궁천은 새로운 눈으로 주소은을 보게 됐다.

주소은의 외모도 상당히 괜찮았다. 그가 평소 접하던 무림의 여자와는 다른, 다소곳한 분위기가 풍겼다. 주석하의 외모가 남다른 데가 있으니 당연히 그 동생인 주소은도 외모가 뛰어났다.

“흠흠.”

주석하의 기침이 어색한 분위기를 깼다. 그는 불탄 야산을 가리키며 열심히 설명했다.

“원래 여기가 연무장입니다. 지금은 불에 타서 볼품없어졌지만 원래는…….”

남궁서란은 입술을 삐죽이며 속으로 욕을 했다.

‘흥! 네놈이 나쁜 놈이라서 불이 났지.’

주변을 휙 둘러보니 가까운 숲은 대부분 홀라당 타버렸다.

“그래도 이만하길 다행이죠. 저 너머까지 옮겨붙었다면 큰일 날 뻔했어요. 이렇게 된 김에 제대로 밀어서 연무장을 넓혀야겠어요.”

불탄 숲을 보며 남궁천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고 주석하는 이곳이 불탄 당문과 비교되어 한숨을 내쉬었다.

‘극양염천신공을 제대로 익히면 이 정도 불내는 건 아무것도 아니겠군.’

주석하는 마른 나뭇가지에도 불을 붙이기 힘들었던 신공 성취에 불만이 많았다. 다시 생각해도 엄청난 염군의 내공을 지닌 자신이 불을 다루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자, 이만 내려가죠.”

주석하는 사람들을 아래로 내려보내면서 극양염천신공을 떠올렸다. 그는 무심결에 뒤쪽 숲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십여 걸음 내려갔을까.

이상한 낌새에 남궁천이 뒤를 돌아봤다. 방금 꺼졌던 숲이 다시 불타오르고 있었다.

“어? 불이다!”

무심코 뒤를 돌아본 주석하도 입을 쩍 벌렸다. 아직 불씨가 남아 있었나?

**

대청 내부의 분위기는 어두웠다.

주격은 심상치 않은 문제가 나오리라 짐작했다. 모두를 내보냈으니 만사지존이 주석하를 노리고 있다는 정보보다 더 중요한 내용이리라.

차를 쭉 들이켠 남궁후가 묵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흑검문은 그동안 오십 년간 발이 묶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맞습니까?”

주격의 부친이 흑검문을 세우면서 오십 년간 덕양을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그 규제가 최근에야 풀렸다. 주격은 이 사실을 어떻게 남궁후가 아는지 궁금했다.

“그렇습니다만.”

“그 이유를 아십니까?”

주격은 눈을 뻐끔거렸다. 돌아가신 부친에게 단 한 번도 그 이유를 들은 적이 없었다. 그도 물어본 기억이 없다. 어려서부터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였으니까. 지금 흑검문에는 그 규제가 만들어진 이유와 과정을 기억하는 자가 한 명도 없었다.

“음, 모르시는군요. 그때의 사건을 말씀드리지요.”

“남궁세가에서 어떻게 아십니까?”

“남궁세가도 오십 년 전에 일어난 그 사건과 관련이 있습니다.”

담담한 남궁후의 대답에 주격은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그냥 단순한 규제 아니었나? 타 문파도 관련되어 있다고? 금시초문이었다. 지금까지 흑검문은 다른 문파와 교류한 적이 없었다. 그의 아버지가 문파를 연 이후 이제야 외부와 교류를 진행하고 있다. 그것도 적혈방이 먼저 쳐들어오는 바람에 이렇게 된 거다.

“구주사은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주격은 고개를 저었다. 전혀 모르는 내용이었다.

“구주사은은…… 남궁비, 주선풍, 우청엽, 탄허 이 네 사람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주격은 입을 쩍 벌렸다.

“설마…….”

주격이 아는 사람이 등장했다. 바로 주선풍. 주석하의 할아버지이자 자신의 아버지, 흑검문을 세운 개파조사 주선풍을 어찌 모를까.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었다. 구주사은이라는 이름도. 이는 다른 사람들이 유명인사가 아니어서가 아니라 그가 강호 견문이 좁아서였다.

“이들은 지금부터 오십여 년 전, 강호를 호령하던 고수였습니다. 지금은 그 이름조차 기억하는 이가 많지 않습니다만, 당시 이들 네 사람은 이십 대의 열혈청년으로 중원 무림을 위해 몸을 바쳤지요.”남궁후가 부친에게 들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구주사은(九州四恩).

지금부터 오십 년 전, 강호에 위명을 떨치는 네 사람이 있었다.

바로 제왕검(帝王劍) 남궁비, 흑풍검신(黑風劍神) 주선풍, 극마서생(極魔書生) 우청엽, 반야불존(般若佛尊) 탄허.

남궁비는 남궁천의 할아버지이자 선대 가주로 당시 남궁세가의 소가주였고, 주선풍은 주석하의 할아버지였다. 탄허는 젊은 시절 강호를 누비던 반야불존의 법명으로 현재 정파십존의 일인이다.

당시 이들은 이십 대 중반의 비슷한 나이로 청운의 꿈을 품고 의기투합했다. 다만 정파였던 세 사람과 달리 흑풍검신 주선풍만은 유일하게 정사지간이었다.

강호에서는 중원 무림을 위해 헌신하는 이 네 사람을, 천하의 은혜로운 인물이라 하여 구주사은이라 불렀다.

어느 날 우연히 구주사은은 배교의 전설을 듣게 된다. 중원 서쪽, 서역 어디엔가 있다는 사교의 집단, 배교에 천의(天意)를 거스르는 신물이 있다는 소문이었다. 배교는 특이한 문파였기에 그 위험성이 대단히 높았다.

천하 무림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던 젊은 네 사람은 배교의 신물을 확인하고자 했고 마침내 서역으로 먼 길을 떠났다.

우여곡절 끝에 배교에 도착한 구주사은은 배교의 신물을 발견하고 이를 빼내는 데 성공한다.

이때 그들이 확보한 신물은 만리안석, 무한회귀공 비급, 여의신단이었다. 그나마 만리안석의 신비는 가장 풀기 쉬웠다. 그들은 어렵지 않게 만리안석의 특별한 능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한회귀공은 너무 황당무계하여 믿을 수 없었고 지금 당장 익히거나 이해할 수 있는 무공도 아니었다.

여의신단 또한 몇 알을 탈취했으나 그 위험성 때문에 직접 복용하고 효과를 입증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이 배교의 신물을 중원으로 가져와서 연구하기로 했다.

신물을 도둑맞은 배교에서는 무시무시한 추적대를 보냈다. 구주사은은 당시 중원 최강의 고수였기에 쉽사리 배교에 당하지 않았다.

간신히 배교의 추적을 뿌리치면서 중원으로 들어왔을 때 그들에게 새로운 적이 나타났다. 배교 신물의 비밀을 어떻게 알았는지 마교가 그들을 노렸다.

마교는 배교처럼 쉽지 않았다. 구주사은은 목숨을 건 여정을 계속했고 마교는 이들을 끝없이 노렸다.

그 과정에서 구주사은은 큰 부상을 당했고 마교 또한 회복하기 쉽지 않은 타격을 입었다.

마교와 치열한 사투 끝에 구주사은은 무사히 중원으로 돌아왔다. 다만 만리안석은 중간에 행방불명 되었고 무한회귀공은 마교에 빼앗겼으며 여의신단은 일부만 가져올 수 있었다.

어찌 보면 참으로 허망한 결과였다.

배교 신물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 사건은 이것으로 막을 내리는 듯했다.

이 사건 이후 구주사은은 대책을 숙의했으나 마교를 찾아가 신물을 되찾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부상으로 한걸음 물러난 남궁비와 달리 우청엽은 어떻게든 마교에서 신물을 되찾으려 했다. 우청엽의 주도로 마교를 급습할 특수대를 모집하고 계획이 세워졌다. 주선풍과 탄허도 우청엽의 계획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마교로 떠난 특수대가 마교를 급습하기 하루 전, 특수대는 불시에 마교의 습격을 받았다. 그 결과 특수대는 괴멸했다.

특수대에 참가했던 사람들의 면면은 모두 믿을만한 인물이었기에 절대 정보가 마교에 새어 들어갈 수 없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특수대의 괴멸은 실로 놀라운 이변으로 받아들여졌다.

우청엽은 꺾이지 않았다. 그 후로도 계속 마교를 노렸으나 그때마다 실패했다.

“구주사은의 말년은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남궁후의 착잡한 말투를 주격도 충분히 이해했다. 그의 부친 주선풍이 그 후로 덕양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니까.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특수대 작전이 실패한 후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구주사은은 대책을 논의했습니다. 그때 그들은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게 뭐지요?”

“무한회귀공! 마교 교주 천마가 무한회귀공을 익혀 시간을 되돌렸다는 거지요. 어쩌면 특공대 작전은 처음에는 성공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무한회귀공을 익혀 시간을 되돌린 천마는 구주사은이 언제 어디로 습격하는지 사전에 알게 되었고 그 때문에 절대 성공할 수 없었다는 해석입니다.”주격의 머릿속을 무서운 생각이 엄습했다. 대청 내부에 무거운 기운이 내려앉았다.

“구주사은은 책임감을 통감했습니다. 그들이 배교의 물건을 세상에 들어냄으로써, 또 마교가 이를 이용함으로써 중원 무림이 혼란에 빠졌다는 거지요. 그들이 무엇을 하든 마교가 이미 아는 이상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다면서…….”

“그래서 모두 은퇴한 거군요.”

“그렇습니다. 저희 부친 제왕검께서는 그때 당한 부상이 심해 어차피 은거해야 했고 흑풍검신께서는 이곳 덕양에 칩거하면서 무림에 발을 끊으셨지요. 반야불존께서도 소림에서 두문불출하시면서 수행을 쌓았고…… 오직 극마서생만 계속 마교에 저항하셨죠. 무림 누구도 몰랐지만 그분은 끝없이 배교의 신물을 회수할 계획을 세웠고 실행에 옮겼습니다.”남궁비가 한숨을 길게 쉬었다.

극마서생 우청엽의 말년은 비참했다. 오로지 마교를 섬멸하고 신물을 되찾을 기회를 노리며 절치부심하던 그는 정파의 고수로 성장한 아들과 함께 마교로 쳐들어갔다.

그 후 우청엽에 관한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십만대산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다고 세인들은 추측했다. 마교 섬멸에 목숨을 걸었다가 일가족이 몰살하고 한 가족의 대가 끊어진 것이다.

“극마서생에 비하면 우리는 정말 편하게 책임을 회피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비록 선대에 벌어진 일이라지만 남궁후는 그 책임을 영원히 지울 수 없었다.

주격은 생전 처음 듣는 비사에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그의 부친 주선풍이 오십 년간 덕양을 떠나지 말라고 한 것은 죄책감을 사죄하고 가문을 지키는 방법이었다. 오래전 세상을 떠난 주선풍의 마지막이 다시 떠올랐다.

남궁후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쳤다.

“우리는…… 중원 무림의 죄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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