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중독 (1)
남궁후의 침통한 음성이 주격의 복잡한 머릿속을 차갑게 식혔다.
주격은 표정을 굳힌 채 묵묵히 허공만 바라봤다.
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어릴 때 봤던 부친 주선풍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의 부친도 몸이 좋지 않았다. 어디에서 다쳤는지 알 수 없는 상처가 온몸에 가득했고 가문과 관련한 일을 물었을 때 항상 침묵만 지키셨다.
흑검문을 세웠지만 문파 운영은 단지 보여주기일 뿐 세력확장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거기에 오십 년간 덕양을 벗어나지 말라는 규제까지.
한때 그는 부친을 원망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순응하며 받아들였다. 주격은 부친이 그렇게 유명했던 무림인이었는지 알지 못했다. 흑검문에는 오직 싸구려 검법만 남았고 변변한 심법 하나 없어 내공을 쌓을 수 없었다.
“하아…….”
그날 부친이 돌아가시던 날 들었던 마지막 당부가 떠올랐다.
- 오십 년이 채워질 때까지 절대 덕양을 떠나지 말거라.
주격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덕양에 처박혀 있으면 무림에 대한 죄책감이 사라지기라도 하는 건가. 덕양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가문을 보전할 수 있는 건가.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이제 오십 년이 흘렀고 비록 지금의 후손은 그때의 인과를 전혀 모른다지만 수십 년간 가슴에 맺힌 응어리는 오늘에서야 제대로 분출됐다.
가문의 오래된 비밀을 알게 되자 주격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렇다고 부친을 미워할 수는 없었다.
연신 차를 들이켜던 남궁후가 잔잔한 음성으로 물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모르겠습니다.”
“힘드시겠지요.”
“지금 당장은…… 변화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흑검문은 그냥 이름 없는 문파이니까요. 어차피 움직일 능력도 없고요.”
주격은 현실을 그대로 인정했다. 흑풍검신의 모든 무공은 이미 실전됐다. 그렇기에 사실상 흑검문은 규제가 풀리거나 풀리지 않거나 특별한 변화가 없다.
“굳이 책임을 감수할 필요도 없겠지요. 단지 극마서생네 가문을 생각하면 안타까움만 남습니다만.”
“아이들을 모두 내보낸 이유가?”
“저도 아직 천이에게도 알리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은 전혀 모르지요. 지금 무림에서 이 사건을 제대로 기억하는 유일한 사람은 불존뿐입니다.”
“저도 비밀로 해야 합니까?”
질문하던 주격은 바보 같았다고 생각했다. 비밀이었다면 남궁후는 굳이 그에게 진실을 알리지 않았을 것이다.
“아닙니다. 오십 년이 지나 규제가 풀렸으니까요. 만일 아드님에게 알린다면 저도 천이에게 말해줄 생각입니다. 아직 그 아이들이 진실을 알아서 좋을지 나쁠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주격은 주석하를 떠올렸다.
가문의 업보를 굳이 아들에게 넘기고 싶지 않으나 몰라도 될 일은 아니었다. 그는 조용히 남궁후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두 사람은 오십 년 전 무림을 종횡했던 구주사은의 후손이자 같은 운명의 배를 탄 사람이었다.
**
“이건 나쁜 놈이 있어서 하늘이 벼락을 내리는 바람에 불이 붙은 게 확실해.”
남궁서란은 연신 투덜거리며 주석하를 흘겨봤다.
주석하와 남궁천이 불을 끄느라 사람들을 부리며 바쁘게 움직이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눈에는 주석하의 행동이 가식처럼 보였기에 콧방귀를 꼈다.
그런 남궁서란을 조용히 노려보는 눈빛도 있었다. 바로 주소은이다.
주소은은 남궁천과 남궁서란 사이에서 심각하게 고민했다. 성격이 사나운 남궁서란을 오빠와 가까이 두고 싶지 않았다. 반면 그녀는 어떻게든 남궁천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이 두 가지가 서로 모순을 일으켰다.
‘어쩔 수 없어. 깔끔하게 남궁천을 포기하고 유 소협을 기다리자.’
그녀가 내린 결론은 이런 식이었다. 남궁천 때문에 남궁서란에게 잘해줄 수 없다는 게 그녀의 지론이었다. 오빠인 주석하를 보호할 사람은 자신뿐이니까.
그래서 주소은은 남궁서란을 열심히 감시했다. 남궁서란이 주석하 옆으로 가면 어떻게든 떼놓았다.
주소은과 자꾸 부딪히자 남궁서란은 점점 신경질이 났다.
자신을 죽도록 경계하면서 남궁천에게 살살 웃음 짓는 주소은이 꼴 보기 싫었다. 무공 고수인 그녀에게 주소은은 사실 민간인이나 마찬가지였다. 한 방만 쳐도 푹 쓰러지기에 때리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참아야 했다.
어쨌든 남궁서란은 주석하와 남궁천이 뛰어다니며 불을 끄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주소은을 경계했다.
문득 주소은의 얼굴에 조금씩 검댕이 내려앉아 시커멓게 변하는 것을 보았다.
천상삼화인 그녀는 미모에 목숨을 건 여자다. 당연히 자신의 얼굴도 시커멓게 변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자 기겁했다.
‘내가 불 꺼주려고 이곳에 온 것도 아니잖아? 난 손님이야!’
남궁서란은 지금 이 상황이 짜증났다. 얼른 자리를 뜨고 얼굴을 씻어 검댕을 지우고 싶었다. 어차피 여기에 가만히 서 있느니 길을 비켜주는 게 오히려 좋지 않은가.
남궁서란은 주소은을 매섭게 흘겨보고는 자리를 떴다.
전각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다 보니 우물이 하나 보였다.
“여기서 세수하고 가야겠어.”
우물에서 물을 길으려니 두레박이 보이지 않았다.
“대체 우물을 어떻게 관리하기에…….”
간신히 깨진 조롱박을 찾아 줄에 묶어서 남궁서란은 우물물을 펐다. 그녀는 얼굴을 샅샅이 깨끗하게 씻었다. 마음마저 상쾌해지는 기분이었다.
**
다음 날 주석하는 불탄 연무장에 누워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아버지 주격에게서 남궁세가가 이곳에 온 이유를 모두 들었다. 그도 짐작하지 못했던 가문의 비사였다. 흑검문의 뿌리가 어떻게 되는지 이제야 알게 됐다.
그는 흑검문의 소문주이고 사실상 강호 활동을 하지 않는 아버지를 고려하면 대외적으로는 그가 흑검문의 얼굴이었다. 또 언젠가는 그가 흑검문 문주가 될 것이다.
“지금 와서 무슨…….”
무려 오십 년간 무림을 떠나 있었다. 지금 와서 신물을 마교에 흘린 책임을 그 후손들이 짊어진다는 것도 타당하지 않았다.
그는 백화루주라는 삶의 목표를 바꾸고 싶지 않았다. 무림을 위해, 협의를 위해 진심을 쏟는다고 무엇이 달라질 건가. 극마서생 우청엽이라 했던가? 그렇게 무림을 위해 살았던 그 사람은 결국 가문이 완전히 망하지 않았던가. 본인의 허망한 죽음은 말할 것도 없고.
배교의 신물을 세상에 드러낸 게 구주사은의 업보인가? 개인의 욕심을 위해 사용하는 마교의 잘못 아닌가.
아니, 마교가 잘못 사용하고 있다고 누가 장담할까. 우청엽이 번번이 작전에 실패한 일이 마교의 무한회귀공 때문이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단 말인가.
어쨌든 주석하가 들은 가문의 비사는 하나같이 짜증 나는 내용이었다.
솔직히 그가 이처럼 마음의 벽을 세우는 이유가 있긴 했다. 이상하게도 배교의 신물과 그는 인연이 많았다. 그때 사라졌던 만리안석을 지금 그가 갖고 있고 그가 회귀한 이유도 무한회귀공 때문이니. 아직 인연이 닿지 않은 것이라면 여의신단뿐이다.
언젠가 여의신단 또한 그의 손에 떨어질 것 같다는 불길한 기분은 단순한 우려일까.
“하아!”
길게 한숨을 내쉬고 그는 마음을 잡았다. 무림의 안녕? 그런 것은 모르겠고 어쨌든 삶의 목표는 백화루주라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의 시선을 어떤 얼굴이 가렸다. 남궁천이었다.
“소제도 들었구나.”
“남궁 형님도?”
“양쪽 가문이 예전부터 인연이 있었다니 대단히 놀라워.”
남궁천이 그의 옆에 드러누우려 했다.
“여기 검댕이 많아요. 옷 버릴 텐데요?”
주석하야 검은 옷이라 상관없다지만 남궁천은 그렇지 않았다.
“상관없어. 빨면 되니까.”
남궁천이 옆에 누워 나란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무슨 생각이 나던가?”
주석하는 고개를 저었다. 많은 생각이 났고 한편으로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우리야 정파가 아니라서 나몰라라 할 수 있지만 형님은 아니지 않나요?”
“난 어릴 때부터 협의란 말을 입에 달고 살았어. 전형적인 정파의 교육 논리이지만 지금까지 이게 내 행동을 결정하는 근본을 형성했지. 밤이 새도록 고민해봤는데 외면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어. 배교의 신물로 무림에 해가 발생했다면 남궁가는 책임질 생각이야.”남궁천의 대답은 예상한 대로였다. 주석하는 그의 결심이 거짓이 아니라 여겼다.
다만 주석하는 그처럼 선뜻 무림을 위해 목숨을 던질 생각이 없었다.
‘무시무시한 우설금을 한 번이라도 봤으면 그런 말을 못 할 텐데…….’
적어도 정파십존보다 흑도팔군보다 더 강한 우설금 같은 존재가 마교에는 여럿이 있다. 무공이 최강 수준에 올라선 지금도 우설금을 떠올리면 아직도 오금이 저린다. 그런데 마교를 상대하라고?
물론 마교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전생의 죽음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쨌든 마교와 엮이고 싶지 않다.
“전 어떻게 하면 될까요?”
“소제는…… 마음 가는 대로 해. 남들은 내 결정을 두고 협의지사답다고 할지 모르지만 실상은 내 마음이 편한 곳으로 결정한 거니까. 소제도 그렇게 하면 돼. 예전처럼 덕양에 안주해도 되고 아니면 강호로 뛰쳐나와도 되고. 아무도 비난하지 않을 거야. 솔직히 그때의 일을 아는 사람도 몇 없으니까.”남궁천의 대답이 그를 편하게 해줬다. 그렇다. 선택은 그의 몫이다. 이번 생을 살면서 남에게 휘둘리지 말자고 그렇게 다짐하지 않았던가. 마교에 대항하든 하지 않든 스스로 결정할 일이다.
“불존을 만난 적 있나요?”
“난 몇 번 봤어. 무림맹에서, 또 소림사에서. 소제도 봤어?”
“그때 만진장을 떠나고 패존과 붙었을 때…….”
주석하는 간략하게 당시를 이야기했다.
“그때 불존은 내가 흑풍검신의 후손임을 알고 있었을까요?”
“글쎄.”
주선풍이 흑검문을 세운 것은 은거 후 덕양으로 돌아와서다. 주선풍이 강호를 주유할 때는 흑검문이란 문파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몰랐을 가능성이 크지만 그 속을 헤아리기 어려운 사람이 바로 고승 아닌가. 불존은 그 고승 중에서 수행이 유별난 득도한 고승이니.
불존은 그가 회귀자임을 알아본 것 같았다. 그렇다면 흑풍검신의 손자란 것까지 알았을지도 모른다.
‘중심을 잡으라고 했었지…….’
새삼 그 당부가 뚜렷하게 기억났다. 그리고 배교의 신물을 없애라는 당부까지. 그것이 전대의 업보를 짊어지라는 뜻이었나?
주석하는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렸다.
굳이 열심히 중원의 일에 뛰어들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 책임을 회피할 생각도 없다. 그때그때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일 것이다. 그게 그가 지향하는 방향이었으니.
“난 백화루 주인이 될 겁니다.”
남궁천도 백화루가 어디인지 안다.
“참 소박한 꿈이구나.”
“그만큼 심신이 편한 삶이기도 하죠.”
“소제다워.”
남궁천은 대의를 제쳐두고 개인의 소박한 삶을 이야기하는 주석하가 진심 부러웠다.
풀밭에 누워 하염없이 하늘을 올려다보던 두 사람은 각자만의 상념에 빠졌다.
문득 주석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아!”
그제야 생각난 듯 남궁천이 이마를 탁 쳤다.
“급한 일이 있었는데…… 흑검문이나 덕양에 의원이 있어?”
“의원요? 누가 아파요?”
“실은…… 동생이 얼굴색이 이상하게 변해서…….”
하룻밤 자고 난 후 남궁서란의 얼굴이 말이 아니게 변했다. 마치 독에 중독된 것처럼 거무죽죽해졌다.
“불 끄느라 검댕이 묻어서 그런 것 아닙니까?”
“어제 검댕을 떼어낸다고 우물에서 열심히 씻었다던데……”
우물이란 말에 주석하는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당문오객이 독을 푼 우물물로 씻었나? 그거 중화되려면 한참 더 기다려야 하는데…….
한편으로는 고소하면서도 여인의 생명이라는 얼굴이 엉망이 되었다니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쩔 수 없나.
“제가 해결해 드리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