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중독 (2)
“으악! 안 돼요!”
주석하가 들어가는 순간 남궁서란이 비명을 질렀다.
막 실내로 들어서던 주석하는 뻘쭘해져서 들어가지도 나가지도 못했다. 발이 쳐진 실내 안쪽에서 남궁서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모습을 어떻게 보여요? 그것도 남자 앞에서!”
“나에게는 잘 보여줬잖아?”
“오빠잖아요!”
남궁천이 달랬으나 남궁서란은 막무가내였다.
주석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남궁서란이 유달리 외모에 집착하는 것은 안다. 그녀는 자신보다 못생긴 여자를 깔보았고 자신을 흠모하는 남자들 앞에서 여왕처럼 군림했다. 모두 그녀의 미모 덕분이다.
그렇다 보니 지금의 추한 모습을 남에게 보이기 싫겠지. 하지만 치료가 늦어질수록 회복이 더 힘들어지지 않을까.
“남궁 소저, 지금 치료하지 않으면 영영 회복할 수 없습니다.”
주석하의 위협에 급기야 남궁서란이 울음을 터트렸다.
여자에게 미모가 어떤 의미인지 남자인 주석하가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녀가 불쌍했다. 비록 자주 다투긴 했지만 이럴 때 저주를 퍼부을 만큼 그는 사악하지 않다.
“아직 회복 가능성이 있어요. 지금이라도…….”
회복이라는 말에 남궁서란이 울음을 뚝 그쳤다.
“저, 정말요?”
울음이 섞인 반문이다. 사실 당문이 우물에 푼 독이라면 주석하는 눈 감고도 치료할 수 있다. 그가 독군의 내력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에게 독군의 기운이 있음을 밝혀야 하는 게 문제다. 이런 식으로 그의 무공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다.
“일단 증상을 확인해야 합니다.”
“서란아, 얼른 주 공자 말대로 해보자.”
남궁천이 열심히 남궁서란을 설득했다.
한참 침묵에 잠겨 있더니 마지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알았어요.”
주석하는 조용히 안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침상에 반쯤 누워서 남궁서란은 벽을 바라보며 상체를 웅크리고 있었다. 그냥 뒷모습만 보아서는 평소와 차이점이 없었다.
“남궁 소저?”
주석하는 침상 옆에 작은 의자를 가져다 놓고 조심스럽게 불렀다.
남궁서란이 몸을 돌리고 주석하를 바라봤다. 그녀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점박이 바둑이일까? 놀랍게도 얼굴 곳곳에 시커멓게 변색된 피부가 자리하고 있었다. 마치 검은 반점처럼 큼지막한 자국이 얼굴을 덮었다. 실로 괴이한 모습이었다.
간신히 울음을 참고 남궁서란이 창백한 표정으로 얼굴을 보여줬다.
‘그래도 예쁘긴 하네.’
정말 이상한 일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정말 추악했겠지만 남궁서란은 본바탕이 있어서인지 여전히 미모가 바래지 않았다.
“얼굴 말고 다른 곳은 어떻습니까?”
남궁서란이 주저하다가 손을 내보였다. 그녀의 두 손도 피부가 시커멓게 변색 되어 있었다. 그녀가 소매를 걷어 올리자 팔목을 지나 꽤 위쪽까지 증상이 심했다.
“그리고 목 아래에도…….”
남궁서란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대충 어떻게 된 일인지 짐작이 됐다. 검댕을 지운다고 우물물로 얼굴과 손을 비롯하여 곳곳을 닦았나 보다. 제대로 씻는다고 열심히 옷 속까지 구석구석 씻었으니 이럴 수밖에. 그때 물이 묻은 부분은 대부분 반점이 생긴 듯했다.
거의 독이 중화됐던 우물이라 목숨에는 지장 없었다. 증상이 심하지도 않다. 단지 여자라서…….
그녀를 치료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독군의 기운을 이용하는 방법. 다른 하나는 우물을 중화할 때 사용했던 해약을 이용하는 방법. 다만 해약을 사용하면 시간이 조금 걸린다.
주석하는 이 둘을 병행하기로 했다. 물론 주가 되는 방법은 해약이고 독군의 기운은 몰래 사용할 생각이다.
“그 우물에는 당문에서 저희 문파를 해치려고 푼 독이 있습니다. 독을 중화하고 당분간 폐쇄했던 우물인데 아직 완전하지 않아…….”
우물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았으니 흑검문의 책임이 있긴 하다. 다만 흑검문 사람은 모두가 그 우물에 독이 있음을 알기에 굳이 우물 입구를 막지 않았던 건데…….
“흑흑, 나 괜찮아질까요?”
남궁서란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물었다.
“완치될 겁니다.”
주석하의 자신 있는 말에 남궁서란이 울음을 뚝 그쳤다.
그는 품에서 해약을 꺼냈다. 작은 사발에 물을 조금 넣고 해약을 으깨자 하얀 죽이 됐다.
“이걸 몸 곳곳에 발라야 하는데…….”
상대가 여인이다 보니 그가 손으로 건드리기 난망이었다. 목 아래는 아예 불가하고 얼굴을 손으로 만지기도 쉽지 않은 일이다.
“음, 소은이를 불러야겠네요. 잠시만요.”
주석하는 사람을 보내 주소은을 불러오게 했다.
금방 달려온 주소은은 들어오자마자 남궁천에게 곱게 인사하고는 주석하가 남궁서란의 침상 옆에 얼쩡거리는 것을 보고 살짝 안면을 찡그렸다.
“소은아, 네가 할 일이 있다. 이 약을 남궁 소저에게 골고루 발라야 해.”
주소은은 흉측하게 변한 남궁서란의 모습에 화들짝 놀랐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그게…… 우물의 독 때문에…….”
독이란 말에 주소은도 기겁했다. 남궁서란의 몸에 독이 묻어있다면 약을 바르다가 그녀도 독에 중독될 수 있기에 선뜻 나서기 어려웠다.
몇 번이나 고민하던 주소은이 결국 침상에 앉았다. 오빠가 그녀를 해코지할 일은 절대 없으니까. 그 와중에도 그녀는 남궁천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어떻게 바르면 되죠?”
“손에 약을 묻혀서 골고루 분을 바르듯…….”
주소은이 약이 풀린 사발에 손을 담갔다가 꺼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남궁서란의 얼굴에 먼저 바랐다.
“이렇게요?”
“며칠간 반복해서 바르면 나을 거야.”
주석하가 두 사람을 안심시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제대로 바르려면 자리를 비켜줘야 한다. 독군의 진기로 치료하는 일은 저녁 때쯤 잠시 시도하면 될 것이다.
자리를 피하려는 주석하의 의도를 눈치챈 남궁천도 따라서 밖으로 나왔다.
주석하는 남궁천에게 사과했다.
“우물을 잘못 관리해서 죄송해요.”
“아니야, 완쾌될 수 있으니 다행이지. 서란이가 좀 덤벙대서……. 그런데 주 소저가 참 고마워. 주 소저 아니었으면 더 고생할 뻔했어.”
“원래 소은이 마음씨가 곱지요.”
주석하는 빙그레 웃으며 화원을 걸었다.
한결 마음이 놓인 듯 남궁천의 목소리도 쾌활해졌다. 그는 간간이 주소은을 칭찬했다.
‘그동안 소은이가 점수를 많이 땄네…….’
남궁천은 주소은의 상대로 나쁘지 않다. 그 아버지 남궁후도 좋은 시아버지가 될 것이다. 다만 심술궂은 남궁서란이 문제이긴 하지만 주소은의 앞날을 생각하면 꽤 괜찮은 집안이다. 선대에 구주사은이라는 인연도 있었으니 금상첨화다.
그들이 산책 삼아 화원을 빙 돌았을 때였다.
흑검문 제자 한 사람이 부리나케 뛰어와서 그를 찾았다.
“소문주님! 문주님이 찾습니다.”
“나?”
이 시간에는 특별한 일이 없었다. 최근에는 특별한 사건도 없었고.
어쨌든 부르니 가봐야 한다. 남궁천에게 양해를 구하고 먼저 가려 하니 흑검문 제자가 남궁천에게도 말했다.
“남궁 소협도 함께 오시랍니다.”
**
중앙 대청의 분위기는 침울했다.
묘한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주격과 남궁후가 머리를 맞댄 가운데 신옹 장로와 책사 흑검자까지 한자리에 모였다. 흑검자가 끼었다는 것은 가문의 사사로운 일이 아닌 흑검문의 중대사란 의미였다.
“왔느냐? 앉거라.”
주석하는 의자 두 개를 가져와서 옆으로 빙 둘러앉았다.
그와 남궁천이 자리를 잡자 주격이 꼬깃꼬깃한 서신을 내밀었다.
“오늘 연락 왔다. 발신자는 만사지존 제갈휘, 현 무림맹 군사다.”
제갈휘와 그는 최근 들어 여러 차례 부딪히긴 했으나 이렇게 서신을 보낼 사이는 아니다. 그렇다고 주석하는 자신이 무림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생각지 않았다. 비록 최근에 패존을 죽이면서 평가가 올라갔다고 해도 흑검문 소문주란 지위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실내 분위기와 발신자로 보아 직감적으로 좋은 내용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 흑검문과 당문 멸문의 직접적인 연관성이 확인되었으니 주석하 소문주는 제갈세가로 와서 직접 해명하기 바랍니다. 오지 않아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의 책임은 흑검문에 있음을 주지하는 바입니다. 무림맹 군사, 만사지존 제갈휘.
짧은 통지문이었다. 하지만 그 속에 숨은 뜻을 그는 어렵지 않게 알아챘다.
“주 공자, 무림맹 공식 통보이지만 본인은 가지 않기를 권합니다. 절대 좋은 의도가 아닙니다.”
남궁후가 조심스럽게 만류했다.
남궁후는 만진장에서 제갈휘를 만났고 제갈휘가 주석하에게 어떤 감정을 가졌는지 익히 경험했다. 이런 서신을 보낸 의도는 분명히 주석하를 제갈세가로 끌어들이기 위함이다.
제갈세가가 어떤 곳인가. 만진장처럼 내부에 온갖 기관과 진식이 설치된 호랑이굴이다. 지키는 인원 또한 만진장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다. 제갈세가는 당문처럼 하나의 문파니까.
이 초청은 길보다 흉이 많다. 겉으로는 정중하게 해명을 요구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어쩌면 제갈세가에서 다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제갈휘가 어떤 인물인가. 만반의 대책을 세우고 주석하를 끌어들였으니 절대 녹녹하게 풀어주지 않을 것이다.
“나도 네가 제갈세가로 가지 않았으면 한다. 정 궁금하면 그가 이곳에 와서 물어보는 게 정상 아니냐?”
주격이 동조했다.
“소문주님, 예전에는 소문주님 뜻대로 했습니다만 이번만은 절대 안 됩니다. 정말 위험합니다.”
흑검자도 같은 의견을 내뱉었다.
그들의 견해는 모두 제갈휘의 꿍꿍이를 우려하고 있었다.
주석하는 서신을 반복해서 찬찬히 읽었다. 설사 그가 제갈세가에서 죽어도 제갈휘는 적당한 말로 둘러댈 것이다. 함정이 뻔히 보이는 곳에는 가지 않는 것이 답이다. 하지만…….
“제갈세가는 섬서성 한중에 있지요. 이곳 사천에서 북으로 가면 금방입니다. 멀지 않은 곳이라 그리 부담되지 않습니다.”
주석하는 가겠다는 의지를 넌지시 엿보였다.
함정이라고 피할 필요는 없다. 이번에 피하더라도 제갈휘는 계속 그를 해치려고 음모를 꾸밀 것이다. 불안에 떠느니 오히려 지금 상대해주는 것이 유리하다.
무엇보다 아직 제갈휘가 그의 능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만진장에서 본 그의 모습이 전부이니. 그 이후로도 그는 크게 성장했다. 암군의 무공, 염군의 무공을 얻고 내공도 늘었다. 사실 만진장에서도 제대로 능력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제갈휘는 기껏 패존을 죽였다는 정도, 즉 정파십존이나 흑도팔군 일인 수준으로 그를 평가할 것이다.
“음, 이런 말을 하기는 쑥스럽지만…… 제갈 군사가 정파라 하여 무조건 정의롭다고 믿어서는 안 되네. 그는 간계가 뛰어난 자이거든.”
남궁후의 염려는 이례적이었다. 같은 정파이면서 정파의 허물을 털어놓는 경우는 극히 드무니까.
“알고 있습니다. 이미 많이 경험해봤거든요.”
주석하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의 결심을 눈치챈 주격이 한숨을 푹 쉬었다. 언제 아들이 이렇게 성장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제가 함께 가겠습니다. 제가 옆에 붙으면 제갈 군사도 함부로 하지 못할 겁니다.”
남궁천이 동행 의사를 피력했다.
주석하는 그를 염려해주는 남궁세가 사람들이 고마웠다. 선대의 인연 때문인가. 아니면 둘 사이의 친분 때문일까. 그 이유가 중요하진 않겠지만.
“당문의 일을 묻겠다는 것은 핑계이겠지요. 우리는 제갈 군사의 본심을 파악해야 합니다.”
흑검자가 날카로운 눈빛을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