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중독 (3)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으나 모두가 그 답을 알았다.
제갈휘는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대외적으로 대의를 표방했으며 그게 단순한 위선이 아니라 실제로도 그러했다.
차라리 개인의 영달을 목표로 행동하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걱정이 덜할 것이다. 그릇된 신념에 몰입한 독선자가 더 위험한 법이다.
“제갈 군사는…… 무림의 안녕을 위하는 사람입니다.”
남궁천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정말입니까?”
흑검자가 다시 물었다.
“엄밀하게는 정파의 안녕이지요.”
남궁후의 대답이 떨어지자 흑검자도 수긍했다.
그렇기에 사파인 흑검문 사람인 주석하는 위험하다. 제갈휘가 보호할 이유가 전혀 없다. 게다가 주석하는 뇌군의 지지를 받고 있다. 앞으로 어디까지 성장할지 알 수 없는 위험인물이다. 그런 그를 제갈휘가 내버려 둘리 없다.
“그가…… 구주사은의 일을 알고 있습니까?”
제갈휘의 연배로 보면 구주사은을 제대로 경험할 수 없었다. 구주사은의 일인인 불존이 현재 정파십존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으니까. 그 불존마저 젊었던 시절에 발생한 사건이었다.
“아마 알고는 있을 겁니다. 다만 흑검문이 구주사은의 후예라는 것을 모를 가능성이 더 크지요. 하지만 구주사은의 후예임을 알더라도 제갈 군사의 태도는 변하지 않을 겁니다.”남궁후의 추측에 주석하도 동의했다. 제갈휘는 과거의 정리에 얽매일 사람이 아니다.
“현재 소문주께서 흑검서생으로 불린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계시지요?”
“흑검서생?”
흑검자가 어떻게 알았는지 갑자기 주석하의 별호를 꺼냈다. 당연히 주격과 신옹은 몰랐고 남궁천은 알았다.
“아직 대부분 흑검서생과 저를 연결하진 못합니다.”
주석하의 대답에 흑검자가 고개를 저었다.
“제갈휘는 아니겠지요. 어쩌면 제갈휘는 소문주님을 훨씬 더 자세히 파악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흑검자의 경고에 주석하는 문득 최근 당문 사건을 떠올렸다.
비록 그가 당문의 소가주 둘과 시비가 붙으면서 발생한 사건이라지만 어딘지 모르게 석연찮은 점도 많았다. 그 중심에는 빙군과 염군이 있다.
하필이면 상극인 두 사람이 이곳에 왔을까. 그들이 내공을 노린 음모도 이상하고. 여러모로 수상쩍었다. 이미 죽어버렸으니 진실을 캘 방법은 없으나 그 이면에 뇌군이나 제갈휘의 계략이 작동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제갈세가 방문은 위험합니다.”
흑검자의 단언에 주석하는 조용히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제갈휘는 아마도 저를 제거하고 싶을 겁니다. 제갈세가로 오라는 것은 준비를 마쳤다는 의미겠지요. 저는 그렇게 단순하게 당하지 않습니다. 그가 저를 평가하는 것보다 저는 훨씬 대비가 잘 되어 있어요. 언젠가는 넘어야 할 산입니다. 그리고…… 그를 응징하려면 지금이 오히려 편합니다.”주석하는 내심 많은 것을 고려했다.
전생에서는 지금부터 중원 무림이 정사로 갈라져서 피 터지게 싸웠다. 화산파를 중심으로 한 구대문파와 혼천교를 중심으로 한 흑련이 대립했다. 그 과정에서 정파십존과 흑도팔군이 강하게 부딪혔고 중원의 힘은 약화했다.
그 마지막은 마교의 중원 입성이고 정파십존과 흑도팔군은 마교의 손에 죽음을 맞았다.
이번 생에서는 그 과정이, 정사의 대립이 주석하 자신의 손에서 시작하고 있었다. 그의 등장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모르지만 예전에 중요하게 작동했던 화산파와 혼천교의 대립은 흐지부지 영향이 줄었다.
어쨌든 이런 식의 흐름은 좋지 않다. 정파와 사파의 직접적인 대립은 막아야 한다. 어떤 위기에서도 뚫고 나갈 자신이 있기에 그는 제갈세가에 뛰어들 생각이다. 제갈휘가 그를 잡느라 정신없다면 정사대전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무림의 흐름에 몸을 맡길 생각은 없어.’
주석하는 이번 생에서 스스로 주도권을 쥐고 싶었다. 현재 돌아가는 상황은 제갈휘의 독주다. 그 이면에 뇌군의 계획이 일부 깔려있겠지만.
제갈휘가 뜻대로 하도록 놓아두고 싶지 않았다. 만일 그가 흑검문에 칩거해 있다면 제갈휘는 끊임없이 흑검문을 위협하며 휘두를 것이다.
그보다는 제갈휘에게 자신의 힘을 제대로 보여주는 게 더 낫다. 정파십존이든 흑도팔군이든 아무도 그를 건드릴 수 없음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이 최선이다.
적어도 그가 볼 때 제갈휘는 중원, 아니 정파 무림의 수호자가 아니라 마교의 침입을 유도하는 배신자다. 비록 의도하지 않았을지라도 제갈휘의 계략이 진행될수록 정파와 사파가 동시에 약해지고 마교의 침입을 부르니까. 그런 인물은 차라리 없는 게 더 낫다.
이는 주석하의 새로운 발상이었다.
“그래서 저는 제갈세가로 가겠습니다. 제가 위험인물이 아님을 보여줄 겁니다.”
“끙!” 그의 선언이 떨어지자마자 주격이 가장 먼저 신음을 토했다. 이어서 남궁후 역시 감탄사인지 신음인지 알 수 없는 기침을 토했다. 어쩌면 그는 주석하를 통해 젊음의 무모한 용기를 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용기가 세상을 바꾸는 것도 사실이다.
“제가 친우를 불러 함께하겠습니다. 설사 제갈 군사가 다른 꿍꿍이가 있다 해도 손쉽게 목적을 이루지 못할 겁니다.”
남궁천도 거들었다.
“알았다. 내가 언제 네 녀석이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은 적이 있더냐.”
주격이 표정을 풀며 승낙했다.
그렇게 주석하는 남궁세가 사람들과 함께 제갈세가를 방문하기로 했다. 굳이 남궁세가와 함께 하는 이유는 주격을 안심시키기 위해서였다.
**
주석하는 남궁서란의 침소에 들렀다.
약을 바른 덕분에 남궁서란의 피부색이 한결 좋아졌다. 다만 아직도 약간의 검은 반점이 남아 있었다. 이는 몸 내부로 침투한 독 때문이어서 금방 없어지지 않는다. 주석하가 진기로 해결해주지 않는다면.
“많이 좋아졌네요.”
주석하는 남궁서란의 얼굴과 손을 찬찬히 훑으며 말했다.
남궁서란은 비록 본인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으나 손을 보고 자신의 상태를 짐작했다. 여전히 그녀는 우울한 표정이었다.
피부의 검은 부분이 연해졌다고 하나 여전히 과거처럼 깨끗하지 않았다. 눈처럼 하얀 피부 때문에 천상삼화에 속했던 그녀에게 피부의 검은 얼룩은 실로 비극이었다.
“아아, 완전히 낫기는 어렵겠죠?”
“인내심을 가지시죠.”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을 남궁서란도 안다. 아마도 몇 년은 걸릴 것이다. 지금이 가장 아름다울 시절이기에 그녀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몇 년 동안 집에 틀어박혀 있을 수도 없고.
독에 중독된 후 남궁서란이 많이 얌전해졌다. 그녀의 얼굴과 손, 팔, 목덜미까지 찬찬히 훑어본 주석하는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남궁 소저, 나에게 방법이 하나 더 있는데…… 해보시겠습니까?”
그 방법을 듣지도 않고 남궁서란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큼 현재 상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렇게 얼룩덜룩한 피부로 평생 살라고 한다면 그녀는 자살할지도 모른다.
“조금 아플 수도 있는데…….”
물론 특별하게 아플 것도 없다. 진기의 움직임에 순응한다면.
“상관없어요.”
남궁서란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의지를 드러냈다. 다시 예쁜 얼굴로 돌아갈 수 있다면 무엇이든 감수하겠다는 결심이 보였다.
주석하는 주소은에게 자리를 피해달라고 눈치를 줬다.
주소은의 눈썹이 쓱 올라갔다. 오라버니와 남궁서란이 단둘만 붙어 있는 상황은 달갑지 않다. 둘 사이에 별다른 감정이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주석하가 작게 고개를 끄덕인 후에야 그녀는 마지못해 방을 나갔다.
“자, 나를 믿으시고…… 기운을 받아들여 운기해야 합니다.”
별일 아니란 생각에 남궁서란은 쉽사리 동의했다. 물론 주석하와 남궁서란은 서로 앞에서 마음 놓고 운기조식을 할 만큼 믿지 못한다. 하지만 남궁서란은 부친 남궁후가 있는 이곳에서 자신이 위해를 당하리란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그녀는 침상 위에서 가부좌를 틀었다.
남궁서란의 허락을 받아놓고 주석하는 고민에 잠겼다. 독군의 내력은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다룰 수 없는 기운이다. 이를 단전에서 꺼내려면 어떤 독극물이 체내로 침투해야 한다.
물론 독극물을 가지고 오긴 했지만…….
주석하는 품속에서 분말을 꺼냈다.
“그건 뭔가요?”
“일전에 당문에서 조금 얻어온 겁니다.”
남궁서란의 눈썹이 쓱 올라갔다. 뭔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다. 저 독으로 무엇을 할지 심히 걱정하는 눈치이긴 한데…….
“서, 설마 그걸로 나를…….”
남궁서란의 음성이 떨려 나왔다.
“당신이 아니고 납니다.”
그녀의 옆에 앉은 주석하는 왼손으로 독을 만졌다.
“허억!”
남궁서란이 비명을 질렀다. 딱히 주석하의 안전이 걱정되었다기보다는 독을 만진 손으로 자신을 건드리지 않을까 염려해서였다.
정작 주석하는 왼손으로 독을 잡은 채 오른손을 남궁서란의 명문혈에 붙였다.
“자, 운기를 시작하세요.”
“으으.”
남궁서란은 주석하의 눈치를 보다 눈을 질끈 감고 운기를 시작했다. 얼마 되지 않아 명문혈을 통해 주석하의 진기가 조금씩 흘러들어왔다.
진기의 성질은 평소 그녀가 운용하던 진기와는 달리 특이했다. 끈적끈적하고 음습한 기분이랄까. 남궁서란은 주석하의 성격과 닮았다고 흉을 보면서 진기를 일주천하기 시작했다.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대략 이 각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에 주석하는 독극물에서 손을 뗐다. 순식간에 독군의 진기가 잠잠해졌다.
주석하는 악군의 진기를 끌어올려 남궁서란의 운기조식 마무리를 도왔다. 지극히 맑고 청명한 기운이 남궁서란의 명문혈로 들어갔다.
남궁서란은 이전과 다른 성질의 기운에 깜짝 놀랐다. 이번 기운은 그녀를 청아하고 기분 좋게 만들었다. 어떻게 같은 사람의 진기가 이렇게 다른 느낌일 수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자, 어떻습니까? 이상 없나요?”
“괘, 괜찮아요.”
쑥스러워진 남궁서란은 자세를 바로 하고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어?”
얼룩덜룩하던 그녀의 손은 예전의 섬섬옥수로 돌아가 있었다. 그녀의 피부가 백옥처럼 빛을 발했다.
“아!”
멍하게 감탄사를 터트리던 남궁서란은 자신의 얼굴이 궁금했다. 사실 다른 부분보다 얼굴이 가장 문제가 아니었던가.
“동경이…….”
며칠 전 얼굴이 망가진 충격 때문에 동경을 모두 치워버린 기억이 났다. 지금 이 방안에는 동경이 전혀 없었다.
허둥지둥 거울을 찾는 남궁서란에게 주석하가 웃으며 말했다.
“얼굴은…… 흐음…….”
그의 표정이 약간 심각해지자 남궁서란이 울상을 지었다.
“아직 밉상인가요? 그대로예요?”
“그렇게 찡그리지 않고 환하게 웃으면 천하절색이 따로 없을 겁니다. 완벽하게 예전처럼 돌아갔네요.”
주석하는 남궁서란의 외모를 칭찬했다. 그녀의 성격이 어떠하든 그녀가 아름다운 것은 사실이니까.
“정말요?”
“거짓말 아닙니다.”
주석하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이 끝났으니 굳이 그녀와 같은 공간에 있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문을 열고 나가는 그의 뒤에서 남궁서란의 나지막한 울음이 들려왔다. 물론 무엇 때문에 우는지 주석하는 알지 못했다.
**
천마는 고민에 잠겨 있었다.
뭔가 예전과 다르게 흘러간다. 과거에는 지금쯤 만사지존과 뇌군이 서로를 잡아먹으려고 전력을 다했다. 무림맹과 흑련을 동원했고 정파십존과 흑도팔군을 한 자리에 모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완전히 달라졌다. 신창패존이 죽었고 빙군과 염군 역시 사라졌다. 과거에는 없었던 현상이다.
그때와 이번의 가장 큰 차이점을 굳이 들자면 주석하의 회귀다. 한 사람이 일으킨 파문치고는 지나치게 크다.
“지금이라도 다시 되돌려야 하나?”
천마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물론 과거보다 현재가 훨씬 흥미롭다. 그때는 너무 일방적이었다. 정파십존이고 흑도팔군이고 모두 한방에 쓸려나갔으니.
어쨌든 무슨 상관인가. 무한회귀공을 익힌 그는 천하무적이다. 이 세상에서 겁낼 인간은 아무도 없다.
천마가 고민에 빠져 있을 때 대전으로 붉은 옷을 입은 인영이 들어왔다. 우설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