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117화 (117/273)

117화 중원사룡 (1)

“천마시여! 부르셨습니까?”

화사한 붉은 옷을 입은 우설금이 허리를 숙였다.

천마는 흐뭇한 눈으로 우설금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수족이라 할 마교수호사령. 그 핵심을 맡은 부하다.

“할 일이 생겼다.”

“무엇이든 명령만 하십시오.”

우설금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천마의 기억에 우설금은 항상 이런 태도를 유지해왔다. 그가 시키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어릴 때부터 키웠고 현재 그녀를 최측근으로 두었다. 이런 관계는 앞으로도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이다.

“제갈세가로…… 군웅이 모이고 있다.”

“무슨 일 때문입니까?”

“정파 단합 대회라고 할까…… 아니면 사파 기죽이기라 할까…… 의도는 분명하다. 사파를 누르고 정파가 우위에 서겠다는 움직임이다.”

“제가 할 일은 정사의 균형을 맞추는 것입니까?”

“그렇다. 그들이 서로 상잔해서 세력이 약해지도록 만들어야 한다. 어느 한쪽으로 쏠리면 좋지 않으니까.”

“예전과 같네요.”

우설금은 충분히 이해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천마가 우설금에게 내린 명령은 대부분 이런 식이었다. 목표를 주고 나머지는 스스로 결정하게 했다. 그때마다 우설금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현재 정파십존은 아홉 명이, 흑도팔군은 여섯 명이 남아 있다. 무게추가 많이 기울었어.”

“균형을 맞춰보겠습니다.”

“그래, 이 명령은 너의 개인적인 복수에도 도움이 되니 차질 없으리라 믿는다.”

“하해 같은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우설금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다가 평정을 되찾았다. 그녀는 허리를 숙인 후 대전에서 물러났다.

우설금의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한 천마가 사이한 미소를 지었다. 뭔가 아주 재밌다는 표정이다.

천마가 허공에 손을 휘젓자 대전에 금빛 그림자가 어렸다.

“금천마령, 지원군이 필요할 듯하지?”

금천마령(金天魔靈)! 천마를 수호하는 마교수호사령의 첫째이자 명실상부한 마교의 이인자, 천마의 최측근으로 천마의 복심이라 불리는 자였다.

금빛 그림자에서 단조로운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단천마령 홀로 처리하기 쉽지 않습니다.”

“좋아, 칠왕 가운데 하나를 보내어 암묵적으로 돕게 하라.”

“천력마부를 보내겠습니다.”

천력마부(天力魔斧)는 마교의 최강자 집단인 마교칠왕의 일인이다. 정파에 정파십존이 있고 사파에 흑도팔군이 있다면 마교에는 마교칠왕이 존재했다.

“그렇게 하지.”

명령을 마친 천마가 손을 휘휘 저었다. 대전에 어리던 금빛 그림자가 사라졌다.

**

제갈세가가 있는 섬서성으로의 여행은 순조로웠다.

주석하가 가는 길을 남궁세가에서 동행했다. 남궁천과는 사이가 좋았고 남궁서란은 중독에서 풀린 이후 그에게 별다른 시비를 걸지 않았다. 덕분에 예상외로 편안한 길이 됐다.

길을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높은 산을 굽이굽이 도는 강 앞에 도착했다.

길을 막고 있는 강물에 주석하는 입을 딱 벌렸다. 예상보다 더 큰 강폭에 난감했다.

“이 강을 건너면 바로 섬서야. 거의 다 온 셈이지.”

남궁천은 예전에 제갈세가를 방문한 적이 있었고 길눈이 밝았다.

강폭보다 물살이 빨랐기에 강물이 사뭇 위협적으로 보였다. 강바람이 시원해서 이곳까지 오느라 지친 심신을 달래주었다.

주석하는 바람을 쐬며 남궁천에게 물었다.

“여길 어떻게 건너죠?”

“기다리고 있으면 나룻배가 올 거야.”

“제갈세가에는 자주 갔었나 보네요?”

“양 가문이 상당히 가깝게 지냈거든. 최근에는 제갈가주께서 바쁘셔서 왕래가 뜸하지만.”

남궁세가와 제갈세가는 오랜 세월 무림에서 오대세가로 함께 이름을 날렸으니 그 친분이 가벼울 리 없었다. 최근 만사지존 제갈휘가 무림맹 책사 일로 바쁘다 보니 그나마 만남이 줄어들었다. 과거에는 양쪽 집안이 혼사로 복잡하게 엮이기도 했었다.

“제갈세가는…… 대단한 곳이야. 만진장에서도 경험했겠지만 제갈부 전체가 기관진식으로 덮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현 무림에서 제갈부에 침입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을걸?”주석하는 만진장에서 진법에 빠져 고생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런 고생을 다시 하고 싶지 않다. 사람도 아닌 지형지물과 싸우는 것은 어쩐지 손해 보는 기분이라.

“저도 이번에는 그때처럼 무모한 행동을 하지 않을 겁니다.”

주석하는 뇌군이 그에게 주었던 진법서를 떠올렸다. 덕분에 기본적인 진법 이론을 소상하게 알게 됐다. 물론 그 책에 제갈세가의 진법 파훼법이 적혀 있긴 하였으나 진법이 한두 개가 아니고 계속 진화하기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 알 수 없었다.

“친우들이 왔으려나?”

남궁천은 주위를 휙휙 둘러보다가 아무도 발견할 수 없자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누구 만나기로 했어요?”

“제갈세가로 오라고 했거든.”

배를 기다리느라 남궁천은 강가에 걸터앉았다.

주석하도 따라서 옆에 앉았고 남궁서란과 남궁후는 멀리 떨어진, 커다란 버드나무 그늘에서 휴식을 취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배가 오기도 전에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나타났다. 그들은 이십 대 초반의 청년으로 보였다.

강가로 오던 두 청년이 가주인 남궁후에게 깍듯하게 인사하며 한동안 담소를 꽃피웠다.

“저기 왔네.”

그 모습을 본 남궁천이 낄낄 웃었다.

“누군데요?”

“나랑 친한 녀석들. 알아두면 도움이 될 사람들이지. 강호에서는 중원사룡이라 불러. 물론 나도 포함해서.”

중원사룡(中原四龍). 현 강호에서 가장 잘 나가는 후기지수 넷을 이렇게 불렀다. 중원사룡은 나이가 어린 데도 무공이 뛰어났고 외모가 출중했으며 사문도 막강했다.

무림의 여고수인 천상삼화와 함께 중원사룡은 차세대 무림을 이끌 인재로 평판이 높았다.

주석하도 중원사룡의 위명을 자주 들었기에 금방 이해했다.

남궁후에게 인사를 마친 두 사람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왔냐? 늦었네?”

남궁천이 웃으면서 두 사람을 맞이했다.

“배 시간에 맞춰서 오느라. 빨리 와 바야 기다리느라 힘들어. 흠, 여긴 누구신지?”

남궁천과 반갑게 인사하던 두 사람이 주석하를 발견하고 흥미를 보였다.

주석하는 그들의 옷차림과 외모에서 쉽게 정체를 파악했다. 어깨에 커다란 도를 짊어지고 호탕하게 수다를 떠는 사람은 청운괴도(靑雲怪刀) 팽두석으로 하북팽가(河北彭家) 소속이다.

옆에서 입을 다물고 근엄한 표정을 짓는 자는 옷차림에서 도가의 제자라고 드러내고 있었다. 바로 태상자(太上子) 무열로 무당파 유망주였다.

“주석하입니다.”

주석하는 포권을 취하며 공손하게 인사했다.

소개를 들은 두 사람이 흠칫 놀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도 자신을 소개하고는 남궁천에게 눈짓으로 물었다.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소형제가 바로 최근에 이름을 날리는 흑검서생이라네.”

“아아! 무려…… 패존을 살해했다는…….”

정파십존인 신창패존의 죽음은 일대 사건이었고 이들 역시 모를 수 없었다.

태상자 무열이 심각한 표정을 지은 반면 팽두석은 거리낌 없이 호탕하게 물었다.

“푸흐흐, 소문에는 흉악하게 생겼다고 했는데 전혀 아니잖아? 지나가는 아가씨가 눈을 못 떼게 생겼어.”

팽두석이 낄낄대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덕분에 주석하는 심각한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성격을 보니 팽두석은 대범하고 호탕한 면이 있었고 무열은 진중하고 무게가 잡혔다.

“나중에 한 수 가르쳐 줘요. 나도 고수랑 비무하고 싶거든요. 그런데 마땅한 녀석이 없더라고요.”

팽두석이 도의 손잡이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찌 보면 도발이라고 볼 수 있지만 실제로 팽두석은 유달리 비무를 좋아했고 마땅하게 무공을 겨룰 상대가 없었다.

“내가 자주 상대해 줬잖아?”

남궁천이 눈을 흘기자 팽두석이 손을 저었다.

“너랑 하면 내가 맨날 터지잖아? 나도 좀 패보자고!”

“석하가 그리 만만치 않을걸? 너, 신창패존보다 세냐?”

“아니.”

“그럼 반대로 두들겨 맞겠지.”

“크윽!”

남궁천과 팽두석이 농담 반 진담 반 나누는 대화를 지켜보며 주석하는 내심 웃음을 지었다.

그가 사파 인물임에도 팽두석과 무열은 특별히 경계하지 않는 것 같았다.

떠들고 노는 사이 나룻배 한 척이 다가왔다.

“강 건너실 분 타시오. 세 분까지만 가능하오!”

폭이 좁고 긴 나룻배는 사공을 포함해서 네 사람이 한계인 모양이었다.

이쪽은 남궁후까지 포함해서 모두 여섯이었다. 먼저 세 사람이 건너고 남은 세 사람은 후에 건너야 했다.

상황을 인식한 팽두석이 한발 물러섰다.

“난 서란이랑 다음에 떠날게.”

남궁천이 남궁후와 함께 배를 타게 되면 주석하는 낯선 둘과 동행해야 한다. 주석하를 홀로 떼놓을 수 없어 고민하던 남궁천은 팽두석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너! 내 동생에게 눈독 들이는구나?”

“크크, 훗날 내가 서란이 데려갈 건데? 장인어른도 이미 허락하셨다고!”

“장인어른은 무슨! 꿈 깨라! 서란이 건드리면 혼난다!”

남궁천이 지지 않고 반박했다.

무림의 꽃, 천상삼화의 일인인 남궁서란의 주변에는 항상 청년 기협이 많이 모였다. 팽두석도 남궁서란의 주위를 맴도는 사람이었다.

“서란이 마음만 잡으면 되지!”

팽두석이 킥킥 웃으며 남궁서란 쪽으로 달려갔다.

어이없어 주먹을 내밀며 분노를 표시한 남궁천이 주석하와 무열을 불렀다.

“우리 먼저 강을 건너가자고.”

물살이 빠른 강을 노를 젓는 나룻배로 건너기는 쉽지 않다.

주석하는 배에 오르며 대기 중인 뱃사공을 살폈다.

‘무림인이군.’

하긴 일반 사람이 노를 저어 이 강을 계속 오가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주석하는 사공의 무공을 제대로 가늠하기 쉽지 않자 당황했다. 예상외로 고수란 의미였다.

죽립을 써서 얼굴의 절반을 가리고 양손에 묵직한 노를 든 사공은 별다른 말없이 조용히 그들이 배에 오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석하가 가장 먼저 사공 바로 앞에 자리 잡았고 그 뒤로 남궁천과 무열이 탑승했다.

“다 타셨으면 떠나겠소.”

사공이 힘껏 노를 저었다.

시원한 바람을 타고 물살을 가르며 배가 천천히 강 중앙으로 나아갔다.

“원래 이곳을 오가는 배가 한 척뿐입니까?”

이상한 낌새를 느낀 주석하가 사공에게 물었다.

“아닙니다. 보통은 서너 척인데…… 오늘 나온 배는 이 배뿐입니다.”

“혼자라 힘드시겠군요.”

“그만큼 돈을 더 벌 수 있어 좋지요.”

사공의 어투에서 대화를 기피하는 인상을 받은 주석하는 몸을 돌려 앉았다. 그에게서 대략 반 장가량 떨어진 곳에 남궁천이 그를 향해 앉아 있었다. 그 뒤에 앉은 무열이 처음으로 주석하에게 질문을 던졌다.

“주 공자의 사문은 흑검문입니까?”

“네, 그렇습니다만.”

“흑검서생이란 별호가 붙었으니…… 검을 잘 쓰나 보지요?”

무열의 사문인 무당파는 사문의 비전인 태극혜검을 비롯하여 검법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반면 흑검문은 흑검육식에…….

잠시 머릿속에서 저울질하던 주석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비교할 것을 비교해야지.

사실 흑검서생이란 별호도 흑검문 때문이 아니라 흑검소 때문이 아닌가.

“솔직히 아직 제대로 못 다룹니다.”

그나마 내놓을만한 검법은 암군에게서 배운 암천살검뿐이다. 암천살검은 일격필살법에 최적화 되어 있어서 일반적인 검법과 접근 방법이 조금 달랐다.

“겸손하시군요.”

빈정대는 것인지 모르지만 주석하는 무열의 음성에서 명백한 적의를 감지했다.

정과 사의 벽이라고 내심 헛웃음을 터트리는 순간 주석하는 뒤에서 쏟아지는 섬뜩한 검기를 직감했다.

쐐액-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등에 커다란 충격이 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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