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중원사룡 (2)
주석하는 배에 오를 때부터 사공을 의심했다.
물살이 세서 평범한 사람이 배를 몰고 강을 오가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 차에 사공이 무림인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평범한 무림인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주의를 기울이긴 했다.
다만 강 중앙으로 진입하면서 시원한 바람과 장엄한 풍경에 잠시 넋을 빼앗겼고 무열과의 대화 때문에 경계를 흩트리기는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자신감이 있었다. 지금까지 타인이 그를 해치려 해도 내부에 품은 기운 때문에 실패한 것을 수차례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뒤에 앉은 사공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사공은 주석하의 뒤에 자리해 있어 주석하나 남궁천으로부터 손쉽게 자신의 행동을 숨길 수 있었다.
푹!
사공의 솜씨는 예상외로 놀라웠다.
주석하의 등에 단검이 박혔다. 자칫 치명적인 위험이 될 수 있었으나 예기가 엄습하는 순간 몸을 비틀어 급소를 피했다. 하지만 맨 등에 칼이 박히는 경험은 예상보다 쓰라렸다.
“크윽!”
주석하가 고통으로 몸을 숙이자마자 다시 예리한 공세가 엄습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사공이 창을 휘두르며 그를 공격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나룻배 구석에 창을 숨겨 두었던 모양이다.
주석하는 앉은 채 몸을 회전하면서 창을 피했다.
부우웅-
사공이 휘두른 창이 그의 몸을 스치듯 지나갔다. 그가 몸의 균형을 잡을 틈도 없이 창이 재차 그를 노려왔다.
순간 주석하는 사공의 창법을 바로 알아봤다. 예전에도 상대한 창법이었다. 바로 신창패존의 유명한 절기가 눈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당신은?”
“난 패존의 제자다! 원수!”
부우웅-
창이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주석하의 하체를 공격해왔다.
지금처럼 배에 주저앉은 자세로는 창을 피할 재간이 없었다. 주석하는 어쩔 수 없이 앉은 채 허공으로 몸을 띄웠고 그의 몸은 배를 벗어나 강물로 떨어졌다.
첨벙!
사공의 공격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사공 또한 물에 뛰어들었다.
순식간에 두어 차례 공방이 지나가고 나룻배에는 남궁천과 무열만 남았다.
두 사람 모두 예상치 못한 기습에 얼이 빠져 있었다. 특히 바로 앞에서 주석하의 등에 단검이 박힌 것을 확인한 남궁천은 주석하가 빠진 지점을 향해 소리쳤다.
“소제!”
남궁천이 따라서 물에 뛰어들려고 하는 순간 무열이 팔을 잡았다.
“남궁 소협! 정신 차려!”
“석하가…….”
“방금 사공이 누군지 알아?”
“사공?”
그제야 남궁천도 혼란한 정신을 가다듬으며 사공의 창법을 되새겼다.
“신창패존의 제자야. 패존의 복수를 하려고 기다리고 있었어!”
“아아!”
남궁천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단순한 기습이라면 주석하를 도와야 한다. 하지만 사문의 은원이 엮였다면 상황이 복잡하다. 강호에서는 타 문파 간의 은원에 함부로 개입할 수 없다는 불문율이 존재한다.
신창패존이 주석하에게 죽었으니 그 제자라면 당연히 복수할 권리가 있다.
남궁천은 주먹을 불끈 쥐고 주석하가 사라진 물 밑을 내려다봤다. 물살이 거센데다 탁하여 아래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남궁천은 자신의 안일함을 자책했다. 적이 사공으로 변장하여 기다리고 있으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생각해보니 오늘 다른 나룻배가 없었던 점도 이상했다.
남궁천은 무열을 노려봤다.
“설마…… 넌 알고 있었나?”
무열은 어깨를 으쓱하면서 대답하지 않았다.
으드득-
남궁천은 이를 갈았으나 지금은 속수무책이었다.
**
물에 떨어진 주석하는 등으로 엄습하는 차가움과 쓰라림에 치를 떨었다.
현재 단검이 등에 박힌 상황. 그곳으로 물이 스며들어 상처를 키웠다.
다행히 단검이 찌른 부위는 치명상을 면했다. 동시에 몸이 위협받자 단전에서 잠자던 내력이 저절로 깨어났다.
안타깝게도 주석하는 헤엄칠 줄 모른다. 물에서 허우적거리는 게 전부인 수준이다. 등에 상처를 입었고 물속이라 위험이 계속되었기에 잠에서 깬 내력이 맹렬하게 몸을 휘감았다.
쐐애액-
장창에서 뿜어지는 강기가 물을 뚫고 그에게 날아왔다.
‘물속까지 쫓아왔구나!’
주석하는 눈앞에서 흐릿하게 움직이는 적의 윤곽을 볼 수 있었다. 그와 달리 상대는 물이 익숙한 듯 물속에서도 몸놀림이 자유로웠다.
물속에서는 행동이 느려지게 마련이고 공격의 위력도 감소한다. 그런데 사공이 휘두르는 장창의 위력은 물 밖이나 큰 차이가 없었다.
반대로 창을 막아야 하는 주석하는 몸놀림에 제약이 많았다.
간신히 창을 피하면서 주석하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어깨에 걸고 있는 흑검소를 꺼낼 것인가, 아니면 맨손으로 상대할 것인가.
마치 폭주하듯 전신을 휘감는 내력을 운기하면서 주석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상대가 신창패존의 제자라면 그도 봐줄 이유가 없다. 상대의 목숨을 노린다면 자신의 목숨도 걸어야 하는 법이니까.
쐐애액-
다시 창이 그를 찔러왔다.
주석하는 물속에서 몸을 틀며 창끝을 피하고 창대를 손으로 잡았다.
상대가 그를 떨쳐 내려고 창을 위로 들어 올렸다. 그 바람에 얼굴이 물 밖으로 나가면서 주석하는 공기를 들이마셨다.
이제는 공세를 역전할 시점이다.
주석하는 창대를 잡은 손에 힘을 가했다.
단전에 품은 공력이 위기 상황에서 전부 활성화되면서 그의 괴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콰직-
손에 힘을 쓰는 순간 창대가 부러지며 창이 무력화됐다.
물속에서도 상대의 놀란 토끼 눈이 확실하게 보였다.
‘놀라기는 아직 이르지.’
주석하는 부러진 창을 자신에게로 당겼다.
창으로 그를 공격할 수 없게 되자 사공은 창을 버리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물속에서 주석하가 흐느적거리는 모습에서 헤엄에 능숙하지 않다고 판단한 공격이었다.
순식간에 주석하의 전면에 이른 사공이 사혈을 찔러왔다. 계산대로라면 주석하는 물속에서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어야 했다. 물에 떠 있기도 버거워 허우적거려야 정상이다.
주먹이 날아오는 순간 주석하는 손으로 그의 주먹을 붙잡았다. 압도적인 내공이 있기에 가능한 전술이다. 주석하는 전혀 위협을 느끼지 않았다.
신창패존의 제자가 평범할 리 없다. 무림에 드러나지 않았을 뿐 손꼽히는 고수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런데도 사공은 주석하의 손에 잡힌 주먹을 뺄 수 없었다.
‘어?’
놀라움도 잠시 갑자기 손이 으스러지는 듯한 충격이 엄습했다. 사공은 비명을 질렀다. 벌어진 입으로 물이 마구 들이켜졌다.
주석하는 분노한 눈빛으로 상대를 노려봤다.
‘넌 끝이다!’
아무도 물속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제대로 볼 수 없기에 주석하는 더 잔인해질 수 있었다.
그가 사공을 끌어당기자 사공의 몸이 속절없이 끌려왔다.
녀석의 주먹을 잡은 상태에서 다른 손으로 사공의 반대쪽 어깨를 붙잡았다.
내력이 폭주한다. 천하를 뒤엎을 가공할 힘이 두 팔에, 두 손에 집중됐다. 손에 잡히는 것은 무엇이든 갈기갈기 찢었다. 이미 자비로운 인성은 완전히 사라졌다.
으드득-
물이 출렁이는 소음 속에서 어깨가 박살 나는 소리가 둔탁하게 울렸다. 순식간에 주변에 시뻘건 핏물이 일었다.
“으아악!”
사공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
주석하의 손에는 뽑힌 사공의 한쪽 팔이 너덜거리고 있었다. 사공이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마구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주석하는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여기서 끝내려면 시작하지도 않았다.
드드득-
“으아악!”
폭주하는 내력은 상대를 가리지 않았다. 더 잔인할 수 없을 만큼 잔인해졌다.
다시 비명이 울리고 시뻘건 핏물이 퍼졌다. 강물에 씻겨 흩어지는 것보다 더 빨리 물이 뻘겋게 물들었다. 떨어져 나온 살점이 물에 둥둥 떴다.
마지막은 비명도 없었다.
푸아악-
뜯겨 나온 사공의 머리는 물 밑으로 가라앉았다.
사지가 완전히 분리되어 사공은 물고기 밥이 됐다. 엄청난 주석하의 내공은 물속에서 제대로 위력을 발휘했다.
적이 사라지자 주석하도 천천히 흥분 상태에서 돌아왔다. 여전히 등에 박힌 단검이 쓰라렸으나 심리적으로 안정을 되찾았다. 폭주했던 다섯 기운도 서서히 단전으로 돌아갔다.
주석하는 그 가운데 악군의 맑은 기운을 붙잡았다. 악군의 기운으로 운기하면 마음이 편안하다. 그는 조심스럽게 혈맥으로 내력을 흘려보내면서 몸에서 힘을 뺐다.
그의 몸이 물 위에 떴다.
“석하야!”
그를 발견한 남궁천이 재빨리 노를 저어 다가왔다. 주석하는 기진맥진한 것처럼 꼼짝하지 않았다.
다급하게 남궁천이 물에서 그를 건졌다. 여전히 등에 박힌 단검 옆으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남궁천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괘, 괜찮아?”
주석하는 안면을 찡그리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조금만 참아!”
남궁천이 그를 배 바닥에 편하게 눕힌 다음 박힌 단검을 뽑았다.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다시 단전에서 꿈틀거리는 기운을 잠재우느라 주석하는 고생했다.
남궁천이 몇 군데 혈도를 점하고 금창약을 발랐다. 그동안 무열은 복잡한 시선으로 주석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대충 안정되자 남궁천의 음성이 그제야 밝아졌다.
“다행히 헤엄칠 줄 알았나 보네?”
“아뇨, 내가 헤엄치지 못하는 줄 착각한 놈이 실수한 거죠.”
주석하는 몸을 일으키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등이 여전히 쓰렸으나 참을만했다. 남궁천의 염려와 달리 주석하는 등의 상처에 거의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이 상처를 빌미로 상대의 동정을 유발할 수 있어 유리한 측면도 있었다. 신창패존의 죽음으로 과대평가된 그의 무공을 적이 덜 경계하도록 만드는 효과도 있고.
어느새 배는 꽤 먼 거리를 떠내려가고 있었다.
남궁천이 노를 저으며 웃었다.
“다시 거슬러 올라가려니…… 죽겠군.”
당연히 등을 다친 주석하는 노를 저을 일이 없었다.
주석하는 남궁천의 뒤에서 무심한 표정으로 그를 살펴보는 무열을 확인했다. 중원사룡이라 했었지. 어딘지 기분 나쁜 녀석이다.
**
강을 건너 섬서에 들어선 후부터 제갈세가까지는 금방이었다.
제갈세가는 주변이 호수로 둘러싸인 나지막한 분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제갈세가에 설치된 각종 기관진식을 생각하면 접근 가능성을 극도로 제한한 이런 구조가 충분히 이해됐다.
외부의 침입을 견제하고 기관진식의 방어력을 최고로 올리는 전략에 타당한 입지조건이었다.
남궁후 덕분에 그들은 제갈세가에서 환대를 받았다.
주석하 또한 내용이야 어떻든 제갈세가의 손님이었기에 괜찮은 처소를 배정받았다.
제갈세가에 도착한 후, 주석하는 등을 치료한다는 핑계로 두문불출했다. 예전에 만진장을 방문했을 때는 호기심에 곳곳을 돌아다녔지만 이제는 기관진식이 설치된 곳을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아야 한다는 정도는 안다.
사실 궁금한 점도 없었다. 진식이 설치된 곳은 보이는 모습이 전부가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침상에 누워 뒹굴뒹굴하고 있자니 남궁천이 방문을 두드렸다.
“소제, 들어가도 되나?”
“물론입니다.”
대수롭지 않게 응답했을 때 방문이 벌컥 열리며 한 떼의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예상치 못한 광경에 주석하는 후다닥 몸을 일으키고 옷매무시를 바로 잡았다.
모두 여섯 명이었다. 사남이녀. 그 가운데 익숙한 얼굴도 있긴 했다. 남궁천과 강을 건널 때 보았던 태상자 무열에 청운괴도 팽두석, 그리고 남궁서란까지.
처음 보는 일남일녀가 있었다. 남자를 보는 순간 주석하는 누군지 단번에 깨달았다. 제갈휘와 닮았다!
바로 중원사룡의 일인이자 제갈세가의 소가주인 제갈신수(諸葛神秀) 제갈우였다. 제갈세가에서도 남다르게 영민하여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다고 했던가.
그리고 처음 보는 여인은…… 무척 아름다웠다. 천상삼화인 남궁서란에 견줄 미인이었다.
주석하는 이들의 면면에서 확실하게 정체를 깨달았다.
지금 이곳에, 그의 침소에 현 강호에서 가장 잘 나가는 젊은이들이 모인 것이다.
바로 중원사룡과 천상삼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