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119화 (119/273)

119화 중원사룡 (3)

“다른 사람은 모두 알 테고……. 여긴 제갈 소협. 설명 안 해도 잘 알겠지. 여기는…….”

제갈우를 소개한 남궁천의 시선이 그 뒤의 아름다운 낭자를 향했다. 그가 미처 말하기도 전에 여인이 먼저 스스로 소개했다.

“전 천중화 백화령이에요. 천중산장 소속이죠.”

천중산장(天中山莊)은 하남에 있는 유명한 무림세가였다. 비록 오대세가에 미칠 수준은 아니었으나 꽤 유서 깊은 세가로 정파에서는 이름이 높았다.

최근 들어 천중산장을 더 유명하게 만든 것이 바로 장주의 딸인 백화령이었다. 그녀는 아름다운 미모 때문에 꽃 중의 꽃인 천중화(天中花)로 불렸으며 당당하게 천상삼화에 이름을 올렸다.

천상삼화의 다른 여인이 화산파 출신인 설매검화 유비연, 남궁세가 출신인 검봉 남궁서란임을 고려하면 그보다 출신이 한미한 백화령이 천상삼화에 들었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그녀의 미모가 더 월등함을 의미했다.

“전…….”

주석하가 대답하려 할 때 백화령이 바로 말을 끊었다.

“흑검문 주석하 공자시죠? 반가워요.”

소개할 기회를 잃은 주석하가 머쓱함을 삼킬 때 제갈우가 정중하게 인사했다.

“먼 곳에서 오신 손님을 제대로 대접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제 부친께서 바쁘셔서 아직 일정을 잡지 못했습니다. 주 공자께서 몸이 불편하신데 자리를 마련하기도 예가 아닌 듯하고요. 그러니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대신에…… 오늘 저녁에 젊은 사람들끼리 모여 만찬을 열려 합니다. 참석해주시지요.”대충 아직 준비가 미흡해서 회담을 열 수 없다는 말로 들렸다. 그 준비란 아마도 정파십존 같은 최강고수가 도착하지 않았다는 뜻이겠지. 어차피 시간이 많으니 신경 쓸 일은 아니지만…….

주석하는 자신을 열심히 관찰하는 중원사룡과 천상삼화를 보며 내심 헛웃음을 들이켰다.

설매검화를 제외하고는 모두 모였다. 사실상 정파의 후기지수 전부가 모인 셈인데 거기에 사파인 자신이 끼어도 되는 건가.

남궁천은 믿을 수 있으나 나머지는 믿기 어렵다. 하지만 저들의 꿍꿍이가 궁금하긴 하다. 단순한 호기심인지 아니면 사파인이라고 배척하거나 괴롭히려는 것인지.

전생에서 엄청 시달려 봤기에 저들의 행동이 두렵지는 않았다. 오히려 지금은 강해진 무공 때문에 이런 애송이들의 계략은 가소로울 뿐이다.

“오늘 한잔하자고. 어때?”

남궁천이 환한 얼굴로 동의를 재촉했다.

주석하는 조용히 수락했다.

“그래야죠.”

주석하의 동의에 제갈우가 흡족한 표정으로 감사를 표하고는 물러났다. 그를 따라 우르르 들어왔던 사람들이 몰려나갔다.

가장 마지막에 방을 떠나던 천중화 백화령이 한쪽에 세워진 흑검소를 한참 쳐다봤다. 그녀는 주석하를 쓱 돌아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사라졌다.

**

해가 진 직후, 약속 시각보다 일찍 주석하는 처소를 나섰다.

칼에 찔린 등은 거의 아물어 움직이기에 별다른 지장이 없었다. 이곳에 온 후 처음으로 개운한 기분을 만끽하며 주석하는 제갈세가를 구경했다.

곳곳에 띄엄띄엄 세워진 전각, 나무가 빽빽한 화원은 만진장과 유사했다. 다만 만진장 주변이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다면 제갈세가는 호수로 둘러싸여 있었다.

특히 오늘 연회가 벌어지는 상춘원은 제갈세가 본가에서 호수 중심까지 길게 다리를 놓아 만든 섬으로 호수 한가운데 마련되어 있었다. 다리를 차단하면 그 누구도 드나들 수 없는, 고립된 요지였다.

“화원에 손을 많이 들였군.”

정성껏 가꾼 화원에는 수많은 꽃이 만발하고 아름드리 고목이 가지를 늘어트리고 있었다. 장관인 풍경이지만 이 경치 곳곳에 무시무시한 기관진식이 설치되어 있음을 느낀 주석하는 오히려 긴장감에 휩싸였다.

만진장에 들렀을 때처럼 아는 것이 없다면 무서울 것도 없는 법. 하지만 지금은 뇌군의 책자를 읽은 후라 기관진식의 기본적인 이해가 높아진 탓에 그 위험이 바로 보였다. 역시 알면 고생이란 말이 이런 뜻이었나.

그때처럼 화원 내부로 들어가지 않고 돌담길만 지나다니며 이곳저곳을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맞은편에서 아리따운 아가씨가 나타났다. 바로 낮에 봤던 백화령이었다. 꽃에 둘러싸여 더 화사해진 그녀의 미모는 환상이었다.

무심코 그녀를 목격한 주석하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가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이봐요!”

백화령이 그를 부르고는 재빨리 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갑자기 아리따운 여인의 얼굴이 눈앞에 확 등장하자 주석하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킥킥, 뭘 그리 놀라요?”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백화령이 다시 그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주석하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서 있었다.

살짝 눈웃음을 머금고 백화령이 다시 물었다.

“내가…… 그렇게 잘 생겼어요?”

“그, 그게…….”

정작 주석하가 놀란 이유는 그녀의 외모 때문은 아니었다. 그와 그녀의 키 차이가 꽤 있으니 정상적인 자세로는 절대로 두 사람이 눈을 마주할 수 없다. 그녀의 키가 갑자기 커질 리가 없으니 지금 얼굴을 맞댄다는 것은 그녀가 허공에 떠 있다는 의미 아닌가.

‘화판답공!’

지금 그의 눈앞에서 화존의 절정 무공인 화판답공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녀의 신형은 지면에서 아주 조금 떠 있어서 그가 화판답공을 익히지 않았더라면 미처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못생겼다고 하진 않으니 수긍하는 것 같긴 한데…… 영 반응이 떨떠름한데요?”

맑은 목소리가 그의 귀를 즐겁게 했다.

이런 목소리도 들어봤다. 바로 화존의 목소리와 정말 닮았다!

‘화존의 제자인가?’

그러고 보니 목소리뿐 아니라 성격도 닮은 것 같았다. 그는 화존이 떠올라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흠, 왜 웃어요? 표정이…… 나보다 더 예쁜 여자를 봤다는 뜻 같은데요?”

그제야 백화령이 그의 앞에 바로 섰다. 키 차이 때문에 그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매가 고왔다.

“그게 아니라…….”

“킥킥, 말해 봐요. 나처럼 예쁜 여자 봤어요?”

순간 주석하는 우설금을 떠올렸다. 남궁서란은 아닐지라도 우설금이라면 충분히 백화령과 견줄 수 있다.

“본 것 같아요.”

백화령의 안면이 살짝 일그러졌다.

“흠, 좋아요. 이 세상엔 기인이사가 널렸으니까. 대신 다음에 꼭 소개해줘요. 엄청 궁금하니까. 가능하죠?”

가능한가? 우설금이 나타나면 모두 죽음일 텐데. 어쨌든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주석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무슨 일입니까? 마치 내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데…….”

백화령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저것 잠시 줘봐요.”

그녀의 손은 주석하의 허리에 매어져 있는 흑검소를 가리키고 있었다.

주석하는 미간을 찌푸리다 마지못해 흑검소를 그녀에게 넘겼다.

백화령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흑검소를 이리저리 살폈다.

“맞네.”

“뭐가 맞아요?”

“흑검소.”

악군이 강호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흔하지 않기에 흑검소를 알아보는 자는 뇌군이나 만사지존 정도였다. 악군의 신물이 주석하에게 있다는 소문이 돌긴 했으나 대부분 긴가민가 믿지 않았다.

그런 흑검소를 백화령이 알아보다니 대단한 눈썰미였다.

“흑검소는 어디에서 났어요? 둘째 사부랑 무슨 관계에요?”

주석하는 문득 떠오르는 바가 있었다.

화존에게 제자가 하나 있었다고 했던가. 그리고 화존과 악군이 그에게 당부했던 말까지.

- 다음에 내 제자 만나면 둘이서 비무를 해. 그게 전부야.

령아란 제자를 최근에 거두었다고 했었지. 이 여자의 이름이…… 별호가 천중화였는데 갑자기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그대 이름이?”

“와아! 내 이름 기억 못 하는 남자는 처음 봤어. 나, 백화령이에요. 백! 화! 령!”

“맞네. 령이.”

“네?”

백화령의 눈이 동그래졌다.

“화존이 최근에 제자를 거뒀다고 하더니 당신이었군요.”

“어?”

백화령이 놀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백화령이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당신…… 둘째 사부의 제자…… 아니다, 제자로 거두지는 않았다고 했으니까…… 하여튼 그 사람 맞죠?”

그녀가 둘째 사부라고 지칭하는 사람이 악군인 모양이다. 그때 악군이 화존의 제자에게 음공을 가르쳐준다고 했었는데 그 덕분에 둘째 사부라 칭하는 건가?

주석하는 고개를 끄덕여 긍정을 표했다. 어쨌든 그녀가 화존의 제자라면 굳이 숨길 일도 아니었고 언젠가 다시 만나야 할 인물이다. 비무 한다고 약속했으니까.

백화령이 자신의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속삭였다.

“아직 내가 화존의 제자란 건 비밀이에요. 이제 간신히 조금 배웠거든요.”

백화령이 흑검소를 다시 주석하에게 건넸다.

주석하는 백화령에게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화존의 인상이 워낙 좋았기에 화존과 비슷한 성격의 그녀에게도 좋은 인상을 받았다. 게다가 그녀는 악군에게도 무공을 사사하고 있는 듯하니 같은 사문 아닌가. 강호에서 친숙한 가족을 만난 기분이었다.

“난 둘째 사부에게는 거문고를 배워요. 당신은…… 퉁소로 배웠나 보네요?”

“조금 배웠습니다.”

“에이, 사부님들 말은 그게 아니었는데……. 당신 엄청 잘 한데요. 재능이 출중하다나……. 난 이제야 화판답공을 시작했어요. 아직 많이 미숙해요. 백변환영보는 시작도 못 했고요. 그런데 당신은…….”

“나도 간신히 흉내만 내는 정도입니다.”

“에이, 겸손은.”

백화령은 연신 재잘대면서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이럴 때의 그녀는 아직 호기심 많은 소녀 같다.

“하여튼! 긴장 팍팍 하고 기다려요. 내가 조금 더 익히면 당당하게 비무를 신청할 테니까요.”

그녀도 서로 간에 약조된 내용을 아나 보다. 비무가 왜 필요한지 모르겠으나 주석하는 악군과 화존에게 지켜야 할 의무처럼 받아들였다.

“이봐요, 연회 가시는 거죠?”

“네.”

“그럼 같이 가요.”

백화령이 그의 옆에 나란히 따라붙었다.

상춘원으로 향하는 호수 위의 다리가 무척 길었다. 넓은 호수와 어울린 주변의 화원이 무릉도원을 연상케 했다. 주석하는 유유자적 걸음을 옮겼다.

주변 경치를 만끽하며 환한 미소를 짓던 백화령이 이윽고 그를 향해 시선을 돌리고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걱정되지 않아요?”

“뭐가요?”

“주변에 모두 적이잖아요. 흰 눈 속에 떨어진 열매처럼.”

오늘 연회 참석자 면면이 모두 정파의 후기지수이니 걱정되지 않느냐는 뜻이다.

“전 둘째 사부가 흑도팔군인 악군이라…… 딱히 사파에 별다른 감정이 없지만 다른 사람들은…….”

“전 걱정 안 합니다.”

실제로 주석하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중원사룡이나 천상삼화가 무서운 게 아니라 그 뒤에 숨은 정파십존이 문제였다. 그들이 분명히 음모를 꾸미고 있을 텐데…….

주석하는 뒤를 돌아봤다. 웅장한 전각 그 어딘가에서 제갈휘가 무시무시한 계획을 세우고 있을 것이다.

**

제갈세가에서 가주가 집무를 보는 작은 전각, 녹수재에는 정파십존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제갈휘가 띄운 급보를 받고 모인 자들이었다.

“정말 그자가 그렇게 강하오?”

“신창패존을 죽이고 사천당문이 붕괴한 사실을 보면 충분히 짐작되지 않습니까?”

제갈휘는 사람들의 질문에 답하느라 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런 반응을 익히 예상했다. 아직 약관도 채 되지 않은 젊은이가 정파십존에 버금가는 무공을 익혔다니 현실적으로 와 닿지 않는다. 이를 설득하기 쉽지 않은 줄 알지만 어떻게든 공감을 끌어내야 한다.

“당최 믿을 수가 있어야지.”

“자하검존께서도 몇 차례 녀석의 무공을 가늠해보셨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자하검존에게 쏠렸다.

지금 이곳에 있는 정파십존은 모두 다섯. 제갈휘가 주석하를 처리하려고 불러들인 최강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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