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중원사룡 (4)
이곳의 주인인 만사지존 제갈휘를 필두로 자하검존, 살존, 비천광존, 만겁묵존이 모였다.
지금 제갈세가에는 창궁무존 남궁후도 와 있으나 제갈휘는 의도적으로 남궁후를 배제했다. 남궁세가가 주석하와 친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참석하지 않은 정파십존 가운데 소림의 반야불존은 지난 사건 후 연락이 닿지 않았고, 화존은 사실상 은거 아닌 은거를 했고 무당의 무극천존은 무림맹주라 이곳에 올 일이 없었다.
사실상 동원 가능한 모든 정파십존이 모인 셈이다. 넓은 강호에서 절대적인 존재라 할 정파십존이 다섯이나 한자리에 모인 경우는 대단히 드물었다. 그만큼 군사인 제갈휘의 존재감이 높다고 봐야 했다.
자하검존이 재빨리 수습했다.
“주석하의 무공은 절대 얕볼 수준이 아니오. 모르긴 해도 혼군의 진전을 거의 완벽하게 이었소.”
“흥, 그래 봐야…….”
몇몇이 콧방귀를 꼈다. 그만큼 그들은 정파십존이라는 호칭에 자부심이 높았다.
제갈휘가 재빨리 상황을 정리했다.
“어쨌든 주석하가 패존을 살해했으니 우리는 그 보복을 해야 합니다. 내버려 두면 정파십존의 체면이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호랑이는 쥐 한 마리를 사냥할 때도 최선을 다하는 법! 모두 백전노장이시니 한치의 소홀함도 없으리라 믿습니다.”
“끙.”
커다란 도를 옆에 둔 살존이 노골적인 눈치를 흘렸으나 제갈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살존은 오대세가인 하북팽가의 가주로 도에 능통했다. 그는 성질이 급하고 사파와 항상 대립각을 세우는 인물이었다. 그렇다 보니 사파 인물인 주석하를 띄우자 본능적인 거부감을 표했다.
“그래서 대체 어떻게 하겠다는 거요?”
비천광존이 빨리 회담을 진행하자고 재촉했다. 비천광존은 특이한 인물이다. 사문이 불명확한 그는 대략 십여 년 전부터 갑자기 두각을 드러냈다. 그는 비륜(飛輪)이라는 특이한 무기를 사용하고 중원을 종횡하면서 도처에서 사파를 뿌리째 뽑았다. 지금의 정파를 세우는데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다.
“오늘 밤 주석하는 청년기협이 여는 연회에 참석했습니다. 장소는 상춘원으로 알다시피 기관진식이 광범위하게 매설된 곳이지요. 그곳에서 주석하를 감금하고 처리할 겁니다.”
“상춘원? 제갈세가의 모든 비기가 설치된 용담호혈 아니오?”
“그렇습니다. 주석하가 아니라 그 할아비가 와도 절대 빠져나오지 못하지요.”
“그런데 우리는 왜?”
“쥐 한 마리를 사냥할 때도 최선을 다하는 법! 여러분 가운데 세 분이 상춘원으로 들어가시지요. 나와 남은 한 분이 뒤에 남아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겠습니다.”제갈휘는 주석하를 잡기 위해 상춘원 기관진식 속으로 정파십존 삼 인을 투입하겠다고 주장했다. 기관진식 만으로도 절대 우세를 예상하기에 굳이 삼 인을 추가로 투입할 필요가 없건만…….
“군사의 뜻은…… 우리더러 그 아이의 능력을 확인하며 식견을 넓히란 거군.”
“하하, 그렇습니다. 그동안 실력을 쓸 기회가 없어 심심하지 않았습니까?”
“크흐흐, 그렇긴 하지.”
조용히 관망하던 만겁묵존마저 하얀 이빨을 드러냈다. 만겁묵존 또한 비천광존처럼 홀로 강호를 떠도는 협사였다. 그는 권법에 능해 혼군의 진전을 이은 주석하에게 흥미를 드러냈다. 혼군 또한 권법에 일가견이 있는 까닭이다.
살존이 자원했다.
“내가 가겠소.”
“나도!”
제갈휘와 자하검존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미소를 지었다. 아직 주석하를 본 적이 없는 셋이 자원할 줄 알았다.
주석하를 상대로 기관진식의 도움까지 받는다면 절대 패할 일이 없긴 하나 자하검존은 껄끄러웠다. 시간이 흐를수록 주석하가 예상치 않게 발전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정파였다면…… 좋았을 것을. 비연이와도 괜찮은 짝이 되었을 건데…….’
자하검존은 아쉬움을 날려버렸다. 그 나이에 그 정도의 성취를 이룬 청년이라면 실로 아까운 기재가 아닌가. 정파였다면 중원사룡 못지않은 환대를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사파의 싹은 미리 잘라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는 후회할 테니.
대충 작전 그림이 나오자 제갈휘는 세부적인 계획을 통보했다. 모두 주석하가 상춘원에서 절대 살아 돌아오지 못하도록 하는 작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작전 모의가 계속되는 동안 녹수재의 지붕에는 붉은 인영이 마치 기와지붕의 일부인 것처럼 지붕에 붙어 염탐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설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녀도 제갈휘의 작전이 그리 간단치 않음을 알아챘다.
우설금의 시선이 멀리 상춘원을 향했다. 호수 한가운데 떠 있는 섬은 휘황찬란한 등을 밝히고 있었다. 잔칫집 분위기다.
그녀의 아름다운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우설금이 염탐하는 녹수재에서 약간 떨어진 다른 전각 지붕에도 한 인영이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는 우설금을 주시하며 안면을 굳혔다.
바로 천마의 명을 받고 중원에 나온 천력마부다. 그의 어깨에는 흉측하게 생긴 도끼가 두 개 엇갈려 꽂혀 있었다. 드디어 중원에 첫선을 보이게 된 마교칠왕의 일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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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회장인 상춘원에 들어선 주석하는 두 눈을 비볐다. 눈이 부시도록 환하게 밝혀진 알록달록한 등이 사방의 벽을 장식하고 있었다.
다리를 건너 이곳 섬으로 건너오면서도 잘 가꿔진 외관에 감탄했건만 상춘원 내부는 그 정도가 더했다. 여러 꽃무늬 휘장과 장식물이 마치 황제의 거처를 연상할 만큼 화려했다. 아마 중원 최고의 주루가 있다면 바로 이곳이 아닐까.
입을 쩍 벌리고 눈동자만 굴리는 주석하를 옆에 선 백화령이 눈치를 줬다. 그녀도 이곳이 처음이라 놀라긴 마찬가지였으나 주석하처럼 시골뜨기는 아니었다.
두 사람이 갈 길을 찾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자니 오늘의 연회를 베푸는 제갈우의 음성이 들려왔다.
“두 분이 함께 오셨군요. 어서 자리에 앉으시지요.”
연회장 중앙에 커다란 원탁이 있고 그 주위로 청년들이 이미 앉아 있었다. 원탁이었기에 자리의 고하가 전혀 없어 주석하는 빈자리에 적당히 앉았다.
중원사룡 넷, 천상삼화 둘, 거기에 주석하까지. 모두 일곱이었다.
주석하의 오른쪽 옆에는 함께 들어온 백화령이 앉았고 왼쪽 옆에는 남궁천이 앉아 있었다. 그 남궁천의 옆에는 남궁서란이 자리했다. 덕분에 주석하는 아군을 옆에 두었고 주최자인 제갈우와는 마주 보는 자리였다.
모두 낮에 안면을 익힌 상태여서 어색함이 다소 줄었다.
백화령이 앉자마자 남궁서란이 물었다.
“비연이는 안 온 데? 검존께서도 오셨는데?”
“일이 있나 봐. 이번에 못 온다고 연락이 왔어.”
백화령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남궁서란이 주석하를 쓱 보고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닫았다. 정작 주석하는 천상삼화의 남은 한 사람을 전혀 모르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제갈우가 연회 시작을 알렸다.
“주 공자께서 힘든 걸음을 해주셨습니다. 오늘 이 자리는 향후 중원을 짊어질 청년들의 모임으로 격의 없이 친분을 쌓으려는 목적입니다. 우리가 서로 잘 화합해야 중원이 발전하고 평화를 지속하지요. 우리에게는 막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오만한 말투 곳곳에 중원사룡과 천상삼화의 자부심이 묻어났다.
주석하도 그들의 면면을 둘러보며 감탄했다. 그가 정파였다면 반드시 끼고 싶은 자리였다. 덕양의 흑도 소공자회와는 차원이 다른 무게감이 엿보였다. 다만 그는 약간의 껄끄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정과 사는 어쩔 수 없는 물과 기름인가.
제갈우의 긴 감상이 읊어지는 동안 요리가 들어왔다. 백육초반, 규화계, 팔보두부, 홍소어, 서시유, 야계탕, 어두탕, 연와탕, 팔보야압 등 각종 요리가 산더미처럼 차려졌다.
주석하는 생전 처음 보는 요리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까지 이토록 다양한 요리를 한 자리에서 먹어 본 기억이 없었다.
“이걸 어떻게 다 먹으라고…….”
“예전에는 이 정도까진 아니었어요. 오늘 주 공자가 특별히 참석해서 음식도 특별해졌나 봐요.”
백화령이 고운 미소를 지으며 젓가락을 챙겨줬다.
그 모습을 본 남궁서란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그때 중독치료를 받은 이후로 남궁서란은 주석하를 향한 적의를 거둘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와 오빠가 주석하를 칭찬하는 데다 그녀도 큰 도움을 받았기에 이유 없는 험담을 늘어놓을 수 없어서다.
실제로 남궁서란의 시각도 조금 바뀌긴 했다. 그동안은 주석하가 단지 사파 인물이었기에 이유 없이 미워했다. 그런데 흑검문을 방문하면서 흑검문과 남궁세가 사이에 끈끈한 친분이 숨어 있음을 알게 됐다. 그래서 예전과 같은 태도를 보이기 어려웠고 자연스럽게 더욱 서먹서먹해졌다.
그런데 지금 주석하의 옆에 딱 붙어 있는 백화령을 보니 마음이 복잡했다. 엄밀히 따지면 백화령은 외모에서 그녀도 한 수 접어줘야 할 미녀다. 배경 또한 남궁세가 만큼은 아니더라도 꽤 대단하다. 그런 백화령이 갑자기 주석하와 함께 들어왔고 또 옆자리에서 친한 척하고 있으니 그녀의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백화령 때문에 표정을 주체하지 못한 인물이 또 한 사람 있었다. 바로 백화령의 옆에 앉은 태상자 무열이었다.
주석하가 사공에게 습격당할 때 함께 있었던 그는 본래부터 주석하에게 좋은 감정이 아니었다. 물론 이곳의 정파 모두가 비슷한 상황이지만 그는 유달리 주석하가 싫었다. 그래서 그날 주석하가 습격당했을 때도 도울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었다.
‘흥! 사파 나부랭이가 무공이 얼마나 세겠어?’
무당파 출신인 무열은 현 무림맹주인 무극천존에게서 무공을 직접 사사한 강자다. 그런 그에게 주석하가 눈에 찰 리 없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백화령이 주석하에게 친근하게 군다. 저 둘은 이곳에서 처음 본 사이인데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다.
무열은 주석하와 담소하는 백화령을 흘겨보면서 쓰라린 기분을 달랬다. 천상삼화 가운데 최고의 미녀인 백화령을 남달리 흠모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입술을 지그시 깨물던 무열의 눈에 술병이 들어왔다. 오늘을 위해 특별히 개봉한 십향주는 독하지만 냄새가 향기롭기로 유명했다.
무열은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술병을 잡았다.
“주 공자께선 한잔하시겠습니까?”
모두의 이목이 쏠리자 무열은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앞에 놓인 잔을 허공에 띄웠다.
허공섭물을 이용해서 잔을 눈앞에 위치시킨 후 그는 술병을 기울였다. 허공에 뜬 잔에 술이 가득 찼다.
그 장면을 본 모두의 입에서 감탄사가 어렸다. 심후한 내공이 없다면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신기였다.
채워진 술잔이 천천히 둥둥 떠다니면서 탁자 위를 맴돌았다. 모두의 앞을 한 차례씩 지나간 술잔이 마침내 주석하의 면전에서 딱 멈췄다.
주석하도 나름 놀라고 있었다.
‘무열의 무공이 범상치 않구나.’
적어도 술을 권하는 이 방식이 호의가 아님을 안다. 하지만 연회에 참석했으니 그 장단에 맞춰주어야 할 터.
주석하는 술잔을 잡으려고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술잔이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손으로 잡으면 바로 튕겨 나갈 만큼 그 기세는 무시무시했다. 놀랍게도 그렇게 회전하면서도 술이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았다.
‘잔재주를 피우는구나.’
주석하는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허공섭물을 이용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 방식이 얼마나 내공이 필요한지 얼마나 상대를 곤란하게 만드는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회전하는 술잔을 잡는 순간 무열과 그의 내공 싸움이 시작될 것이다. 자칫하면 술잔이 깨지거나 회전력을 받은 술이 밖으로 튕겨 난장판이 된다.
주석하는 피식 미소를 지으며 손으로 술잔을 잡았다.
그그그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