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중원사룡 (5)
주석하의 손이 닿은 술잔이 회전 방해를 받으며 소음이 일었다. 동시에 술잔에 담긴 술이 맹렬하게 요동쳤다.
무열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피었다. 자신의 의도에 주석하가 제대로 걸려들었다는 뜻이다.
정작 주석하는 담담한 표정으로 술잔에 집중했다.
회전을 계속하려고 몸부림치듯 흔들리던 술잔이 서서히 멈췄다. 점차 담긴 술도 잔잔하게 안정됐다.
술잔이 안전하게 멈추는 순간 무열의 얼굴에 놀람이 일었다.
당연히 주석하의 내공이 무열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을 수밖에 없다. 주석하는 혼군의 내력만을 사용하여 손쉽게 잔을 정지했다.
“주신 술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주석하는 주저하지 않고 술을 들이켰다.
무열을 포함하여 사람들이 얼이 빠진 표정을 지었다.
공격을 받았으니 되돌려주어야 하는 법. 주석하의 손에서 술잔이 벗어나 허공에 멈췄다.
“소생도 한잔 드리겠습니다.”
주석하는 술병에도 손을 대지 않았다. 술병이 둥실 떠오르더니 허공에서 술잔에 술을 채웠다. 무열이 보인 기술보다 한 차원 높은 수법이었다.
“받으시지요.”
술잔이 허공을 떠다니는 배처럼 무열 앞으로 날아갔다.
무열이 행했던 것처럼 술잔이 무열의 면전에서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으음.”
술잔이 회전하는 기세에 무열이 신음을 터트렸다. 얼핏 보기에도 술잔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그렇다고 모두가 보고 있는 와중에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 무열은 정신을 집중하며 술잔을 노려보았다.
손을 뻗어 술잔을 잡았다. 아니 잡으려 했다.
그그그극-
술잔과 손이 부딪히며 마찰이 일었다. 그런데도 술잔의 회전이 멈추지 않았다.
무열의 얼굴에 핏줄이 두드러졌다.
다행히 술잔 속의 술은 고요하게 수평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것은 주석하가 술을 제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술잔에서 술이 사방으로 튕겨 나갔을 것이다.
무열이 술잔을 강하게 쥘수록 소음 또한 커지면서 급기야 술잔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무열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손가락이 찢어질 듯 아파 왔다.
무열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힐끔 본 주석하가 웃으며 말했다.
“술잔이…… 말을 듣지 않는군요.”
주석하의 표정이 바뀌는 순간 맹렬하게 회전하던 술잔이 깨졌다.
퍼석-
주석하가 술잔을 돌리는 힘과 무열이 붙잡으려는 힘이 어긋나면서 술잔이 깨진 것이다. 당연히 술잔에 담긴 술이 탁자에 엎질러져 무열의 앞이 엉망이 됐다.
“허어, 죄송합니다. 제가 힘 조절에 서툴러서 말이죠.”
주석하는 조롱
반 사과 반 상대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무열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어떻게 되었든 사소한 도발은 완패였다. 주석하의 공력이 명백하게 그보다 심후하다고 증명된 것이다.
망신을 당하고 참고 있을 무열이 아니었다. 그는 재빨리 태세를 전환했다.
“술을 마셨으니 안주가 빠질 수 없겠죠.”
무열은 청운괴도 팽두석에게 눈을 찡긋한 다음 이번에는 계화떡이 담긴 접시를 허공에 띄웠다.
절정의 허공섭물에 모두가 감탄하는 순간 계화떡 접시가 주석하에게 날아갔다.
그 순간 팽두석의 앞에 있던 상기병 과자가 담긴 접시가 마찬가지로 주석하에게 날아갔다.
두 접시의 움직임은 절대 얌전하지 않았다. 마치 주석하의 안면을 접시로 엎을 듯한 기세였다.
접시가 주석하의 안면에 이르러 기울어지려는 순간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다.
“안주까지 주시다니 고맙습니다.”
주석하의 얼굴에서 한 치가량 떨어진 곳에 멈춘 접시는 더는 꼼짝하지 않았다. 당황한 팽두석과 무열이 내공을 더욱 끌어올려 밀어붙이려 했으나 요지부동이었다.
“이이익!”
두 사람이 내공을 극한으로 끌어올리면서 신음을 터트렸다. 이대로 망신을 자처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 되든 그들은 접시를 주석하에게 옮기려고 발버둥 쳤다.
주석하는 느긋한 표정으로 무열과 팽두석에 대응했다. 지금 두 사람이 합공하여 그를 도발해왔다. 양쪽에서 접근하는 접시에는 두 사람의 내공이 실려 있었다.
비록 무열과 팽두석의 내공이 심후하다지만 아직 정파십존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주석하는 혼군의 내력 하나만으로도 어려움 없이 도발을 막을 수 있었다.
그는 혼군의 내력으로 두 접시를 안전하게 허공에 정지시킨 후 접시에 담긴 계화떡과 상기병을 하나씩 허공에 띄웠다.
계화떡과 상기병이 주석하의 입속으로 사라졌다.
“흐음, 맛있군요.”
옆에서 보고 있던 남궁천과 제갈우는 경악해서 입을 쩍 벌렸다. 전력을 다해 내공을 쏟아내는 와중에 말을 하다니. 주석하는 여유롭게 떡과 과자를 먹는 반면 무열과 팽두석은 얼굴에 핏줄이 두드러지고 과하게 내공을 써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소생이 하나씩 드리리다.”
주석하는 접시 위의 계화떡과 상기병을 띄워 두 사람에게 하나씩 건넸다.
운기하는 와중에 계화떡과 상기병이 입으로 날아오자 무열과 팽두석은 해결방법을 찾지 못했다. 눈앞에서 오락가락하는 계화떡과 상기병을 노려보다가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운기를 포기하고 입을 벌렸다.
두 사람의 입속으로 떡과 과자가 쑥 들어갔다.
“컥!”
숨이 막힌 듯 두 사람이 한바탕 기침을 연발했다.
두 사람이 내력을 거두자 주석하는 허공에 떠 있던 접시를 조용히 아래로 내렸다.
모두가 감탄사를 연발하는 가운데 남궁천이 엄지를 척 올렸다.
“석하의 내공이 더욱 심후해졌구나. 대단한데?”
남궁서란은 심사가 복잡해졌다. 만진장에서 주석하가 혼군의 진전을 이었다고 했기에 그의 무공이 보통이 아니라는 예상을 했었다. 그런데 지금처럼 무열과 팽두석 두 사람을 동시에 꼼짝 못 하게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특히 팽두석은 노골적으로 그녀에게 호감을 표하던 청년 아니던가. 그녀 또한 절반은 받아들일 생각이었는데.
주석하를 보는 그녀의 눈빛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주석하의 옆에서 황홀한 표정으로 넋을 잃은 백화령의 모습이 발견됐다.
“으음.”
남궁서란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어째 오늘따라 백화령의 존재가 이상하게도 눈에 거슬렸다. 그때 만진장에서 유비연을 만났을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지금은 기분이 심란했다.
“주 공자는…… 엄청나네요. 아아, 난 어떡하지? 사부의 명을 따라야 하는데…….”
백화령이 주석하의 귓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주석하는 금방 무슨 뜻인지 짐작했다. 아마도 화존과 악군이 요구했던 비무일 것이다. 주석하는 빙그레 미소로 답했다.
무열과 팽두석의 도발이 실패로 돌아가자 제갈우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제야 주석하가 감히 그들이 상대하기 힘든 강자임을 인식한 것이다.
그렇다고 제갈우마저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곳은 그의 땅이다. 외부에서 들어온 인사에게 주도권을 넘겨준다면 치욕이다.
“하하, 주 공자의 무공이 정말 대단하군요. 혼군에게서 사사했다고 하셨지요? 과연 흑도팔군입니다. 이토록 엄청난 제자를 길러내다니.”
“제자는 아닙니다.”
주석하는 재빨리 정정했다.
제갈우가 빈정대는 투로 다시 물었다.
“제자가 아니라고요? 주 공자가 혼군의 혼천신공을 사용한다는 것을 누구나 아는데요?”
굳이 숨길 필요가 있을까. 주석하는 이들을 완전히 밟아주기로 했다.
“그렇습니다. 혼군의 무공을 쓰지요. 다만 혼군만은 아닙니다. 소생에게 무공을 전수하신 분은 많습니다. 일단 흑검문의 가전 무공을 위시해서…….”흑검문의 가전 무공이라 해봐야 별것 없지만 예의상 앞에 붙였다.
“흑검문? 흑검문에 무공이랄 게 있습니까?”
제갈우가 빈정거리면서 다시 물었다. 자신 있는 목소리로 보아 사전에 흑검문을 조사해 본 게 확실했다.
흑검육식을 굳이 말해야 하나? 뜻하지 않은 반격에 말문이 막힌 주석하가 멈칫할 때 남궁천이 바로 끼어들었다.
“흑검문을 연 개파조사가 바로 구주사은의 흑풍검신이시네.”
제갈우를 비롯하여 사람들의 안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비록 그들은 구주사은에 대해 잘 모르지만 대략적인 전설은 들었었다. 무려 오십여 년 전 강호를 누빈 초강 고수이자 중원을 위해 성심을 다한 네 사람을 어찌 모를까. 구주사은이 배교로 간 이후의 일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 이전에 강호에서 쌓았던 온갖 협행은 지금도 회자하고 있다.
“구주사은…….”
“그럼 정파인데?”
백화령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흑풍검신은 정사지간의 인물이었으나 강호인들은 구주사은을 정파로 간주했다.
예상과 달리 흑검문이란 곳이 꽤 유서 깊은 문파임을 알게 된 사람들의 표정이 여러모로 달라졌다. 무엇보다 정파와 사파의 불명확한 경계가 그들에게 혼란스러움을 가져왔다.
주석하의 뒷말은 그 도를 더했다.
“하여튼 저는 흑검문의 가전 무공을 기반으로 혼군과 악군, 암군, 염군의 무공을 익혔습니다. 아, 거기에 화존과 뇌군의 무공도 덧붙여야겠군요.”
주석하의 놀라운 이력에 모두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대다수 무림인은 사문 한 곳의 무공을 익히는 게 전부다. 주석하처럼 온갖 무공을 익히는 경우는 없다.
그런데 주석하는 다양한 무공을 배웠으면서도 그 문파의 제자가 아니다. 게다가 그 무공이 하나같이 현존하는 최강자의 무공이다. 그것도 정파, 사파를 넘나든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제갈우를 비롯해 무열과 팽두석이 질투의 눈빛으로 노려봤다.
주석하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그들의 눈빛을 되받아쳤다. 이제는 그도 거리낄 것이 없었다. 어떤 무공을 익혔는지 누구에게서 배웠는지 굳이 숨길 이유도 없다. 그만큼 누구와 상대하더라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쳤다.
멍한 상태를 가장 빨리 수습한 사람은 제갈우였다.
제갈우는 지금까지 누구보다도 우월하다고 자부했다. 비록 무공은 전통의 강자인 소림이나 무당을 넘지 못하더라도 머리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렇다 보니 주석하에게 지기 싫었다. 아무래도 무공으로 주석하를 이기기는 어려워 보이지만.
“주 공자께선 정말 대단하시군요. 방금 뇌군의 무공도 사사하셨다고 했는데…… 혹시 기관진법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계시는지요?”
명백한 도발이었다.
“이미 들어보셨을 텐데요? 제가 만진장에서 진법에 갇혀서…….”
제갈우도 당연히 제갈휘를 통해 들었다. 무식하게 뇌군의 진법을 통째로 날려버린 자가 있었다고. 그때는 마냥 웃고 말았는데 지금 주석하를 눈앞에 두고 보니 과연 그럴만한 녀석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제갈세가의 진법은 뇌군만큼 약하지 않다고 믿었다.
‘무공이 뛰어나다고 기관 진법까지 잘하라는 법은 없으니까.’
제갈우는 속으로 결심을 굳히고 도발을 감행했다.
“주 공자!”
주석하가 상대에게 시선을 돌리는 순간 나무통에 든 나무젓가락이 허공에 떠올랐다. 무려 십여 개의 젓가락이 동시에 허공에 떠 있는 장면은 실로 장관이었다.
제갈우가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공을 이용해서 젓가락을 탁자에 뿌렸다.
쿡- 쿡-
젓가락이 날아와 탁자 위에 깊숙이 박혔다. 십여 개의 젓가락은 순식간에 기묘한 문양을 형성했다.
영문을 모르는 주변 사람들의 관심 속에 제갈우가 젓가락을 이용해서 날아다니는 파리를 잡았다.
제갈우는 잡힌 파리를 탁자에 꽂힌 젓가락 문양 사이로 옮겼다. 그가 파리를 놓아주는 순간 다시 젓가락 하나가 날아가 문양의 정중앙에 박혔다.
순간 젓가락 사이로 보이는 탁자의 모습이 일렁거리며 변화를 일으켰다.
그제야 제갈우가 탁자 위에 소규모 진법을 펼쳤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이 감탄사를 터트렸다.
탁자 위에서 파리는 마치 진법에 갇힌 것처럼 젓가락 내부에서 맴돌 뿐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했다.
제갈우가 마침내 도전장을 내밀었다.
“자! 주 공자! 어떻게 하면 파리가 밖으로 도망칠 수 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