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정파십존 (1)
모두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탁자에 꽂힌 젓가락을 관찰했다.
“허허만상진!”
남궁천이 설치된 진법을 확인하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허허만상진(虛虛萬象陣)은 제갈세가가 자랑하는 대표적인 절진으로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진식의 묘리가 숨어 있다. 웬만큼 진법에 익숙하지 않다면 이 진법을 깨트리기 어렵다.
제갈우가 이 진식을 꺼낸 것은 주석하의 진법 지식을 시험해보려는 의도였다. 주석하가 뇌군의 진전을 이었다고 본인의 입으로 말했으니 그야말로 좋은 기회였다.
‘이걸 네놈이 파훼할 수 있다면 내가 성을 간다.’
무공도 짧은 시간 내에 완성하기 어렵지만 기관진식 역시 짧은 시간에 통달할 수 없다. 제갈세가에서 어렸을 때부터 진법을 배워온 제갈우도 아직 부친에 비하면 절반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주석하가 뇌군의 밑에서 수학하지 않았으니 진법을 알아봐야 얼마나 알겠는가. 하물며 눈앞에 펼친 허허만상진은 제갈세가가 자랑하는 절진이다. 제갈우는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탁자에 꽂힌 젓가락에 갇혀 파리가 열심히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 신기한 광경에 주석하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는 이런 식으로 진법을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가 경험한 진법은 만진장에서 갇혀 고생했던 것이 전부였다.
“우와!”
주석하의 탄성에 제갈우와 동료들은 비웃음을 지었고 남궁천과 백화령은 우려의 시선을 보냈다. 지금 주석하의 표정은 영락없이 도성에 올라온 시골뜨기였다. 그것만 보아도 주석하의 진법 지식이 거의 전무하다고 짐작할 수 있었다.
“이렇게 시험하는 건…… 좀 과하지 않아?”
남궁천이 은근슬쩍 제갈우를 나무랐다. 백화령도 옆에서 끼어들었다.
“제갈 소협, 이건 기초적인 진법이 아니잖아요? 당신 아니면 누구도 파훼하기 힘든 진법인데요?”
“주 공자가 자칭 뇌군에게 사사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뇌군의 제자라면 이 정도는 쉽게 해결해야죠.”
제갈우가 비웃음을 머금고 백화령에게 눈총을 줬다. 왜 사파인 주석하를 두둔하느냐는 질책이다.
무열도 침울한 표정으로 백화령을 향해 눈치를 줬다.
백화령은 고운 아미를 찌푸리며 못마땅한 티를 팍팍 냈다.
“이런 식으로 손님을 괴롭혀도 되나요?”
“알다시피 뇌군과 제갈세가는 상극 아닙니까? 이건 두 진영의 문제이니 끼어들지 마시지요.”
“그래도 이건…….” 백화령이 다시 반박하려 할 때 주석하가 손을 저었다.
“이 진법을 깨기만 하면 되나요?”
“물론입니다.”
제갈우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허허만상진을 깨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진법의 약점을 정확하게 꿰뚫어서 단 한 번의 출수만으로 해제하는 방법부터 시작하여 외곽부터 공략하여 무수한 시도를 거듭하면서 진법을 해체할 수도 있다. 어떤 방식을 선택할지는 주석하의 능력에 달려 있다. 물론 주석하가 해결법을 안다면.
주석하가 진법을 깨는 방식을 통해 그 능력을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물론 제갈우는 주석하가 그것마저 하지 못해 진법을 깰 수 없으리라 장담했다. 진법은 결코 쉬운 분야가 아니니까.
주석하는 자신이 사용하던 나무젓가락을 들었다.
“파리만 살리면 되는 거죠?”
“그렇습니다.”
제갈우는 나무젓가락을 힐끔 보면서 앞으로 벌어질 상황을 예상했다. 탁자에 설치된 허허만상진 이곳저곳에 젓가락을 꽂으면서 진법을 파훼하려는 방식이다. 저 방식은 진법의 생문(生門)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발생한다. 자칫 파리를 사문(死門)으로 몰아넣어 죽일 수도 있다.
겉보기에는 별것 아닌 진식처럼 보이지만 허허만상진은 그리 단순하지 않으니까.
제갈우의 입가에 걸린 비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주석하는 제갈우의 내심을 눈치챘다.
‘오늘 네놈들의 도발을 이것으로 마무리해주지.’
오늘 주석하는 문제를 일으킬 의사가 전혀 없었다. 이곳이 적진이니 조용히 처신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하룻강아지들이 자꾸 시비를 걸어온다. 그렇다면 오는 만큼 되돌려줄 수밖에.
주석하는 자신을 바라보는 주변의 눈을 쓱 훑었다. 조롱
섞인 눈빛과 긴장한 눈빛이 절반이다.
주석하는 악군의 내력을 천천히 끌어올렸다. 그 기운은 곧 손에 쥔 나무젓가락으로 넘어갔다.
휙-
순간 주석하는 나무젓가락을 탁자 위로 던졌다.
콰앙!
젓가락이 탁자의 어느 한 곳에 떨어지는 순간 거대한 원탁이 그대로 두 쪽으로 쪼개졌다. 당연히 진법이고 뭐고 박살이 났고 갇혔던 파리는 유유히 밖으로 탈출했다.
“허억!”
사람들이 놀라서 쓰러지는 탁자를 옆에서 받쳤다. 탁자 위에 음식이 많이 놓여 있어서 탁자가 쓰러지면 대참사가 발생한다.
“이, 이게 무슨!”
팽두석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연회를 난장판으로 만든 이런 짓을 용서할 수 없었다.
정작 주석하는 피식 웃으며 별일 아니란 듯 손을 탁탁 털었다.
“에이, 힘이 너무 들어갔네. 미안하게 됐습니다.”
그는
팽두석과 무열이 주석하의 만행에 분노를 터트린 반면 남궁천과 백화령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남궁서란은 여전히 복잡한 표정으로 주석하의 눈치를 살폈다.
정작 이 사태를 일으킨 장본인인 제갈우는 안색이 창백했다.
겉으로 드러난 상황은 진법을 풀지 못한 주석하가 화가 나서 탁자를 깨버린 것처럼 보인다. 허허만상진을 제대로 모르는 자라면 분명히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사실 젓가락으로 탁자를 깨는 행위는 웬만한 무공 고수라면 어렵지 않다.
그런데 제갈우는 방금 주석하가 던진 나무젓가락이 꽂힌 지점을 보고 내심 깜짝 놀랐다. 젓가락이 닿은 곳은 허허만상진을 정확하게 파훼할 수 있는 유일한 지점이었다. 우연은 불가능하다. 허허만상진을 완벽하게 알지 못한다면 절대 그 지점을 공략하지 못한다.
주석하는 굳이 힘을 들여 탁자를 깨지 않고도 그 지점에 젓가락을 꽂음으로써 충분히 진을 파훼할 수 있었다. 비록 진법에 능통한 수준은 아니지만 뇌군이 준 책자에 제갈세가의 진법을 파훼하는 방법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었으니까. 그런데도 마치 무식하게 진을 깨버린 이유는 경고하기 위해서다.
‘이놈이!’
제갈우는 내심 이를 갈면서 주석하를 노려보았다.
주석하가 피식 웃으며 손을 저었다.
“아, 너무 그렇게 책망하지 마시죠. 원한다면 탁자값 정도는 변상할 수 있습니다.”
으드득-
제갈우는 저절로 이빨이 갈렸다.
시종들이 들어와서 재빨리 탁자를 교체하고 연회 상을 새롭게 차렸다.
서먹해진 분위기를 남궁천이 얼른 수습했다.
“자, 모두 한잔합시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고 앞으로 자주 봐야 할 사이입니다.”
술잔이 돌고 주석하도 적당히 어울렸다. 어쨌든 그에게 누가 적의를 품고 있는지 분명하게 드러났다.
**
초저녁에 시작된 술자리는 밤이 이슥할 때까지 계속됐다.
제갈우, 무열, 팽두석이 돌아가면서 한 차례씩 도발을 감행한 후로 연회는 조용하게 흘렀다. 맛난 요리를 먹고 술을 마시며 담소가 이어졌다.
모두가 주석하의 이력을 궁금해했으나 주석하는 말을 삼갔다. 굳이 너무 많은 사실을 직접 말해줄 이유는 없다. 대신에 그는 듣는 쪽으로 작전을 바꿨다.
덕분에 중원사룡이, 천상삼화가 얼마나 친한지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아직 젊어서일까. 예상보다 그들은 순수했고 정의감에 불타고 있었다. 다만 무림을 정파와 사파로 나눈 이분법적인 사고가 문제로 보이긴 했지만.
“괜찮아요? 너무 많이 마시는 거 아니에요?”
옆에서 백화령이 술에 취한 주석하를 염려했다. 당연히 주석하는 술의 양을 잘 조절하고 있었다. 적진에서 지나치게 흐트러지면 위험하니까.
“괜찮습니다. 천중화께서도 많이 드신 것 같은데요?”
“전 잔만 채워놓고 있었어요.”
백화령이 빙그레 웃으며 술잔을 들어 보였다. 술잔에 가득한 술이 찰랑거렸다.
주석하는 술잔을 들어 남궁천에게 눈짓으로 인사했다. 오늘 옆에서 측면 지원해주느라 힘들었을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 너머로 남궁서란이 보였다.
예상과 달리 남궁서란이 술을 많이 마신 것처럼 보였다.
‘기분 나쁜 일이 있나?’
잠시 고민하던 그는 바로 관심을 껐다.
느긋한 마음으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을 때 연회장 문이 열리고 한 인물이 들어왔다. 이곳의 가주인 제갈휘였다.
주위를 쭉 둘러본 제갈휘가 주석하에게 말을 건넸다.
“흥미로운 시간을 보냈나?”
“덕분에 좋은 경험을 했습니다.”
“앞으로 더욱 진기한 경험을 하게 될 걸세.”
묘한 답을 남긴 제갈휘가 아들 제갈우에게 눈짓했다.
제갈우가 사람들에게 연회가 끝났음을 알리자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도 이만…….”
주석하는 인사하면서 떠나려 했다.
“이보게, 주 공자.”
걸음을 옮기던 주석하가 몸을 돌려 제갈휘를 바라봤다.
“주 공자, 잠시 시간을 내주게.”
“무엇 때문에 그러십니까?”
그가 이곳에 온 후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만나주지 않던 제갈휘였기에 지금 태도는 다소 의외였다.
연회장 내부는 금세 비워져 제갈휘와 주석하만이 남게 됐다.
“앉아 보게.”
“괜찮습니다. 말씀하시지요.”
심상찮은 분위기를 직감한 주석하는 상대를 노려봤다. 평소의 인자한 표정과 달리 마주한 제갈휘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한참 동안 주석하를 꼼꼼하게 살피던 제갈휘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자네가 신창패존을 살해한 게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사천당문을 멸문한 것도?”
“그 사건은 딱히 제가 아닙니다만.”
“그럼 누군가?”
“이미 아시지 않습니까?”
주석하는 상대를 노려보았다. 드디어 그를 이곳에 불러들인 음모를 실행할 모양이다. 지금까지 미룬 이유는 준비가 미완성이었기 때문이겠지.
“빙군과 염군인가?”
주석하는 웃음으로써 대신했다.
“빙군과 염군이 갑자기 사라졌더군. 나는 자네가 그들을 불러들여 당문을 멸했다고 생각하네. 자네도 알다시피 최근에 당문과 자네 사이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잖나.”주석하는 제갈휘가 어디까지 아는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제갈휘가 인자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패존을 살해한 것만으로도 무림에서는 자네를 내버려 둘 수 없다는 여론이 많다네. 그런데 자네는 당문까지 멸문하지 않았나? 조만간 자네는 무림 공적으로 올라갈 걸세.”주석하는 콧방귀를 끼지 않을 수 없었다. 먼저 시비를 걸어온 쪽이 패존이고 당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그 책임이 자신에게 떨어지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무림에선 목숨은 목숨으로 갚아야 하는 법!”
“그래서요?”
“그렇다고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를 짓밟을 만큼 우리는 악독하지 않다네.”
“하아!”
주석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파의 어른이라는 자의 작태가 점점 우스웠다.
“무림의 여론대로라면 자네를 죽여야 하지만 내가 말린 결과…… 그 죄를 조금 경감했네.”
“어차피 마찬가지겠군요?”
“그래도 목숨을 건진다는 게 어딘가? 일단은 무공을 폐하는 것으로 합의를 봤네.”
“큭큭큭.”
주석하는 비웃음을 터트렸다. 정파가 뭐라고 남의 목숨을 제멋대로 좌우한단 말인가. 주석하는 지금 제갈휘가 그를 죽이기 위한 사전 작업을 그리고 있음을 눈치챘다. 당연히 그는 이런 방식의 억압에 응할 생각이 없었다. 전생에서 얼마나 고생했는데 또 그 굴욕을 참아야 하나?
“그게 전부는 아니겠지요? 마지막 패를 꺼내보세요. 시간 없으니.”
조금도 당황하지 않는 주석하의 태도에 제갈휘는 안면을 찡그렸다.
“아직 실감 나지 않나 보군. 하지만 곧 알 거네. 자신이 얼마나 백척간두에 몰려 있는지.”
“됐고. 그래서?”
“마지막 제안이네. 무공을 폐하는 대신 자네에게 금제를 가하는 것으로 하지. 금제를 받으면 내공을 지금의 절반만 쓸 수 있을 거네. 이게 내가 베풀 수 있는 최선이야. 어떤가? 받을 텐가? 아니면 죽을 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