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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검천하-123화 (123/273)

123화 정파십존 (2)

주석하는 한바탕 큰소리로 웃었다.

역시 그를 이곳 제갈세가로 불러들인 이유가 있었다. 이런 식으로 압박을 가하면 굴복하리라 예상했겠지. 설사 굴복하지 않더라도 이곳에서 어떻게든 해치울 수 있으니. 명분이야 제갈휘가 무림맹 군사인 이상 만들기 나름 아닌가.

“당신, 하는 일이 항상 그런 식이야?”

주석하가 반말로 달려들자 제갈휘가 안면을 찌푸렸다.

“무슨 말인가?”

“먼저 싸움을 건 자는 신창패존이었지. 만일 내가 무공이 조금만 낮았어도 난 패존의 창에 찔려 죽었어. 당문의 경우도 마찬가지. 당신도 아는 사실이잖아? 모르는 척하지 마.”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제갈휘가 그를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주석하는 제갈휘를 중앙에 두고 연회장을 빙빙 돌았다.

“호오, 본인이 판 함정이 부끄러운가 보지? 그런 입으로 대의와 정의를 말하려니 차마 입이 안 떨어지지?”

“이 녀석이! 네놈이 뭐라고 하든 바뀌지 않는다. 무림에는 힘이 곧 정의인 법! 나의 제안을 받을 거냐? 아니면 목을 내놓을 거냐?”

“힘이 곧 정의라…… 좋은 말이네.”

주석하는 툴툴대며 장난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올 때 이런 최악의 경우를 상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어차피 피한다고 해서 피해지는 것도 아니니까 당당히 맞서려고 했을 뿐. 피할 수 없다면 오히려 응징하는 것이 낫다. 그래야 주도권을 가져올 수 있으니까.

지금 저들은 그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 점이 유일한 탈출구다.

“명심해 두는 게 좋아. 조만간 그 말을 반대로 듣게 될 테니까.”

주석하의 빈정대는 대답에 제갈휘가 이를 갈았다.

“살길을 열어주었는데도 거부하는구나! 좋다! 더는 봐줄 수 없다! 네놈은 내일 아침에 시체로 발견될 것이다. 물론 세상에는 무림맹의 중요문서를 훔치러 들어왔다가 기관에 갇혀 죽었다고 알려지게 되겠지. 여차하면 다른 죄목도 붙여줄까? 이를테면 천상삼화를 겁탈하려는 색마였다거나 아니면 마교의 앞잡이로 잠입했다거나.”제갈휘에게서 막말이 쏟아졌다. 물론 들을 가치도 없는 말이었다.

그는 제갈휘를 쓱 쳐다보고는 성큼 앞으로 걸었다.

“난 그만 간다. 인연이 있으면 그때 보자고.”

주석하가 연회장의 출구로 다가가는 순간 갑자기 연회장 문이 쾅 닫혔다.

“어?”

그는 안면을 찡그리며 뒤를 돌아봤다.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방금 그를 노려보며 악담을 퍼붓던 제갈휘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넓은 연회장 내부에는 오직 그 혼자 남아 있었다.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건가…….” 주석하는 쓴웃음을 삼켰다.

우우우웅-

갑자기 나지막한 굉음과 함께 전각 전체가 서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바닥이 푹 꺼지며 그의 몸이 아래로 빨려 들어갔다.

기관진식이 발동한 것이다. 제갈세가가 안배해둔 최고의 절진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와라! 기꺼이 상대해주마!

**

연회장 지하는 사방이 석벽으로 막힌 커다란 공간이었다.

원형의 비교적 넓은 공간을 중심에 두고 가지 치듯 뻗어 있었다. 석벽의 중간중간에는 커다란 야명주와 화등이 매달려 있어 어둡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가뿐하게 바닥에 내려선 주석하는 천장을 올려다봤다. 연회장이 있던 천장은 어느새 완전히 막혀 평범한 석판으로 바뀌어 있었다.

“예상외로 기관이 정교하군.”

과연 제갈세가란 생각에 주석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제 이곳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미로에는 제갈휘가 안배한 각종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주석하는 예전에 만진장에서 진에 갇혔던 기억을 떠올렸다. 쉽게 빠져나갈 수 없다면 그때처럼 깨부수면 된다. 제갈세가도 그를 어쩌지 못함을 명백하게 보여줄 것이다.

주석하는 네 곳의 미로 가운데 하나를 찍었다. 일단 미로부터 구경하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울 생각이다.

미로의 폭은 두 사람이 나란히 걸을 정도였다. 좌우는 물론 바닥과 천장도 견고한 석벽이라 빠져나갈 틈이 보이지 않았다. 당연히 어디로 향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주석하는 손에 든 흑검소를 굳게 쥐고 발을 내디뎠다.

대략 오 장가량 전진하자 미로가 우측으로 꺾였다. 그가 몸을 트는 순간 천장이 열리면서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첫 공격이다.

주석하는 재빨리 흑검소로 화살을 쳐냈다.

“역시 별별 장치가 다 숨겨져 있군.”

위험이 도사린 미로를 멋대로 돌아다니면 위험하다. 다만 그가 미로를 돌아다니는 이유는 이 절진이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뇌군이 준 서적에는 제갈세가의 대표적인 기관 진식의 원리와 파훼법이 적혀 있었기에 이 절진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비처럼 쏟아지던 화살이 마무리되자 이번에는 좌우에서 도검이 불쑥 튀어나왔다.

까강!

주석하는 재빨리 흑검소를 휘둘러 접근하는 검을 막았다. 무공이 강하지 않은 자라면 이미 목숨을 잃고도 남을 위험한 장치였다.

그렇게 몇 발자국을 전진했을까. 갑자기 사방이 흔들리면서 석벽이 어지럽게 변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그가 지나온 미로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새로운 통로가 열렸다.

그 기묘함에 주석하는 감탄을 연발했다.

다시 그의 앞에 길게 뻗은 미로가 등장했다. 방금 지나온 곳과 다른 점이라면 이번에는 사방을 자욱한 안개가 채우고 있었다.

“기관과 진식이 섞인 효과인가?”

주석하는 예상보다 더 복잡한 기관진식에 절로 식은땀이 났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몇 발자국 앞으로 내딛는 순간 사방에서 암기가 날아왔다. 안개 때문에 어디에서 쏘는 것인지조차 불분명했다. 그 암기가 셀 수 없을 만큼 많았기에 좁은 영역에서 흑검소로 모두 쳐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주석하는 내공을 끌어올려 호신강기로 두텁게 몸을 보호했다.

투투툭-

다행히 암기는 호신강기를 뚫지 못했다.

“겨우 이런 정도라면 실망인데…….”

주석하가 짜증스러운 감상을 토해내며 전진하는 순간 강력한 기운이 그를 저지했다.

앞에 뭔가가 있었다. 그것도 그에 육박하는 초강고수가. 드디어 제갈휘가 안배한 본론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석하는 형형한 눈빛을 빛내며 안개를 뚫어봤다. 짙은 안개 뒤로 흐릿한 사람의 윤곽이 느껴졌다.

“누구요?”

예상과 달리 대답이 바로 돌아왔다.

“흑검서생이라는 애송이냐?”

애송이라? 하긴 애송이가 맞긴 하다. 공식적으로 그가 무림에 나온 지 불과 일 년 남짓이니.

“그렇소만 당신은 누구요?”

“으하하하! 나는 비천광존이라 한다.”

“정파십존!”

상대가 다가온 듯 그 윤곽이 점점 또렷해졌다. 텁수룩한 콧수염에 치렁치렁한 머리카락까지. 외모부터 정상이 아니어서 왜 광존(狂尊)이라 불리는지 알 것 같았다.

“미친놈이군.”

주석하는 실소를 터트렸다. 정파십존의 일인인 비천광존이 이곳에 등장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일단 기관진식을 이용해서 그를 가두어 놓고 정파십존을 투입해서 마무리하려는 속셈이다.

신창패존을 이긴 그를 상대하고자 제갈휘는 한 사람만 투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긴장감 속에 주석하의 손에서 땀이 배어났다.

“나를 보고 미친놈이라고 부른 자는 네 녀석이 처음이다. 겁이 없구나.”

“어차피 나를 내버려 둘 생각은 없지 않소? 그러니 욕이나 실컷 하는 게 더 낫지.”

“젊은 녀석이 기개가 남다르다만…… 그렇다고 살려줄 생각은 없다. 네놈은 무림을 좀 먹는 쓰레기니까. 네놈을 죽이면 수천의 목숨을 살리게 되지. 장차 네놈은 대마두로 자랄 테니까. 아예 싹을 자르는 게 내 임무다!”

“제갈휘의 뜻이오?”

“아니, 위대한 정파십존의 뜻이다!” “그게 그거지. 어차피 정파십존은 제갈휘의 개가 아니더냐!” “갈!”

분노한 비천광존이 발을 굴러 진각을 밟았다.

쿵!

바닥 석판이 움푹 패며 거미줄처럼 금이 쭉쭉 그어졌다.

비천광존의 공력이 보통 이상임을 한눈에 파악했다. 그렇다고 입을 닥칠 주석하는 아니었다.

“개를 개라고 부르지 못하는 더러운 세상!” “이놈이! 그래도 뚫린 입이라고 주둥이를 놀리는구나.”

“나라면 혀 깨물고 죽었다! 제갈휘 따위의 개가 되느니.”

“이놈이!”

쐐액-

강력한 바람이 일면서 무엇인가가 그를 덮쳤다.

안개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마치 어둠 속에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것처럼 날카로운 기운이 그를 엄습했다.

깡!

반사적으로 흑검소로 튕겨냈다. 충격파가 터지면서 그의 손에 둔중한 충격을 안겼다.

카가강-

튕겨 나간 물체가 석벽을 때리고 다시 그를 향해 날아왔다. 그제야 주석하는 날아오는 물체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비륜(飛輪)!

맹렬하게 회전하는 원판이다. 얼핏 정파십존 가운데 비륜을 무기로 쓰는 자가 있다고 들었는데 바로 비천광존이었나 보다.

원판의 가장자리에는 날카로운 칼날이 달려 닿은 물체를 손쉽게 자르거나 부셨다.

주석하는 안개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비륜을 재차 튕겨내고 흑검소를 살폈다. 놀랍게도 비륜이 스쳐 지나간 석벽에 커다란 상흔이 남았건만 흑검소에는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과연 악군의 신물다웠다.

“흐흐, 네놈은 끝이다!”

위이이잉-

다시 비륜이 그를 공격했다.

미로를 가득 채운 안개와 비륜의 조합은 실로 위력적이었다. 제갈휘가 진법 내에 안개를 퍼트린 이유가 눈에 보였다. 바로 비천광존이 비륜을 더 효과적으로 다루게 하기 위해서다.

쉴새없이 날아오는 비륜을 튕겨내며 주석하는 반격의 기회를 노렸다. 비륜의 움직임이 규칙적이지 않고 안개가 방해해서 열세를 만회하기 쉽지 않았다.

게다가 석벽의 기관이 작동하여 언제 암기가 쏟아질지도 의문이었다.

“만사지존이 네놈을 그토록 칭찬했는데 별것 아니었구나!” 주석하가 좀처럼 비륜을 뚫을 실마리를 찾지 못하자 비천광존은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칭찬했다고?”

“네놈을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무려 십존을 셋이나 투입했다. 나 혼자서도 손쉽게 끝낼 수 있는데 말이지. 오늘처럼 십존이 셋이나 가담한 경우는 네놈이 처음이다. 영광으로 알아라!”예상을 넘는 안배에 주석하는 눈앞이 막막했다.

제갈휘가 단단히 계획을 세웠으리라고 예상했지만 무려 정파십존 셋이라니! 그처럼 대단하게 평가받았다는 사실에 한편으로는 기뻤으나…….

‘젠장, 기관진식만 해도 만만치 않은데 여기에 더해 셋이라니!’

아무래도 오늘은 길보다 흉이 많을 듯하다.

위이이잉-

짙은 안개를 뚫고 비륜이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날아왔다. 주석하는 반사적으로 흑검소로 비륜을 쳐냈다.

콰앙-

이번에는 충격이 심해졌다.

내력이 실린 비륜의 충격에 주석하는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비륜에서 뿌린 강기가 충격을 가중시켰다.

어쩔 수 없이 주석하도 흑검소에 내력을 불어넣었다.

그그그극-

튕겨 나간 비륜이 천장의 석벽을 가르며 재차 다가왔다.

쿠르르르-

석벽이 진동하면서 돌가루가 쏟아졌다. 비륜이 지나간 곳의 천장 일부가 무너지고 있었다.

“젠장! 벽이 다 무너지겠어!”

이렇게 비륜만 막고 있을 수는 없었다.

주석하는 안개 뒤편에 어리는 흐릿한 윤곽을 향해 번개처럼 몸을 전진했다. 날아오는 비륜에 대응하는 것보다 비륜을 조종하는 놈을 공격하는 게 더 효과적이다.

번쩍!

흑검소에서 뻗어 나간 검강이 비천광존을 직격했다.

콰앙!

놀랍게도 다른 비륜이 나타나 검강을 갈랐다. 거대한 파문이 미로를 가득 메웠다.

이제 두 개의 비륜이 그를 앞뒤로 압박해왔다.

“놀랍군!”

위이이잉-

주석하는 눈앞으로 날아오는 비륜을 아슬아슬하게 뒤로 흘리면서 비천광존과의 거리를 급격하게 좁혔다.

임기응변에 놀란 비천광존이 멈칫하는 사이 주석하는 상대의 정수리를 향해 검강을 뿌렸다.

콰직!

아슬아슬하게 상대의 어깨를 스친 검강이 뒤쪽의 석벽에 충격을 가했다.

그 순간 뒤에서 비륜 두 개가 동시에 날아왔다. 정신을 차릴 틈이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주석하는 흑검소를 회수하며 다가오는 비륜을 후려쳤다.

검강과 부딪힌 비륜이 강하게 튕겨 날아오던 다른 비륜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까가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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