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정파십존 (3)
별이 쏟아지는 하늘 아래에서 우설금은 상춘원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별처럼 반짝이는 그녀의 눈동자가 한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갑자기 상춘원이 변화를 일으키며 기관진식이 발동되는 상황을 모두 지켜봤다. 겉으로 보기에 상춘원 전각은 큰 변화가 없어 보였으나 그 내부가 용담호혈로 바뀌었다는 정도는 그녀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제갈세가의 최강 진법이 펼쳐졌어.”
지금 상춘원은 다리가 철거되어 호수 중앙에 떠 있는 섬과 같았다. 그 섬 아래로, 호수 바닥 아래로 무수히 많은 미로가 엉켜 절진을 구성하고 있을 것이다.
그곳에서 미세한 소음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제갈휘가 작전을 개시했나 보네.”
그녀의 미세한 감각이 상춘원 부근의 초강 고수 움직임을 전달하고 있었다. 모두 넷. 그중에 셋이 정파십존이고 남은 하나는 주석하일 것이다.
주석하 단 한 명을 상대로 정파십존 셋이 가담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만큼 제갈휘가 상대를 높이 평가했다는 뜻이다.
그녀도 주석하를 수시로 관찰하고 있었던 만큼 언제 그렇게 성장했는지 신기했다.
우설금은 천마의 명을 되새겼다.
정파와 사파의 균형을 맞춰서 한쪽으로 기울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그들끼리 끊임없이 상잔하며 계속 약화할 테니까. 현재 정파십존이 하나, 흑도팔군은 둘이 죽었기에 균형추는 정파로 기운 상태다. 이 상황에서 주석하가 죽으면…….
그렇게 되면 흑도가 일어설 가능성이 확 줄어든다. 어떻게든 주석하를 살려야 하는데 돌아가는 상황이 만만찮다. 정파십존 셋이 들러붙어 있고 주변에는 죽음의 기관진식이 포위하고 있으니.
“하아! 쉽지 않겠어.”
왜인지 모르지만 처음 봤을 때부터 자꾸 주석하가 신경 쓰인다. 지금도 그를 도와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자꾸 몸이 들썩인다. 비록 마음속으로 이것은 천마의 명령이라고 세뇌하고 있지만.
정파십존 셋으로부터 주석하를 구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녀의 무공이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도망칠 실력이 충분하다. 다만 주변에 널린 기관진식이 문제다. 그녀도 만능이 아닌 만큼 제갈세가의 기관진식을 뚫기란 쉽지 않다.
평소라면 이런 위험한 장소에 절대 뛰어들지 않을 것이다. 완벽한 승리가 보장된 곳이 아니니까.
하지만…….
우설금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지금 움직이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 이런 기분은 낯설었다.
입술을 질끈 깨문 우설금은 어둠 속으로 몸을 날렸다. 붉은 그림자가 옅어지며 어둠이 덮였다.
**
주석하는 날아오는 두 개의 비륜을 상대하며 비천광존과의 거리를 좁혔다.
끊임없이 공격하는 위력적인 비륜은 광존이 왜 정파십존에 속해 있는지를 충분히 증명했다. 거기에 안개마저 상대를 돕고 있었다. 여러모로 주석하에게 불리했다.
이 상황을 역전하려면? 주석하는 근접전을 선택했다.
비륜은 날아다니기에 상대와의 거리가 멀수록 위력적이다. 바로 옆에 붙으면 아무래도 비륜의 움직임이 제한 될 수밖에 없다.
“하압!”
주석하는 공세를 취하며 미로의 천장을 강기로 갈랐다.
콰지직-
천장이 갈라지면서 암기가 비처럼 쏟아졌다. 당연히 주석하가 아닌 비천광존의 머리 위에서다.
주석하에게 반격을 개시하려던 비천광존이 멈칫했다.
지금까지 둘이서만 싸우던 상황에서 기관진식이 개입한 셈이 됐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주석하는 전광석화처럼 몸을 날려 비천광존에게 따라붙었다. 흑검소가 상대의 허리를 노리고 허공을 갈랐다.
쾅!
어느새 비천광존의 손에는 새로운 비륜이 장착되어 있었다. 그는 비륜을 날리지 않고 손에 든 채 흑검소를 막고 연이어 주석하의 목을 노렸다.
주석하도 흑검소로 비륜의 공세를 막으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상대의 가슴을 후려쳤다.
후우웅-
강력한 풍압이 일어나고 변화무쌍한 일 권이 비천광존의 가슴을 찍었다. 아슬아슬하게도 그의 일 권은 비륜에 막혔다.
주석하는 혼천십이권으로 수차례 공방을 거듭하며 상대를 몰아붙였다.
과연 비천광존은 정파십존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의 장기는 날아다니는 비륜만이 아니었다. 손에 장착한 비륜만으로 혼천십이권을 능가하는 위력을 보였다.
‘쉽지 않아!’
사방에서 암기가 쏟아졌다.
어느새 주석하의 몸은 스쳐 지나간 비륜 때문에 곳곳에 상처가 났다. 비천광존도 다르지 않았다. 그의 몸 곳곳은 혼천십이권과 흑검소에 맞아 움직임이 자연스럽지 않았다.
“믿지 않았는데…… 예상과 다르구나! 과연 제갈휘가 조심하라고 당부할 만하다!”
비천광존이 감탄의 눈빛을 보냈다.
“당신도 마찬가지!” 주석하도 숨을 헐떡이며 응수했다. 그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이런 자가 두 사람 더 숨어 있다고 했지?
시간을 끌수록 불리하다. 상대의 노련한 경험은 싸움이 익숙해질수록 돌파구를 찾을 가능성이 크다. 그전에 어떻게든 끝장내야 한다.
신형이 엉키는 순간 비천광존이 손에 쥔 비륜으로 그의 목을 베어왔다.
‘저 비륜만 어떻게든 깨트리면!’
이대로 시간을 보낼 수 없다는 생각에 주석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혼군의 내력 전부를 손에 집중한 다음 혼천십팔지를 이용해서 비륜을 정면으로 상대했다.
그는 상체를 숙이며 비륜을 흘린 다음 혼천십팔지로 비륜을 타격했다. 손가락 끝에서 지강의 폭풍이 비륜을 강타했다.
푹- 푹- 푹-
혼천십팔지가 비륜을 꿰뚫었다. 흑검소의 검강으로도 흠집이 나지 않던 비륜이 전력을 다한 혼천십팔지에 구멍이 뚫린 것이다.
“허억!”
비천광존이 경악성을 터트리는 순간 비륜에 뚫린 구멍에서 금이 쭉쭉 그어졌다.
콰직-
놀랍게도 비륜이 깨졌다. 주석하의 엄청난 내력으로 공포의 비륜이 무력화됐다.
손에 든 비륜이 깨지는 순간 비천광존은 공격을 전환했다. 지금 같은 근접전이 계속되면 불리함을 인지한 것이다.
주석하가 혼천십팔지를 마무리하기도 전에 비천광존이 주석하의 목을 움켜잡았다.
“커윽!”
예상치 못한 공격에 주석하는 신음을 토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의 등에 미로의 석벽이 닿았다.
당하고만 있을 주석하는 아니었다. 그도 동시에 상대의 목을 움켜잡았다. 이런 식의 싸움은 내공 대결로 이어짐을 주석하는 이미 숱하게 경험한 바 있었다.
서로가 목을 움켜쥔 가운데 비천광존이 주석하를 벽에 밀어붙인 상황이 펼쳐졌다.
위이이잉-
그때 비륜이 날아오는 소음이 들려왔다.
순간 주석하는 여전히 비륜 두 개가 날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상황은 위험하다!
비천광존이 고개를 옆으로 숙이는 순간 난데없이 비륜이 주석하의 머리를 찍었다.
콰직!
주석하의 임기응변도 빨랐다. 가까스로 고개를 틀자 바로 옆으로 비륜이 스쳐 지나가며 석벽에 박혔다. 석벽이 크게 진동하면서 돌가루가 우수수 떨어졌다.
남은 하나의 비륜이 측면에서 날아오고 있었다.
위이이잉-
그의 허리를 겨냥한 비륜을 지금처럼 비천광존에게 억눌린 자세에서는 피할 재간이 없었다.
비천광존이 비릿한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넌 끝이다!”
주석하의 목을 조르며 벽으로 밀어붙이는 압력이 더욱 강해졌다. 주석하는 꼼짝하기 힘들었다.
위이이잉-
순식간에 비륜이 지척까지 날아왔다.
위기의 순간 주석하는 염군의 내력을 끌어올렸다. 대거 소모된 혼군의 내력이 염군으로 대체되면서 새로운 활력이 솟구쳤다.
주석하는 상대의 목을 잡은 채 몸을 비틀었다.
갑자기 주석하의 힘이 강해지자 비천광존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벽에 붙어 있던 주석하는 몸을 옆으로 빼내면서 날아오는 비륜 앞으로 비천광존의 몸을 밀어 넣었다. 비천광존의 몸이 방패가 된 것이다.
서걱-
“크윽!”
미처 속도를 죽이지 못한 비륜이 여지없이 비천광존의 허리를 파고들었다.
비륜의 위력은 강했다. 비천광존의 호신강기를 한방에 깨트리면서 허리마저 잘랐다.
“크으으, 이, 이럴 수가…….”
주석하를 얕잡아 본 것이 실수였다. 주석하의 나이가 어리기에 그의 내공이 별것 아니라고 생각한 실수가 컸다. 주석하의 힘이 갑자기 폭발적으로 증가할 줄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 대가는 죽음이었다.
허리가 잘린 채 폭포수처럼 피를 쏟으며 비천광존이 쓰러졌다. 죽음의 그림자가 얼굴을 덮고 있었다.
“이, 이…….”
뭔가 말하고 싶었던 듯 손을 뻗으며 몸부림치던 비천광존이 마침내 잠잠해졌다.
주석하는 깨진 비륜과 석벽에 박힌 두 비륜을 확인하고 가까스로 숨을 돌렸다. 이기긴 했지만 타격도 만만찮았다. 내력 소모가 컸고 온몸이 상처투성이다.
이대로 다른 정파십존을 상대할 수 있을까.
일단 미로에서 벗어나야 한다. 주석하는 지금까지 경험한 미로의 구조를 떠올리며 생문을 찾기 시작했다.
**
변한 진법과 미로 때문에 도중에 고생하긴 했으나 그 과정에서 주석하는 간신히 진법의 휴문(休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진식 속에서 휴문은 생문 다음으로 안전한 곳이다. 다만 진법은 계속 변화를 일으키기에 이곳의 휴문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누구도 모른다.
“잠시만 쉴까.”
주석하는 피곤함을 억누르며 석벽 한쪽에 몸을 기댔다.
너무 과욕이었나. 수백 년에 걸쳐 명성을 쌓아온 제갈세가를 너무 얕잡아 본 건가. 때아닌 후회가 밀려왔다. 하지만 훗날 제갈휘를 상대한다고 하여 상황이 나아지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제갈휘가 그가 아닌 흑검문을 압박한다면 정말 난감해지니까. 또 그의 실체가 밝혀질수록 제갈휘는 더 골치 아픈 대책을 세울 테니까.
차 한잔 마실 시간이 흐르기도 전에 다시 미로가 변화를 일으켰다.
우우우웅-
눈앞의 석벽이 움직이고 갑자기 넓은 광장이 생겨났다. 물론 그 광장은 사방으로 석벽이 둘러싸고 있었다.
광장의 저편에 우뚝 서 있는 두 인영을 보는 순간 주석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처음 보는 인물이건만 그 기세가 예사롭지 않다.
“십존?”
그의 질문이 떨어지자마자 바로 반응이 되돌아왔다.
“살존이다!”
“만겁묵존이다!”
하북팽가의 살존과 만겁묵존이 앞에 진을 치고 있었다. 예상보다 빨리 나타난 두 사람의 기세에 주석하는 한숨을 토했다.
광존을 처리하자마자 다시 둘이 나타났다. 아직 내력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기에 이번에도 쉽지 않은 싸움이 되리라.
“과연 대단하구나! 무려 광존을 처리하다니!”
두 사람의 기운이 주석하를 강하게 압박했다. 역시 정파십존은 다르다.
이제 저들은 그를 얕잡아 보지 않을 것이다. 주석하가 패존과 광존을 죽였다고 확신한 이상 저들은 연합하여 최선을 다할 것이다. 생사를 건 처절한 싸움이 벌어지는 이런 식의 전개는 주석하에게 불리했다.
주석하는 흑검소를 들고 그들 앞에 우뚝 섰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모두 셋이라 했으니 이 둘을 처리하면 끝나니까.
“정의의 이름으로 네놈을 처단한다. 무림을 어지럽히고 강호를 도탄에 빠트리는 어리석은 자여! 순순히 목을 내놓아라! 그러면 흑검문만은 살려주겠다!”
“흑검문?”
“사악한 마두에게 베푸는 마지막 자비일지니.”
“미친놈들!”
“악인은 본인이 악인임을 모르는 법이다! 회개하라!”
눈빛을 주고받던 살존과 만겁묵존이 좌우로 흩어졌다. 그들의 위협을 깨트리고자 주석하는 흑검소로 검강을 곳곳에 뿌렸다. 흑검문이 언급된 이상 그도 이들을 살려줄 생각이 사라졌다.
“약해!”
살존의 외침과 동시에 묵직한 패도가 주석하의 머리 위로 날아왔다. 주석하는 흑검소를 들어 도를 막았다.
콰앙!
도강이 흑검소의 중앙을 강하게 후려치자 순간의 압력을 이기지 못한 주석하의 몸이 휘청했다. 그 순간 뒤에서 강력한 권풍이 엄습했다.
만겁묵존의 일 권이 등의 사혈을 칼처럼 찔러왔다. 주석하는 휘청거리는 몸을 옆으로 눕히며 재빨리 흑검소로 대항했다.
뻐벅!
만겁묵존의 일 권이 흑검소를 강타하는 순간 커다란 충격파가 주석하를 휩쓸었다.
흑검소를 회수하려던 주석하는 당황했다. 찰나의 순간에 만겁묵존이 흑검소를 손으로 붙잡았다. 만겁묵존의 손에서 일어난 강기와 흑검소에서 뿜어지는 강기가 서로 부딪히며 굉음을 터트렸다.
어쩔 수 없이 주석하는 흑검소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힘을 가했다.
연이은 충격에 주석하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과연 두 사람의 합공은 한 사람일 때와 그 위력이 판이했다.
재차 숨을 쉴 틈도 없이 살존의 강력한 패도가 허공을 갈랐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압력이 패도와 함께 내리꽂혔다. 잡힌 흑검소 때문에 주석하는 몸을 피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묵존과 살존의 교묘한 연합 공격이었다.
‘젠장! 잘못 걸렸다!’
예상치 못하게 흑검소를 포기해야 할 상황에 멈칫하는 순간 붉은빛이 살존의 패도를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