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정파십존 (4)
콰아앙!
어마어마한 충격파가 광장을 휩쓸었다. 사방을 강타하며 석벽을 뒤흔든 충격파가 다시 반사하며 그들을 덮쳤다.
주석하는 입을 쩍 벌렸다. 그도 광존과 격투를 벌였었지만, 그 파장이 이렇게 거세진 않았다. 살존이 내력을 얼마나 도에 실었는지 명확히 입증되는 순간이었다.
그런 살존의 패도를 감히 이 세상에 누가 있어 맞받아칠 수 있단 말인가.
살존은 패도를 움켜잡고 반발력에 밀려 수 걸음을 뒤로 물러났다. 흑검소를 붙잡았던 만겁묵존 역시 포기하고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주석하는 그 충격파를 온몸으로 받으며 눈을 부릅떴다.
예상치 못한 인물이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우설금! 홍의를 입은 우설금이 붉은 바탕에 분홍빛 모란꽃이 새겨진 홍철산(紅鐵傘)을 들고 살존을 노려보고 있었다. 살존의 강력한 패도를 막은 것은 우설금이 손에 쥔 비단 우산이었다.
“다, 당신이 어떻게?”
주석하를 고개 너머로 힐끗 본 우설금이 환한 미소를 뿌린 후 다시 살존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주석하는 항상 싸늘한 표정만을 짓던 우설금의 예기치 않은 미소에 넋이 나갔다.
“넌…… 또 뭐냐?”
살존이 인상을 콱 찌푸리며 우설금을 노려봤다.
방금 살존이 주석하를 노린 패왕천살도(覇王天殺刀)는 전력을 쏟아부은 회심의 일격이었다. 주석하가 반격하기 전에 단 일 초식으로 끝내고자 한 최강의 수였다. 광존을 죽인 주석하의 무공이 심상치 않음을 알고 변수를 최대한 없애기 위해 일격필살을 노렸다.
사실상 살존의 마지막 무공이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그 무공을 막은 자가 있었다. 그것도 나이 어린 소녀였다!
살존은 우설금의 기세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고수다!”
그는 중원에 이처럼 어린 여자가 정파십존에 육박하는 무공을 지니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없었다. 직접 경험하지 않았다면 거짓이라고 일축했을 것이다.
만겁묵존 역시 사태가 이상하게 돌아감을 깨달았다. 십존의 무공에 근접한 새로운 강자가 등장했으니 이 싸움의 수적 우위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렇다고 패하리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으나 어쨌든 예상과 다르게 흐르고 있었다.
살존과 만겁묵존이 노려보는 가운데 우설금은 대답 없이 주석하의 옆에 섰다.
“고생 많았어요.”
방금 보였던 그녀의 미소는 어느새 사라졌으나 예전만큼 싸늘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도우러 왔죠.”
“그게 무슨…….”
“어차피 중요하지 않잖아요? 저들부터 처리하죠.”
우설금이 왜 그를 도와주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으나 아무려면 어떤가. 마침 저들을 맞아 곤란에 처한 터에 도움을 뿌리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보아하니…… 상처가 심하네요?”
“아직 괜찮습니다.”
“그럼 측면 지원해봐요. 내가 상대할 테니.”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우설금이 신형을 날렸다. 허공에서 홍철산이 펼쳐져 빙글 돌자 강기의 파편이 살존과 만겁묵존에게 날아갔다.
파- 파- 파- 파-
우설금의 공세에 살존과 만겁묵존은 당황했다. 예상치 못한 방식의 공격이다. 살존은 도를 이용해 강기의 공습을 막았고 만겁묵존은 신형을 미끄러트리며 홍철산의 강기 파편을 피했다.
순간 홍철산에 가려졌던 우설금의 일장이 만겁묵존의 가슴을 강타했다.
콰앙-
만겁묵존의 호신강기가 박살이 나면서 뒤로 주르륵 밀렸다. 예상치 못한 강공에 놀란 살존이 패도를 휘두르며 만겁묵존을 지원했다.
다시 패도가 우설금의 홍철산과 부딪히며 충격파가 사방의 석벽을 강타했다.
눈앞에서 날아다니는 우설금의 놀라운 공세에 주석하는 새로운 무공의 경지를 접하는 느낌이었다. 얼핏 보면 평범해 보이는 공격을 살존과 만겁묵존이 비틀거리며 근근이 방어하는 것을 보면 그녀의 파괴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적어도 그녀는 정파십존 두 사람을 감당할 능력이 충분했다.
‘마교수호사령이라 했었나?’
주석하는 마교에 대한 두려움에 머릿속이 저릿저릿했다.
머뭇거릴 때가 아니었다. 아무리 우설금이라지만 정파십존 둘을 계속 압박하기란 쉽지 않다. 주석하는 흑검소를 들고 악군의 내력을 끌어올렸다. 이곳에 들어온 후 혼군의 내력과 염군의 내력을 상당히 소모했으나 아직 악군의 내력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었다.
흑검소 주변에 하얀빛이 어리자 주석하는 천무태평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맑은 퉁소 소리가 광장을 메웠다. 그 소리는 강기의 파편으로 바뀌어 적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난데없는 음공의 공습에 살존과 만겁묵존은 당황했다. 예상치 못한 악군의 절기에 대응이 쉽지 않았다. 거세진 홍철산의 공격을 방어하기 급급한 상황에서 음파를 타고 밀려오는 강기 파편은 목숨을 노리고 있었다.
주석하의 도움을 받자 우설금의 움직임이 더욱 빨라졌다. 홍철산이 빙글빙글 돌면서 강기를 뿌렸고 홍철산의 끝부분이 검처럼 허점을 파고들었다.
주석하는 천무태평악이 제대로 먹힌다고 판단하자 더욱 연주에 집중했다.
견디다 못한 살존의 패도가 용트림했다. 만겁묵존 또한 사자후를 터트리면서 홍철산을 향해 장력을 밀어붙였다.
살존과 만겁묵존은 어디에서 이런 엄청난 여인이 나타났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놀랍게도 이 여인이 펼치는 무공은 산전수전 다 겪은 그들도 처음 접하는 신비로운 무공이었다. 우산을 무기로 사용하는 패도적인 무공을 들어본 기억이 없었다.
콰아앙!
패도가 홍철산을 직격하면서 발생한 충격파가 석벽을 휩쓸었다. 그 순간 천장에서 암기가 우수수 쏟아졌다. 세 사람은 살수를 날리면서 암기를 피해 다녔다.
주석하가 펼친 음공이 두 사람을 점점 옥죄자 살존은 이 상태로는 절대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초식 면에서도 내공 면에서도 주석하와 우설금이 압도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불리하다고 느낀 살존은 마지막 승부를 걸기로 했다. 그는 만겁묵존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당장 우설금을 어찌할 방법이 없으니 애초의 목적대로 주석하에게 총력을 기울이자는 뜻이다. 설사 그들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더라도 주석하만 죽인다면 목적을 달성한 것이니까. 그것은 의로운 죽음이다. 나머지는 제갈휘가 알아서 처리해 주리라.
살존의 비장한 결의를 만겁묵존도 읽었다. 만겁묵존은 승낙을 표시하자마자 곧바로 주석하를 향해 공세를 퍼부었다. 우설금의 공격을 도외시한 목숨을 건 도박이었다.
갑자기 변한 공세에 우설금이 멈칫하는 순간 살존 역시 패도를 앞세워 주석하를 향해 뛰어들었다.
살존의 패왕천살도가 다시 펼쳐져 주석하를 뒤덮었다. 동시에 만겁묵존의 장력이 주석하에게 태풍처럼 쏟아졌다.
두 사람 모두 목숨을 아끼지 않고 오로지 주석하를 죽이기 위한 최후의 절초를 펼쳤다.
열심히 천무태평악을 불던 주석하는 밀려드는 공세에 당황했다. 지금 그에게 쏟아지는 공격은 호신강기로 해결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위력을 품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저 공격을 받아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불던 퉁소를 검으로 전환하기에도 이미 늦었다.
“성공이다!” 살존의 흡족한 광소가 주석하를 절망으로 빠트렸다. 이제는 주석하가 무슨 수를 쓰더라도 살존과 만겁묵존의 공격을 동시에 막을 수 없는 상황으로 빠졌다.
안색이 새하얗게 변한 우설금이 급하게 소리쳤다.
“안 돼!”
순간 주석하의 몸이 허공으로 반등했다.
죽음을 앞두고 절정의 화판답공이 전개되며 허공을 수놓았다. 지금 그가 펼치는 보법은 이전에 그가 선보인 화판답공과는 다른 차원의 경지였다.
마치 이형환위가 접목된 것처럼 그의 신형이 지워지며 허공에 나타났다. 허공에 뜬 그의 신형은 한 송이 꽃잎처럼 바람에 나부끼며 자유롭게 허공을 떠다녔다.
산악을 품은 패존의 도가 그를 덮쳤으나 흩날리는 꽃잎이 베어질 리 없었다. 주석하의 신형이 패도에 자연스럽게 밀리면서 공간을 벌렸다. 만겁묵존의 장력이 그를 덮치는 순간에도 비슷한 반응이 나타났다.
주석하는 장력에 휘말리면서도 전혀 타격을 받지 않고 자연스럽게 허공을 떠다녔다.
지금 이 순간 주석하는 화판답공의 묘리를 깨우쳤다. 화판답공과 천무태평악이 합쳐졌을 때 상대의 공격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무력화하고 얼마나 효율적인 공세를 취할 수 있는지 깨달았다. 이제야 화존과 악군의 무공 본질을 제대로 이해했다는 확신을 품게 됐다.
휘익-
살존과 만겁묵존의 최후 절초는 주석하에게 아무런 타격을 미치지 못하고 허공만 갈랐다.
“이럴 수가!”
두 사람이 경악하는 순간 그들의 눈앞에 붉은 그림자가 쏘아져 들어왔다.
허공에 뜬 주석하는 우설금의 움직임에 눈을 뗄 수 없었다. 상대의 허점을 놓치지 않는 일격이었다.
붉은 꽃이 바람에 우아하게 흩날린다!
그녀의 움직임은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했다. 그녀는 붉은 우산을 쓴 선녀였다. 홍철산이 돌아가고 그녀의 붉은 옷이 허공에 펄럭였다. 마치 선녀가 하강하는 장면을 연상케 했다.
우설금의 동작은 부드러웠으나 그녀의 몸놀림은 경쾌하면서도 빛처럼 빨랐다. 홍철산에서 뿌려지는 붉은 강기가 천지를 뒤덮고 살존과 만겁묵존을 감쌌다.
우설금의 섬뜩한 선언이 두 사람을 강타했다.
“단천(丹天)의 기운이 하늘에서 쏟아지니!”
쐐애액-
하늘을 가르는 뇌전이 살존과 만겁묵존을 향해 폭사했다.
“천하의 마가 경배하리라!”
콰아아앙!
살존은 다급하게 패도로 전신을 방어하며 날아오는 강기를 갈랐다. 만겁묵존은 두 손을 앞으로 뻗어 호신강기의 벽을 쌓았다. 하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들의 신형을 꿰뚫은 홍철산의 강기가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을 일으키며 터져나갔다.
광장이 붉은 기운으로 덮이고 천하가 붉게 변했다. 폭사하는 강기는 살존과 만겁묵존의 몸을 갈기갈기 찢으며 관통했다.
“으아아악!”
긴 비명이 수십만 가닥으로 쪼개지는 강기의 파편에 실려 광장을 메웠다. 그 충격파는 광장의 측벽을 여지없이 허물며 미로의 일부를 박살냈다.
서서히 붉은 기운이 내려앉았다.
주위가 진정되었을 때 주석하는 여전히 허공에 뜬 채 우설금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무공일까? 한순간에 살존과 만겁묵존을 동시에 저 세상으로 보내버렸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살존과 만겁묵존의 육신은 찾아보기도 어려웠다. 완전히 피떡이 되어 광장 곳곳에 육편이 흩어져 있었다. 정파십존의 최후라 하기에는 너무 허망했다.
질린 표정으로 주석하는 우설금을 살폈다.
평소처럼 싸늘한 기운을 뿜으며 우설금은 홍철산을 펼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의식한 것일까. 우설금이 홍철산을 접으며 주석하에게 미소를 보냈다. 그 아름다운 표정이 방금 전개된, 선녀가 하강한 듯한 초식 장면과 함께 주석하의 가슴에 깊이 새겨졌다.
“악군의 무공이군요?”
우설금이 질문을 던졌을 때 주석하는 보법을 거두고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왔다.
“도,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돌이켜보면 우설금이 도와주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게다가 그녀가 이렇게 강하리라고도 생각지 못했다. 그녀가 정파십존에 비해 뒤떨어진다고 평가하진 않았으나 그들을 한참 뛰어넘으리라고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무공 수위도, 그녀의 행동도, 나아가 그녀의 외모도 모두 뜻밖이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정신을 차리기 힘들 만큼 오늘 우설금의 움직임은 충격 그 자체였다. 대체 우설금은 누구란 말인가. 어떻게 이렇게 젊은 나이에 마교수호사령으로 등극했을까.
그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자 우설금이 본래의 싸늘한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다쳤어요?”
주석하는 고개를 저었다.
“얼른 이곳을 나가야 해요.”
그녀의 재촉에 주석하는 주변을 둘러봤다.
광장은 대부분 파괴되고 광장에서 뻗은 미로는 무너진 벽으로 입구가 막혔다. 천장은 곧 무너질 듯 위태위태했고 바닥은 격전의 여파로 석판이 갈라지고 패어있었다. 폐허가 따로 없었다.
얼핏 보면 기관진식이 완전히 파괴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여전히 건재하다. 이 광장을 벗어나는 순간 제갈세가에서 설치한 절정의 진법이 그들을 노리고 작동할 것이다.
상황을 인지한 주석하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