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상춘원 미로 (1)
상춘원에서 울려 퍼지는 어마어마한 굉음과 충격파에 제갈휘는 혼백이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이 굉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도 짐작했다. 비천광존, 살존, 만겁묵존을 투입하면서 제갈휘는 한 시진의 시간을 강조했었다.
주석하를 발견하면 무조건 최선을 다해 빨리 죽이라고. 한 시진 후면 상춘원의 미로가 죽음의 절진으로 바뀌니까. 이는 작전 실패를 대비한 최후의 안배다.
당연히 정파십존 세 사람은 비웃음을 터트렸다. 한 시진이라면 주석하 정도를 적어도 세 번 죽일 수 있다고. 그렇게 호언장담하고 상춘원에 잠입했다.
정파십존의 장담대로였다면 이미 모든 일이 끝나야 했다. 지금은 그들 세 사람이 이곳에 돌아오고도 남을 시간이다.
하지만 아직도 감감무소식이다. 주석하의 무공으로 보아 그렇게 빨리 끝내기 쉽지 않으리라 예상했지만 아직도 돌아오지 않으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어디에서 틀어졌을까?”
계획은 완벽했다. 그 완벽을 더하려고 무려 셋이나 투입했다. 설사 주석하의 능력이 예상치의 두 배에 육박하더라도 살아남을 수 없다. 예상 능력의 두 배는 무신의 경지이니 주석하가 도달 가능한 수준이 아니었다.
“이건 말이 안 되잖아…….”
미로에서 정파십존은커녕 주석하도 빠져나오지 못했다. 지금 미로 내부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양패구상인가? 주석하 하나를 처리 못 해 무려 세 지존이 발이 묶였다고?
제갈휘는 주먹을 꽉 쥐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어쩔 수 없다. 이제 정파십존 세 사람의 목숨을 도외시하고 죽음의 절진을 가동해야 한다. 그게 계획이니까. 주석하가 정파십존 세 사람을 쓰러트렸을 때를 대비한 최후의 안배였다.
제갈휘는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상춘원을 비추는 별무리는 아름다웠다.
정확히 한 시진이 지났다.
쿠쿠쿵-
상춘원에서 굉음이 울리며 전각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상춘원을 둘러싼 호숫물이 거대한 소용돌이를 그리며 회전했다.
그 누구도 빠져나올 수 없다는 제갈세가의 회심의 역작이 가동됐다. 이제 저곳은 거대한 무덤이 될 것이다. 주석하의, 또 비천광존, 살존, 만겁묵존의.
“하아!”
제갈휘는 한숨을 내쉬었다. 무려 정파십존 가운데 셋을 이곳에 묻었으니 앞으로 흑도팔군과의 균형을 어떻게 맞출까. 머리가 지근지근 아팠다.
제갈휘가 호수에 가라앉은 상춘원을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콰아앙!
뒤쪽에서 엄청난 굉음이 울렸다.
“어? 뭐지?”
계산에 없던 폭음에 제갈휘는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와르르르-
전각 하나가 통째로 무너지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제갈휘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저곳은 작전과 전혀 관련 없는 곳이었으니까.
“어떤 놈이!” 제갈휘의 눈에 무너진 전각 위에 우뚝 선 한 인물이 보였다. 어둠 속에서 그를 향해 오시하고 있는 자였다. 녀석의 몸에서 뻗어 나오는 진기가 사방으로 뿌려지며 제갈휘마저 압박했다.
정파십존에도 흑도팔군에도 저런 기를 뿌리는 인물은 없었다.
순간 제갈휘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저 이상한 인물의 정체가 머릿속을 강타했다.
“마교!”
놀라 소리치는 순간 맞은편 전각에서 두 사람이 솟구쳤다. 자하검존과 창궁무존! 정파십존 두 사람이 순식간에 나타난 마교의 마두를 포위했다.
“마교가 갑자기 왜?”
도무지 풀 수 없는 의문이었으나 지금 고민할 여유는 없었다. 일단 저놈을 잡아야 했다. 아니면 최소한 추가 피해를 보지 않도록 수를 써야 했다.
애초의 계획은 자하검존과 창궁무존을 상춘원 주변에 배치하여 만일 주석하가 기진맥진한 채로 미로를 뚫고 나오면 잡을 수 있도록 안배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계획이 문제가 아니었다.
비상사태다.
제갈휘도 마교인을 향해 재빨리 신형을 날렸다. 이미 그의 머리에서 주석하는 지하미로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마침표를 찍었다.
**
주석하는 우설금과 함께 미로를 떠돌았다.
어느 순간 커다란 진동이 일면서 미로의 지형이 완전히 바뀌었다. 이제는 그가 익혔던 진법이 아니었다. 그 진법보다 훨씬 복잡한 이상한 기관진식으로 전체 미로가 탈바꿈했다.
“기관진식을 아세요?”
답답해진 주석하는 우설금을 돌아보았다.
우설금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대체 이 여자는 무엇을 믿고 상춘원에 들어온 걸까? 주석하는 새삼 떠오르는 의문을 해결할 수 없었다.
우설금은 평소처럼 딱딱한, 굳은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주석하는 그 분위기가 확실히 바뀌었음을 느꼈다. 과거에 그를 향해서 뿌리던, 차갑고 싸늘한 기운이 꽤 엷어졌다.
이 여인에게 이런 면모가 있으리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다.
“아무래도 제갈휘가 새로운 안배를 해놓은 듯해요. 정파십존이 모두 죽으면 새로운 기관진식이 작동되는. 이 진법은 저도 전혀 몰라요. 빠져나가기 쉽지 않겠네요.”주석하는 침울한 표정으로 상황을 털어놓았다. 당연히 예상했다는 듯 우설금의 안면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내 말…… 알아들었어요?”
우설금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우우웅-
쿠르르르-
다시 굉음이 울리고 석벽이 진동했다.
놀랍게도 바닥으로 물이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이곳이 상춘원 지하이고 상춘원이 호수 중앙에 지어져 있었으니 침수 사실이 그리 놀랍지는 않지만…….
“젠장, 벽이 깨져 상춘원이 물에 잠겼나 봐요.”
“…….” 다시 우설금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른 빠져나갈 방법을 찾아야 해요!”
주석하는 우설금에게 눈짓으로 따라오라는 의사를 표시하고 미로를 빠르게 달려갔다.
기관진식의 원리는 비슷하다. 단지 그 세부 배치가 다를 뿐. 기관진식은 여덟 개의 문이 근간을 이룬다. 바로 생(生), 상(傷), 휴(休), 두(杜), 경(景), 사(死), 경(驚), 개(開)가 기초다.
제갈세가가 설치한 절진도 이 기본 원리를 벗어날 수 없다. 주석하는 생문과 휴문을 찾아 미로를 떠돌았다.
얼마나 돌아다녔을까.
대체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감이 오지 않았다. 밤이 끝나고 아침이 되었는지 아니면 하루가 지났는지 감각이 없었다.
미로 곳곳에 설치된 기관에서 각종 위험이 그들을 덮쳤다. 두 사람은 고수인지라 쉽게 당하지 않았으나 꽉 막힌 석벽 사이에서 암기가 언제 튀어나올지 모를 위험에 대비하느라 정신적인 피로가 대단히 컸다.
그동안 바닥의 물이 점점 차올랐다. 이제는 무릎 높이를 넘어섰다. 미로에 물이 차면서 그들의 움직임도 제약을 받았다.
간신히 휴문을 찾아 주석하는 쉴 공간을 마련했다. 석벽 사이로 움푹 들어간 작은 공간이었다. 아직 그곳에는 물이 차지 않아 두 사람은 그 공간 속에 나란히 앉았다.
“안 힘들어요?”
우설금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석하는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에 당황한 그림자가 비쳤다.
“말할 줄 몰라요? 예전에는 잘만 하더니.”
“말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해요.”
그때야 우설금이 한마디 대답했다.
그랬던가? 생각해보니 딱 필요한 말 이외에는 거의 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고. 사실 지금은 딱히 말이 필요한 순간이 아닌 것 같긴 한데…….
“여기 물이 다 차면…… 우린 물에 빠져 죽을지도 몰라요. 겁 안 나요?”
우설금이 고개를 저었다. 겁이 안 난다는 뜻이다.
“아무리 무공이 고강해도 빠져나가기 쉽지 않은데요? 무공이 강하다고 죽음이 천천히 찾아오진 않아요.”
이건 주석하가 최근 들어 느끼는 진실이다. 전생에서 죽음을 경험했던 그는 과거보다 훨씬 무공이 강해진 이번 생에는 훨씬 편하고 길게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을 보면 오히려 강해진 무공이 더 죽음을 재촉하는 것 같다. 오늘 상황을 따져 보면 그뿐만 아니라 우설금까지.
어쨌든 오늘 우설금과 함께 있다 보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신기하게도 사라졌다.
“……죽으면 어쩔 수 없죠.”
마치 삶을 달관한 듯한 우설금의 반응에 주석하는 약간 충격을 받았다. 그녀의 태도는 마치 죽음을 앞둔 노인처럼 느껴졌다. 아니, 죽음이 임박할수록 사람은 더 삶에 집착하는 법이 아니던가.
“지금 이곳은 휴문이에요. 그래서 잠시 진식의 움직임이 멈춘 거죠. 다시 진법이 가동되고 문의 위치가 이동하면 이곳도 언제 다시 사문(死門)이 될지 몰라요. 아, 그전에 물이 먼저 차오르려나?”바닥에서 물이 급속히 차오르고 있었다. 저 물이 이 공간을 채울 시간은 그리 오래지 않을 것이다. 얼른 이보다 더 높은 곳을 찾아야 하는데 기관 자체의 구조를 모른다. 진법이 깔린 이곳에는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니 빠져나갈 방법이 막막했다.
“현재로 봐선 마땅한 방법이 없어요. 묘책 있어요?”
우설금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주석하는 결심을 굳혔다.
“일단 진법이나 풀어보죠. 조금 지나면 진법이 변화를 일으키며 각 문의 위치가 바뀔 거예요. 우리는 그 순간을 노려 더 안전한 곳으로 이동할 겁니다. 아셨죠?”주석하는 대충 계획을 설명하고는 자리에 앉은 김에 흑검소를 들었다. 멍하니 바닥에 차오르는 물을 보고 있으면 괜히 심란할 것 같아 음악을 연주하기로 했다.
주석하는 내공을 주입하지 않은 상태로 천무태평악을 연주했다. 서글픈 음률이 미로를 메웠다.
우설금은 조용히 천무태평악을 듣고 있었다. 가끔 그녀는 아미를 찌푸렸다가 입술을 깨물었다가…… 음악에 심취한 듯했다.
곡 연주를 마친 주석하는 그녀에게 물었다.
“이 곡 알아요?”
우설금이 고개를 끄덕였다. 곡 자체를 악군이 지은 것은 아니기에 안다고 하여 이상하진 않다.
“뜻도?”
“헤어진 연인의 마음을 달래는 슬픈 곡이죠.”
“그럼 방금 싸울 때도 알았겠네요.”
우설금의 입가에 슬그머니 미소가 감돌았다.
주석하는 오늘만 우설금의 미소를 두 번째 본다. 예전에 보지 못하던 미소이기에 그만큼 더 특별하게 느껴졌다. 그녀가 웃을 때면…… 천하절색이란 말이 실감이 된다. 천상삼화라는 남궁설란이나 백화령을 봤지만 그에게는 우설금 만큼 아름답지 않았다.
왜인지는 딱히 설명하기 힘들었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의 붉은 옷차림이, 그녀가 머리에 맨 붉은 머리띠가 너무 인상적이기 때문일까. 그 느낌이 그의 눈에, 그의 머리에, 그의 가슴에 깊이 박혀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우설금은 왜 평소에 싸늘한 기운을 뿜어내고 말수가 적은 걸까. 마교도라서? 해답 일부는 될 수 있지만 정답은 아니다. 주석하는 그녀의 이력이 궁금해졌다.
하지만 물어볼 용기는 없었다. 아직 그녀는 그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힌 적이 없으니까. 그가 알아낸 모든 것은 뇌군이 알려준 정보뿐이었다.
시간이 되었다고 느낀 순간 주석하는 몸을 일으켰다.
“이제 떠나야 해요. 이곳은 곧 사문으로 바뀔 거예요. 우리는 저쪽으로 가서…….”
미로의 저편을 가리키던 주석하는 난감해졌다. 통로 대부분이 물에 잠겨 그들이 내려서면 이젠 허벅지까지는 물에 잠길 것이다.
그야 상관없지만 여자인 우설금은 좀 난감한 상황인가?
주석하가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을 때 그의 뜻을 이해한 우설금이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죠.”
주석하는 미로로 내려섰다. 몸의 거의 절반이 물에 잠겼다. 그를 따라 우설금 또한 바닥에 내려섰다. 그녀의 옷 일부가 물에 둥둥 떴다.
주석하는 우설금이 따라오는 것을 확인하면서 전진했다.
슈슈슉-
천장에서 암기가 쏟아졌다. 대부분 호신강기에 막혀 떨어졌고 강기를 뚫고 들어올 놈은 흑검소로 쳐냈다. 우설금은 홍철산을 펼쳐 가볍게 암기 세례를 튕겨냈다.
이 미로를 빠져나갈 방법은 무엇일까. 안전한 곳으로 일단 피하고 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