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상춘원 미로 (2)
바닥에서 불어나는 물이 점점 차올랐다.
주석하는 다시 안전한 곳에 도착해서 벽을 뚫고 한 공간에 머물렀다. 달리 마땅한 쉼터가 없어 천장에 가까운 석벽을 뚫고 벽 사이에 걸터앉았다. 궁여지책이다.
이제는 미로를 걸어가려면 가슴까지 물에 잠겼다. 이미 두 사람은 여기까지 오는 동안 옷이 완전히 젖었다. 주석하는 짙은 흑의였고 우설금은 붉은 홍색이었기에 물에 젖어도 몸이 비쳐 보이는 일은 없었다. 다만 물에 젖은 옷이 몸에 달라붙어 우설금의 몸의 굴곡이 제법 뚜렷하게 드러난 점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여전히 조용히 물만 바라보는 우설금을 향해 주석하는 나지막이 물었다.
“아무래도 빠져나가기 쉽지 않을 듯한데…… 소감이 어때요?”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그녀의 시선은 흐르는 물에 머물러 있었다.
답이 없으니 주석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런 상황에서 침묵을 지키면 마음이 더 착잡해질 뿐이다.
“난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솔직한 심정이었다. 이미 한 번 죽었었기에 지금의 삶은 덤이라고 생각하니 별달리 욕심이 나지 않았다. 다만 남아 있는 아버지와 누이동생이 조금 걱정되긴 했지만.
전생에서는 적혈방 침입 때 두 사람이 죽었기에 그런 걱정이 없었는데.
“당신은요?”
멈칫하던 우설금이 어렵게 목소리를 냈다.
“난…… 예전부터 목숨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어요. 다만 원수를 갚지 못하고 죽게 되어 아쉬울 뿐이죠.”
“원수요?”
“네.”
“원수가 누군데요?”
우설금은 미소를 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죽는 것이 두렵지 않아서 이런 상황에서도 별다른 동요가 없나. 그만큼 특이한 사람이라 생각하며 주석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우 소저, 사문이 어떻게 되나요?”
우설금이 무심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우설금과 뭔가 말을 터보려 했던 주석하는 또 실패했다.
주석하는 그간 몇 차례 우설금이 저지른 일을 눈치 챘었다. 화산파에 잠입해서 가적성을 죽인 일이나 곤륜십이검수를 처리한 일이나 만리안석으로 봤던 남궁세가의 혈겁이나. 지금 옆에 있는 우설금이 그렇게 잔인할 수 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더 놀라운 점은 그런 그녀가 지금 자신에게는 아무런 적의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아니 오히려 정파십존과의 대결 때 그를 도왔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자신감을 가지자.’
주석하는 단단히 결심을 굳혔다. 어차피 우설금을 의심하고 겁을 낸다면 이 미로를 탈출할 수 없다. 지금 자신이 고민하는 마지막 수단을 위해서라면 그녀를 믿어야 한다. 그녀도 마찬가지.
그녀가 그를 믿지 않는다면 어차피 이곳에서 물에 빠져 죽을 테니 지금 죽으나 나중에 죽으나 차이가 없지 않은가.
주석하는 떨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간신히 입을 뗐다.
“우 소저, 나…… 우 소저 알아요.”
우설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노려봤다.
주석하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마교수호사령, 단천마령…….” 우설금의 주위로 으스스한 마기가 뻗어 나왔다.
주석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으나 그녀에 대한 믿음을 거두지 않았다. 그녀라면 절대 그를 죽일 리 없다.
한동안 그를 빤히 쳐다보던 우설금이 천천히 기세를 누그러트렸다.
“맞아요.”
우설금이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다행히 염려하던 우설금의 반응은 드러나지 않았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 우설금이 다시 입을 닫았다.
첫 단추를 잘 끼웠으니 조금 더 도발해볼까. 이러다 괜히 죽음을 자초하는 것 아닐까.
“최근에 가적성을 죽이고 곤륜과 남궁세가를 도발한 것도 원수와 관련 있는 건가요?”
그가 말하는 순간 우설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녀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두 사람은 꽤 긴 시간 동안 서로 시선을 마주하며 말 없는 대치상황을 유지했다.
마침내 우설금이 한숨을 훅 내쉬었다.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할 수 있죠. 다 알고 있었군요. 놀랍게도.”
“그 많은 곳과 원수라니…… 상상하기 힘들어요.”
“전 중원 전부를 원수라고 생각하니까요.”
우설금의 음성이 착 가라앉았다.
그런 것이었나. 우설금의 무공 수준이라면 중원 전체를 적으로 삼아도 이상하지 않다. 그녀는 마교도이니 중원을 적대시하는 것은 당연하다.
“저도 중원인인데요? 흑검문도 중원의 문파고.”
“물론 그대라고 예외는 아니겠지요. 아직 척살 대상에 들어있지 않을 뿐.”
표정 변화 없는 우설금의 태도에 주석하는 머리카락이 삐죽삐죽 솟았다. 그래, 이 여자가 갑자기 개과천선할 리가 없다. 역시 마교인과 가까이하면 위험하다.
“그런데 죽음이 두렵지 않은 이유는?”
“더는 이 세상에서 바랄 것이 없으니까.”
우설금의 대답은 예상과 달랐다. 아직 젊은 그녀가 이 세상에서 하고 싶은 것도 이루고 싶은 것도 없다니.
“복수하고 싶은 게 아니었나요?”
“복수는…… 완수할 수 없으니까요. 난 어릴 때부터 복수해왔고…… 지금도 복수하고 있고…… 그러다 이 세상을 떠날 뿐…….”
“대체 무슨 사연이죠?”
우설금은 대답하지 않았다. 주석하는 그녀의 태도에서 알 수 없는 답답함을 느꼈다. 대체 그녀의 삶을 지탱하는 요소가 뭘까. 저렇게 의미 없는 삶을 이어가고 있으면서.
새삼 그녀가 불쌍해졌다.
그의 눈빛을 느꼈을까. 우설금은 그의 시선을 피해 미로를 차오르는 수면에 시선을 던졌다.
언제든 죽는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그렇기에 딱히 지금 죽는다고 해도 전혀 망설임이 없다. 어찌 보면 무림인으로서 매우 바람직한 태도이긴 하지만 인간으로서 절대 공감하고 싶지 않다.
“우 소저, 난…… 살고 싶어요.”
우설금의 시선이 다시 그를 향했다.
“그러니까 나를 도와줄 수 있어요?”
잠시 멍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던 우설금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살면 당신도 살 수 있어요. 그러니까…….”
“그건 상관없어요.”
정말 삶과 죽음을 달관했나? 어쨌든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주석하는 차분하게 자신의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조금 있으면 물이 미로를 꽉 채울 겁니다. 그 직전에 우리는 미로를 탈출해야 해요. 방법은 미로의 측벽을 뚫는 거죠.”
그동안 미로 곳곳을 헤매면서 주석하는 미로의 구조를 대략 가늠했다. 그가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미로를 정상적인 방법으로 탈출할 수 없다면 최외곽 벽을 깨트려야 한다. 최외곽 벽이 가장 두껍긴 하지만. 그래서 진법을 뚫고 다니면서 가장 적합한 부분을 찾아냈다.
이제는 물이 찰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제일 중요한 점은 물이 차서 미로 내부의 기관이 중지하기를 기다려야 한다. 석벽을 뚫으려면 모든 내력을 쏟아야 한다. 그 사이 기관이 공격하면 절대 무사히 탈출할 수 없다.
다른 이유도 있다. 외부의 수압 때문이다. 지금 이 미로는 호수 아래에 잠겼을 가능성이 크다. 이 상태에서 벽에 구멍이 뚫리면 외부에서 물이 밀고 들어오는 압력 때문에 절대 몸을 빼낼 수 없다. 미로 내부에 물이 가득 차야 벽을 붕괴한 후 탈출이 쉬워진다.
모든 가능성을 헤아리면서 주석하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래서 지금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다. 맞은편 석벽을 뚫어지라 쳐다보면서.
물속이기에 무공의 위력은 감소한다. 얼마나 내력을 퍼부어야 할지 감이 오진 않지만 하늘이 그를 이곳에서 죽게 내버려 두지 않으리란 확신은 있었다.
물이 불어나 벽 상단에 앉은 그들도 절반이 물에 잠겼다. 이제는 미로 바닥에 발을 디디면 얼굴만 간신히 밖으로 나오지 않을까. 지금 이 수위가 그가 참을 수 있는 최고 지점이다.
주석하는 내력을 끌어올렸다. 미로의 최외곽 석벽을 완전히 붕괴시키려면 몸속의 다섯 기운을 모두 동원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동시에 여러 심법을 운용할 능력은 그에게 없다. 심법을 이용해서 그가 제어할 수 있는 내공은 한 가지뿐. 그렇다면 모든 내력을 총동원하기 위해서는 그의 몸에 스스로 상해를 입힐 수밖에 없다. 우설금을 이용하면 아마 가능하겠지?
“저쪽 벽이 바로 미로의 최외곽 석벽이에요. 내가…… 먼저 저 석벽을 무너트릴 테니까 그때 탈출하면 돼요. 알겠죠?”
우설금이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시험부터. 주석하는 맞은편 석벽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혼군의 내력을 운용했다. 혼천신공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다음 석벽을 향해 전 내력을 쏟아부은 일장을 후려쳤다.
콰아앙!
굉음과 함께 내부에 차 있던 물이 출렁여 거대한 파도를 방불케 했다. 미로의 천장이 무너지고 사방으로 충격파가 퍼졌다.
석벽의 두께와 강도가 대략 가늠됐다. 제갈세가에서 작정하고 설치한 듯 예상을 훌쩍 뛰어넘고 있었다.
‘과연 가능할까?’
새삼 회의가 일었으나 현재 탈출할 유일한 방법이었기에 망설일 여지는 없었다.
“우 소저, 물에 뛰어들고 나면 나를 공격해봐요.”
“공격?”
“죽지 않을 만큼. 단 최대한 강하게.”
알아들었을까? 예전에 도수가 했던 짓을 우설금이 해야 한다. 우설금이 얼마나 알아들었을지 자신이 없었으나.
주석하는 아래로 뛰어내려 바닥에 섰다. 그의 목까지 물이 차올라 있었다. 이 높이라면 비록 우설금이 키가 크긴 하지만 물에 잠길 게 뻔했다.
그를 따라 우설금 또한 물에 뛰어들었다.
“지금 공격해봐요!”
우설금이 뒤에서 홍철산으로 그의 등을 쿡 찔렀다.
제법 아프게 찌른다고 했는데 혼군의 내력을 끌어올린 그에게는 간지러운 수준이다.
“그렇게 말고 제대로!”
우우웅-
갑자기 뒤에서 섬뜩한 마기가 감지됐다. 죽지 않을 만큼 최대한 강하게 공격하라고 요구했으니 아마도 이번에는…….
퍼어억!
등이 화끈거렸다. 충격은 그리 크지 않았고 소음이나 충격파도 거의 없는 수준이었다.
그게 아니라고 다시 요구하려는 순간 몸속 내부가 뒤틀렸다. 외부의 충격은 별 것 아니었지만 내부의 충격은 달랐다. 혈맥과 내부 장기에 거대한 압박이 전달됐다.
“끄아악!”
주석하는 뒤늦게 고통을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고수들의 방식은 과연 달랐다. 일종의 내가중수법. 몸을 타격할 때 외부가 아니라 내부로 기를 흘려 넣어 충격을 가하는 방식이다. 우설금의 일격이 주석하의 호신강기를 그대로 뚫고 들어와 그의 내부를 완전히 헤집어 놓았다.
어떻게 이런 공격이? 주석하는 전혀 모르는 신기한 기술에 혀를 내둘렀다. 만일 그가 우설금과 싸웠다면 정말 목숨을 건지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몸에 가해진 충격에 깜짝 놀란, 잠재한 기운이 폭발적으로 단전을 튀어나왔다.
고오오오-
제어되지 않는 내력이 주석하의 혈맥을 마구잡이로 일주천하면서 온몸이 부풀어 올랐다.
부글부글-
마치 뜨거운 불덩어리가 물에 빠진 것처럼 주변의 물이 끓어 올라 증기를 피웠다.
극심한 고통과 내력의 혼란 속에서도 주석하는 정신을 붙들었다. 이제 이 기운을 외부로 집중하면 된다.
주석하는 물속에서 굳건하게 발을 디디고 앞으로 두 손을 뻗었다. 이 순간만큼은 물속이라는 제한이 사라졌다. 눈앞의 석벽이 눈에 닿을 듯 가깝게 다가왔다.
그 석벽에 주석하는 두 손바닥을 강하게 찍었다. 체내의 다섯 기운이 동시에 석벽을 가격했다.
쉬이이익-
콰아아아아앙!
지금까지 그가 감행했던 모든 공격 가운데 전력을 쏟아부은 최강의 수법이었다.
파괴력은 컸다.
미로 전체가 무너질 듯 흔들렸고 물이 마구잡이로 진동했다. 그 충격파에 휩쓸려 두 사람은 중심을 잡기 힘들었다. 특히 단번에 내력을 대부분 소진한 주석하는 몸이 버티지 못했다.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가는 주석하의 손을 우설금이 잡았다.
그녀는 다른 팔로 주석하의 몸을 휘감아 품속에 끌어안았다. 그녀는 방금 주석하가 전력을 다해 부수려 했던 석벽을 찾았다.
안타깝게도 석벽은 허물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