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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검천하-128화 (128/273)

128화 상춘원 미로 (3)

과다한 진기 소모로 주석하는 정신을 잃은 듯했다.

우설금은 주석하를 붙잡고 익사하지 않도록 그를 물에 띄웠다. 이미 물의 높이는 그녀의 키를 넘고 있어서 그녀 또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다.

물속에서 흐느적거리면서 우설금은 어떻게든 해보려고 발버둥 쳤다. 미로의 물은 차가웠고 주석하의 몸도 점점 싸늘해졌다.

이상하게도 우설금의 눈앞에 과거 어린 시절의 장면이 명멸했다.

죽을 때가 되면 일평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고 했던가. 지금 그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지만 그녀의 곁에는 천마가 존재했다. 그녀에게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기억이 전혀 없었다.

- 네 아버지는 위대한 마교의 전사였다.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 너는 위대한 마교의 전사가 되어야 한다.

- 네 부친과 모친을 죽인 자는 중원의 정파와 사파인들이다. 반야불존이 이끄는 중원 무림인들이 비겁하게도 합공해서 네 부모를 죽였다.

- 넌 무엇을 하겠느냐? 부모의 복수를 하지 않겠느냐?

어릴 때부터 그녀의 삶의 목적은 단 하나였다. 마교의 전사가 되어 중원 무림인을 처단하리라.

- 저를 거두어 주세요. 원수를 갚고 싶습니다. 복수하고 싶습니다.

- 나를 따르라.

천마가 그녀에게 커다란 환단을 하사했다. 그녀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다만 천마가 지시하니 의심 없이 삼켰다.

그날 이후 그녀는 마공을 익혔다. 그녀를 마교 제일의 전사로 만들어줄 바로 그 마공이었다.

마공을 수련하면서 그녀는 정상적인 사람의 감정을 품지 못했다. 그녀의 모든 행동은 오로지 하나의 목표에 맞추어졌고 그만큼 빠른 성취를 이뤘다. 그럴수록 그녀의 성품은 더욱 싸늘하고 냉혹해졌다.

이런 환경에서 그녀는 어릴 때부터 인간 본연의 따뜻한 감정이라고는 경험해보지 못했다.

성장해서 홀로 설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녀는 마교수호사령이 되어 있었다. 천마의 복심이 되어 사실상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 올랐다.

단천마령(丹天魔靈). 그녀는 마교에서 그렇게 불렸다. 오직 천마만이 그녀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었고 그녀의 모든 행동은 중원 무림을 겨냥했다.

그렇게 살았다. 마교의 전사가 된 이후로 그녀는 죽음을 겁내지 않았다. 바로 지금 죽더라도 마교를 위해서라면 조금도 머뭇거릴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항상 과감했고 언제나 잔인했다.

상춘원에 잠입하면서도 죽음을 겁내지 않았다. 그녀의 목표는 하나였다. 정파십존을 해치워서 정파십존과 흑도팔군의 균형을 맞춘다. 주석하는 천마가 지켜보라고 했으니 어떻게든 살린다.

그리고 그 목적에 맞게 행동했다. 미로를 빠져나갈 수 있을지 혹시 죽지는 않을지 그런 문제를 아예 고민조차 하지 않았다.

예상대로였다.

정파십존 가운데 셋이 죽었다. 이제 정파십존은 일곱이 남았고 흑도팔군은 여섯이 남았다. 얼추 균형이 맞추어졌다. 더 죽일 수 있으면 좋겠지만 비겁한 저들은 정파십존을 더 투입하지 않았다.

제갈세가의 기관진식은 무시무시했다.

그 위력이 예상을 한참 벗어났다. 하지만 그게 어떻단 말인가. 죽음을 달관한 그녀에게 위험이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중원 무림에 복수를 완수한 것이 아니어서 아쉬움은 남았지만 이런 죽음을 항상 각오했기에 두렵지는 않았다.

적어도 주석하를 만나기 전까지는.

주석하는 미로를 탈출하고자 열심히 돌아다녔다. 그가 왜 삶에 집착하는지 그녀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단지 그는 그녀가 살리겠다고 생각한 자였기에, 아니 천마가 잘 감시하라고 했던 자였기에 옆에서 함께 행동했다. 그녀가 살겠다고 따라다닌 것은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이런 관심이 처음이 아니었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부터 이상하게도 그녀는 그를 따라다녔다. 그녀의 목적과 그의 움직임이 겹친 탓도 있었으나 왜 그를 죽이지 않고 내버려 두었는지 그녀 자신도 몰랐다.

주석하는 이상한 사람이다. 무엇이 이상한지는 그녀도 답할 수 없다. 사실 그녀는 극도로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 자신의 문제점마저 전혀 몰랐다. 그러니 자신이 주석하를 뭔가 다르게 대한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어쨌든 지금 우설금은 주석하를 붙잡고 있었다. 그게 그녀의 의지인지 아니면 천마의 명령 때문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지만 물속에서 그를 구하려고 온 힘을 쏟고 있었다.

“하아!”

간신히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숨을 쉬었고 주석하의 얼굴 또한 끌어올려 숨을 쉬게 했다. 그나마 헤엄을 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녀의 붉은 옷자락이 물속에서 하늘거렸다.

이제 수면이 거의 천장에 닿았다.

물이 차는 바람에 기관이 작동을 멈추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 상황에서 암기가 쏟아지면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을 것이다.

다시 물에 잠긴 채 우설금은 주석하의 얼굴을 살폈다. 그의 안면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살고 싶은 건가?’

우설금은 그 심리를 이해하지 못했다. 죽음과 삶은 종이 한 장 차이인 것을.

하지만 그를 보는 순간 그를 살리고 싶었다. 그녀가 살고 싶은 게 아니라 그를 살리고 싶었다.

그녀는 미로의 기관진식을 전혀 모른다. 당연히 밖으로 빠져나갈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녀가 기억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주석하는 저 석벽이 최외곽 벽이기에 저 벽을 부수면 호수로 빠져나갈 수 있다고 했다.

주석하의 최후의 일격은 그녀가 보기에도 엄청났다. 인간의 내공이 아니었다. 그런 힘으로 저 벽을 후려쳤건만 저 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고도 실패했으니 그녀도 달리 수가 없었다.

이대로 물에 빠진 채 죽음을 맞이할까.

주석하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뭔가 억울했다. 아니 간절했다. 그를 살리고 싶은 욕망이 점점 커졌다.

‘그래, 한 번 더 해보자.’

우설금은 주석하를 끌고 그 석벽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홍철산으로 힘껏 석벽을 가격했다.

쿵!

역시 단단했다. 다만 뭔가 느낌이 다르다. 예전처럼 석벽이 온전하지 않다는 감이 왔다.

주석하의 그 엄청난 공력을 두들겨 맞았으니 어쩌면 당연한가.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생겼다. 우설금은 다시 머리를 내밀어 호흡을 안정시켰다. 아무래도 이번이 마지막일 듯하다. 수위가 천장에 거의 닿아 있었다.

우설금은 내력을 끌어올렸다. 마공을 익히던 초기에 천마의 안배로 쌓았던 무지막지한 내공이 그녀의 의지에 반응하여 휘몰아쳤다.

단천마공(丹天魔功). 그녀의 근간을 이루는 마공이자 마공의 정점에 닿은 몇 안 되는 마교 최강의 무공이다. 천마가 하사한, 그녀에게 가장 적합한 마공이다.

우우우웅-

기를 받은 홍철산이 진동하면서 물을 밀어냈다. 정파십존을 훨씬 뛰어넘는 우설금의 마공이 전력을 다해 펼쳐졌다.

홍철산에서 뿜어진 기운이 붉은 뇌전이 되어 석벽을 때렸다. 붉은 기운이 온 세상을 물들였다.

콰아앙!

거대한 진동이 미로를 울렸고 석벽에 균열이 발생했다. 주석하의 공격을 받고 약해졌던 석벽이 우설금의 공세를 더는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기 시작했다.

콰르르르-

홍철산의 기운이 집중된 곳에 작은 구멍이 뚫렸고 그 지점을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균열이 쭉쭉 뻗어 나갔다.

우설금은 발로 힘껏 석벽을 찼다.

쿠쿠쿵!

석벽이 마침내 무너지며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그 바깥세상도 물이었다. 다만 미로 내부가 아니라 호수 수면 아래였다.

방향이 정해지자 우설금은 주석하를 붙들고 재빨리 구멍을 빠져나갔다.

미로 내부와 달리 외부의 물은 흐름이 없이 고요했다.

우설금은 주석하를 붙잡은 채 수면을 찾았다. 어두운 밤이라 어디가 위인지 혼란스러웠으나 그녀는 본능에 따랐다. 열심히 발을 놀리자 몸이 부상했다.

“하아!”

간신히 얼굴을 밖으로 내밀고 숨을 들이마신 다음 우설금은 주석하를 꼭 붙잡았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바로 파악되지 않았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간신히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주위를 살폈다.

놀랍게도 상춘원 전각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마도 물속에 잠겼을 것이다.

넓은 호수 밖으로 제갈세가의 건물이 곳곳에 보였다. 지금 그곳은 야심한 밤이 아니었다. 시끄러운 싸움 소리가 울렸다. 누가 쳐들어온 걸까.

어쨌든 그녀와는 무관했다. 아니 그녀에게 도움을 주는 현상이다. 적어도 제갈세가의 이목이 저쪽에서 벌어진 싸움에 집중되어 있을 테니 상대적으로 이곳 상춘원 호수는 경계가 덜 할 것이다.

“천운이네.”

우설금은 마교칠왕의 일인인 천력마부가 이곳에 왔음을 전혀 몰랐다.

지금 그녀는 그런 사정을 세심하게 살필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주석하를 끌어안고 호숫가로 향했다. 최대한 제갈세가의 본진과 멀리 떨어진 방향으로 목표를 잡았다.

비록 두 십존을 상대하느라 내력 소모가 심했고 석벽에 최후의 일격을 가하느라 내력이 거의 바닥났지만 호수를 헤엄치기는 어렵지 않았다. 다만 마음이 급했다. 얼른 주석하의 상태를 확인해야 하니까.

간신히 호숫가에 닿은 그녀는 주석하를 끌어올렸다.

흑검소와 홍철산을 옆에 던지고 우설금은 주석하를 살폈다.

숨을 쉬지 않았다. 그녀는 재빨리 주석하의 배와 가슴을 두 손으로 누르며 응급처치를 시도했다.

울컥-

주석하의 입에서 물이 쏟아졌다.

몇 차례 두 손으로 가슴을 압박하던 그녀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입을 맞췄다.

얼마나 반복했을까. 주석하의 호흡이 돌아왔다.

그제야 우설금은 피로에 지쳐 옆으로 떨어졌다. 주석하의 상태를 다시 확인한 후 우설금은 가부좌를 틀고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

동이 틀 때 제갈휘는 반파된 전각을 바라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직도 멍했다. 중원사룡과 천상삼화가 베푼 환영 연회를 빌미로 주석하를 상춘원 기관진식에 감금했다.

계획은 완벽했다.

상춘원 지하에 설치된 기관진식만으로도 충분히 주석하를 잡을 수 있다고 예상했지만 만전을 기하려고 무려 정파십존 셋을 투입했다. 설사 주석하의 무공이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더라도 절대 무사할 수 없다고 자신했다.

그런데 결과는…….

주석하는 빠져나오지 못했다. 이것만 예상과 부합했다. 그 대가는 너무 컸다. 무려 정파십존 셋도 빠져나오지 못했다. 이미 상춘원은 완전히 호수에 가라앉았기에 주석하뿐만 아니라 십존 세 사람마저도 죽었을 것이다. 물속에서 살아있을 사람은 없다.

그 와중에 갑자기 괴인이 제갈세가를 침입했다. 주석하와의 연관성은 아직 알 수 없다. 그 괴인을 자하검존과 창궁무존 둘이서 상대하긴 했지만…….

“대체 어떻게 된 건가?”

제갈휘는 답답함에 속이 쓰라렸다.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 현상이 벌어졌을 때 나타나는 신체적 증상이다. 이 증상이 심해지면 가끔 피를 토하기도 하고…….

“젠장!”

분노로 주먹을 불끈 쥐고 있을 때 허공에서 두 사람이 표표히 내려왔다. 창궁무존 남궁후와 자하검존이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남궁후가 고개를 저었다.

“놓쳤소.”

“두 사람이 합공했는데도?”

“상대의 무공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소. 만일 우리 둘이 연합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밀렸을 거요.”

남궁후의 대답에 제갈휘는 충격을 받았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무려 정파십존을 뛰어넘는 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경악해서 입을 쩍 벌린 제갈휘에게 자하검존이 조용히 말했다.

“상대의 정체는 알 수 없으나 그 무공은 조금 특별했다네. 내 짐작으로는 마공처럼 느껴졌어. 마교 인물이 아닐까 의심하네.”

뒤를 이은 자하검존의 견해에 제갈휘는 벼락을 맞은 듯 몸을 떨었다. 갑자기 마교가 왜 등장하는가. 하필 이 시점에?

“확실한가?”

“그런 듯하네.”

남궁후도 자하검존의 의견에 동조했다.

머릿속에 복잡해지자 제갈휘는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주석하와 마교가 관련이 있었단 말인가…….”

“주석하? 주 공자가 왜?”

남궁후가 놀라서 두 사람을 독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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